홀연히 콧구멍이 없다는 소리 듣고

홀문인어무비공 忽聞人語無鼻孔 홀연히 콧구멍이 없다는 소리 듣고

돈각삼천시오가 頓覺三千是吾家 몰록 온 우주가 내 집인 줄 알았네.

유월연암산하로 六月 岩山下路 유월의 연암산 아래 길에

야인무사태평가 野人無事太平歌 하릴없는 들사람 태평가를 부르구나.

이 시의 작자 경허(鏡虛)선사(1849~1912)는 한말의 어지러운 때를 산 고승이지만, 불교 특히 선불교를 중흥시킨 선사로 추앙받는 스님이다. 속성은 송(宋)씨이며 전주출신이었다. 9세에 출가하여 은사인 계허(桂虛)스님 밑에서 지내다가 마을의 선비에게 한학을 공부하여 나중에 불교 경론을 익힌 뒤, 22살에 동학사의 강사가 되어 학인들을 가르쳤다.

30살 때인 어느날 은사인 계허스님을 만나러 한양을 가다가 심한 폭풍우를 만났다. 가까운 인가를 찾아가 비를 피하려 하였으나, 마침 돌림병이 퍼져 어느 집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마을 밖 큰 나무 밑에서 밤을 새며, 병에 걸려 죽을지 모른다는 죽음의식에 시달리다가, 생사를 해결하지 못한 자신의 본분공부를 자각하고 다시 발심하는 계기를 얻었다.

동학사로 되돌아 온 그는 학인들을 해산시킨 후, 방문을 걸어 잠근 채 문 밑으로 주먹밥을 넣을 수 있는 구멍을 만들고, 목 밑에 송곳을 꽂은 널빤지를 바쳐 놓고 졸음을 쫓으며 용맹정진을 시작 했다. 그리하여 세 달이 지난 어느 날 “시은(施恩)만 지고 도를 이루지 못한 중이 죽어 소로 태어나되 코 구멍이 없이 태어난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묻는 제자 원규(元奎)의 말에 오도(悟道)를 했다. 그때 지은 시다. 말하자면 경허 스님의 오도송이다.

그 후 그는 제방에서 선을 지도하면서 선의 생활화와 일상화를 모색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때로는 파격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아 역행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문둥병에 걸린 여자와 동침을 했고, 여자를 희롱하여 몰매를 맞기도 했으며 술에 만취하여 법당에 오르는 등 숱한 기행을 보였다. 만년에는 절을 떠나 봉두난발하여 거짓 가명을 쓰면서 촌락을 다니며 무애행을 보였다. 또 다시 유관(儒冠)을 쓰고 훈장이 되어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64세의 일기로 1912년 4월 25일에 입적했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6월 제43호

홀로 한가히 사니 오가는 사람 없고

처독거한절왕환 處獨居閒絶往還 홀로 한가히 사니 오가는 사람 없고

지호명월조고한 只呼明月照孤寒 다만 밝은 달을 불러 외롭고 쓸쓸함을 달래 본다네.

빙군막문생애사 憑君莫問生涯事 그대는 내 생애의 일을 묻지 마시오.

만경연파수첩산 萬頃煙波數疊山 앞에는 강물이요 뒤에는 첩첩한 산이라오.

유배지에서 지은 이 시는 조선조 연산군 때 성리학자 김굉필(金宏弼1454~1504)이 지은 것이다. 일찍이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힌 그는 성종 때 생원시에 합격한 것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랐으나 당파싸움의 정변 때문에 두 번이나 사화의 해를 입고 생애를 마쳤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난 뒤 평안도 의천에 유배 되었다.

유배지에서도 학문에 힘써 조광조에게 학맥을 전수하여 유학사의 정맥을 잇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1504년 갑자사화를 만나 극형에 처해져 생애를 마쳤다. 유학의 진흥을 도모하기 위하여 불교를 배척하기도 하였다. 나이 30에 이르도록 소학에만 몰두하다가 서른이 넘어 육경을 섭렵 대 학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홀로 산창에 기대니

독의산창야색한 獨倚山窓夜色寒 홀로 산창에 기대니 밤 기운이 차갑다

매초월상정단단 梅梢月上正團團 매화가지 끝에 달은 떠 둥글구나

불수갱환미풍지 不須更喚微風至 봄바람 불러올 일 무어 있겠나?

자유청향만원간 自有淸香滿院間 맑은 향기 저절로 집 안에 가득하네.

이 시는 퇴계 이황이 도산서원에서 달밤에 매화를 보고 읊은 시다. 원제목이 <도산월야영매(陶山月夜詠梅)>라 되어 있다. 차가운 산골의 밤, 달빛마저 차가운데 청빈하고 지조 있게 사는 도학자는 가슴에 천지의 기를 느끼며 달빛 젖은 사색에 몰두한다. 뜰에 심은 매화는 어쩌면 자신의 성품을 상징하는 꽃일 것이다. 그 매화가지 끝에 마침 보름달이 걸려 있다. 인동의 초목이 봄을 기다리며 산자락에 섰는데 매화 일지향이 뜰에 가득하다.

퇴계는 매화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매화시첩>이란 시집 안에 매화를 읊은 시가 무려 104수나 된다. 정한강(鄭寒岡)은 집 둘레에 백여 그루의 매화를 심어 놓고 자기 집을 백매원(百梅園)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옛날의 선비나 학자들이 매화를 특히 좋아했다는 사실은 매화의 기상이 청아한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군자에 비유한 것도 그렇고 아무튼 매향이야말로 최고의 향취를 사람에게 선사한다. 사람의 인격에서 풍기는 향기가 있다면 그 역시 매화 향기와 같을 것이다. 맑고 은은한 매화의 이미지가 사람의 마음속에서 기실은 살아나야 할 것이다.

지안스님 해설. 월간반야 2003년 2월 (제2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