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스님─ 큰스님 삶의 지혜를 주십시오(1)

큰스님 삶의 지혜를 주십시오(1) 보성큰스님 문:다른 종교와 대비되는 불교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답:지금은 ‘말의 공해(公害)시대’입니다.

따라서 불교도 말이 차츰 많아지고 있습니다.

불교는 말로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몸으로 실천하는 종교입니다.

수행의 종교입니다.

서양 종교는 교주께서 말씀하신 진리를 나름대로 해석하고 말재주를 부리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수행이 부족합니다.

수행이 없는 말과 수행이 수반된 말은 무게가 다르고 깊이가 다릅니다.

그럼 불교의 수행이란 무엇인가? 앞서 이야기 하였듯이 살인마 앙굴리마라가 보이는 사람마다 죽이고 다니다가 부처님을 만나 ‘멈춰라’고 외쳤고, 부처님 또한 앙굴리 마라에게 ‘멈춰라’고 하셨지요.

두 분의 ‘멈춰라’는 말은 똑같지만 그 속에 있는 뜻은 전혀 다릅니다.

앙굴리마라가 ‘멈춰라’고 한 것은 부처님을 상해하기 위해 그 자리에 멈추어 서라는 뜻이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앙굴리마라의 살심(殺心)과 마음의 동요를 멈추라는 뜻입니다.

이렇듯 불교는 말로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릇되이 움직이는 마음을 멈추는 것이 불교의 실천이요, 수행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문:불자는 무엇을 수행의 지침으로 삼고 살아야 합니까? 답:첫째, ‘실천, 행(行)’입니다.

입으로 하는 말은 멀리 귀양 보내고, 한 가지라도 알뜰한 생각으로 실천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실한 마음으로 한길로 쭉 갈줄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하거나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 을 부러워하지도 말고, 제 갈 길을 꼭 붙잡고 가는 마음자세 가 필요합니다.

둘째, 항상 자신을 돌아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나의 일은 내가 잘 안다’, ‘내 병은 내가 잘 안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만, 정작 자신을 제대로 돌아보며 반성하고 참회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스스로를 제대로 돌아보지 않고 어지럽고 괴 롭게 사는 것을 지옥’이라 하셨고, ‘스스로의 마음을 잘 다스 려 삶을 아름답게 승화시키면 극락세계’라고 하셨습니다.

회광반조(廻光返照)! 늘 빛을 돌이켜 스스로를 되돌아보면서 살면 수행은 저절로 익어가기 마련입니다.

문:어떻게 해야 자신을 제대로 돌아볼 수 있습니까? 답:일상의 모든 삶을 차근차근, 있는 그대로 보면 자신을 잘 돌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차근차근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는 내가 나를 천천히, 살살 다루어야 합니다.

사람들 중에는 입에 들어간 밥조차 씹지 않고 넘기려는 이들 이 있습니다만, 밥을 천천히 씹으면서 맛을 느끼며 먹을 줄 알아야 합니다.

물도 천천히 음미하며 마셔야 합니다.

급하게 마시면 그 부드러운 물로 인해 체할 때가 많습니다.

있는 그대로! 만약 들은 것을 들은 대로 말하지 않으면 거짓말이 되고, 본 것을 본대로 전하지 않으면 또한 거짓말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 부처님께서는 “깊이 있고 신중하게 생각 하여 행동하고, 조작하지 않고 있는 진실 그대로를 받아들이 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로 하셨습니다.

이를 잘 실천하고 있는 분이 베트남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틱낫한 스님입니다.

그 스님은 걸음을 걸을 때마다 발이 땅에 닿는 것을 마음으로 느껴보라고 가르칩니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발걸음에 마음을 담아 허둥대지 않고 걷는 이라면, 자신이 하는 일들을 얼마나 신중히 하겠습니까? 늘 마음에 흔들림이 없는 선정의 상태에 들면 있는 그대로를 보는 지혜는 저절로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대담 및 정리 손영희 안춘상 -월간 [법공양]에서-

보성스님─ 짜지않은 소금 얻겠다면 인내하고 인내하라

짜지않은 소금 얻겠다면 인내하고 인내하라 조계총림 방장 보 성 스님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증득하신 부처님은 깨달으신 바를 어떻게 펼칠 수 있을까 고민하셨습니다.

깨닫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이 도리를 과연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진정 이 법을 세상에 펼쳐야 하는가.

그러나 부처님은 대자비심을 내어 설법하기에 이르렀고 그 법은 오늘날에도 이렇듯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겉옷만 벗고 속옷은 못 버려 여러분이 집을 떠나 이 법회에 온 연유는 저에게 무엇인가 얻어들으려는 뜻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저 역시 이 자리에서 무엇인가 여러분에게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분에게 줄 것은 없습니다.

저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그 뜻을 조금이나마 여러분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방편에 따라 말씀드릴 뿐입니다.

그러니 얻고 못 얻고는 여러분의 몫입니다.

이 자리서 무엇인가 하나라도 뇌리에 남아 여러분의 마음을 확 돌릴 수 있는 한마디를 가슴에 담아야 진정한 법문을 들은 것입니다.

지난 가을에는 온 산천이 불타는 듯한 단풍으로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습니다.

들녘은 황금빛 물결로 출렁였습니다.

지금은 단풍은 온데간데 없고 나무들은 옷을 벗고 하얀 눈을 맞으며 서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봄에는 다시 싹이 트고 꽃이 피겠지요.

지금의 국회 의사당이 들어서기 전 그 자리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당대의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욕심을 벗고 멋진 삶을 살아보자는 취지에서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던져버리고 거리를 활보한 적이 있습니다.

신문을 비롯한 매스컴은 이들을 향해 어떤 말을 했겠습니까? 또 이 소식을 접한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을 두고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각양각색이었겠지요? 얼마전 해외포교에 혁혁한 공로를 세우신 숭산 스님이 입적하셨습니다.

숭산 스님은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라는 책을 낸 현각 스님을 비롯해 많은 제자들을 두셨습니다.

그 중 무량 스님이라는 스님이 계십니다.

그 스님은 미국 로스엔젤레스 한 유지의 자제분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을 하지 않고 세월을 보내던 중 몇몇 젊은 사람과 함께 사회에 강한 메시지를 남기고자 누드인채로 로스엔젤레스 거리를 누볐습니다.

낮에는 옷을 벗고 돌아다녔지만 저녁에는 쌀쌀하니 모닥불을 피우고 옹기종기 모여 있었는데 바로 그 자리를 숭산 스님이 지나가게 됐습니다.

그냥 지나가셨을리 없던 숭산 스님이 그들에게 한마디 던집니다.

“겉옷은 벗었지만 속옷은 벗지 못했다.”

어리둥절한 젊은이들이 묻습니다.

“저희들은 보시다시피 속옷도 모두 던져버렸습니다.”

“겉옷만 벗어던졌지 너희들 속옷은 그대로 있다.

그 옷 하나 벗지 못하면서 지성인처럼 행세하려 해!” “진정 벗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가르쳐 주십시오.”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그냥 나체로 따라오면 나도 제정신 아닌 사람인줄 알 것이니 옷을 입고 찾아와라.

어디어디에 절이 있으니 그리 와라.”

젊은 사람 몇이 숭산 스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을 맞이한 숭산 스님은 부처님전에 절을 하라고 권합니다.

“부처님이 일러주신 방법이 있으나 그 길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저울질해 보아야겠다.

너희들 성의를 보고자 하니 부처님전에 절을 하라.”

고락의 변화속에서 헤매 그 젊은이들은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서툴지만 부처님전에 절을 올렸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숭산 스님과 마주앉았습니다.

숭산 스님이 묻습니다.

“누가 찾아왔는가?” “아무개가 찾아왔습니다” “그 이름은 누가 지어준 것인가?” “부모님이 지어주셨습니다.”

“지금 당장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지어보라.”

아무도 선뜻 이름을 짓지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에 몰린 사람처럼 꿈적하지 못하자 숭산 스님이 한마디 던졌습니다.

“자신의 이름 하나 짓지 못하는가.

남이 지어준 이름 말고 자신이 지은 이름으로 세상을 살아야 진정한 자유인이 아닌가?” 이에 젊은이들은 감동을 받고 한국선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그 젊은이들 중 한 사람이 바로 무량 스님입니다.

숭산 스님의 이런 한마디가 진정한 법문입니다.

그 법문을 의심없이 가슴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곧바로 부처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본래청정함에도 무명을 벗지 못해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은 다 알고 있지만 진정 내가 무명에 가려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인정하는데는 인색하기만 합니다.

그러니 자신을 돌아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에 온 것도 따지고 보면 헤매고 있기 때문에 온 것입니다.

무명 속에 헤매고만 있는 사람은 그 해결의 실마리를 잡을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았지만 이름 하나 지어주었을 뿐 그 무명은 벗겨줄 수 없습니다.

매일 사는 게 괴롭다 하지만 괴로움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사는 게 우리입니다.

먹을 것을 먹지 못하면 배고픔이 괴로움입니다.

밥 좀 먹으면 그 괴로움이 가시니 만사 해결된 것 같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귀로는 좋은 것 듣고 싶고, 혀로는 맛있는 것 느껴보고 싶고, 눈으로는 좋은 것만 보고 싶고, 한이 없습니다.

일시적인 괴로움만 알 뿐이니 그 괴로움 잠깐 없어지면 모든 것이 해결된 것 같지만 또 다른 괴로움이 밀려오지요.

부처님이 말씀하신 고(苦)는 이런 일시적인 단순한 괴로움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무명 속에 가려져 있음으로 해서 나타나는 고를 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고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면 무명을 걷어내야만 하는데 우리는 일시적 괴로움과 즐거움의 변화 속에서만 허덕이고 있으니 해결의 실마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무명을 벗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소금은 짠 것이 본성입니다.

짜지 않은 소금은 없습니다.

짜지 않은 소금을 얻으려면 스스로 그 소금을 계속 먹어보면서 적응해 짜지 않음을 느낄 수 있을 때 짜지 않은 소금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스님 보고 당장 ‘짜지 않은 소금을 달라’고 합니다.

저인들 여러분에게 이 세상에 있지도 않은 짜지 않은 소금을 어찌 줄 수 있습니까? 스스로 얻어야만 합니다.

‘코브라 마음’이라도 가졌는가 숭산 스님이 옷 벗는 그 방법을 일러주겠다면 부처님전에 절을 하라고 했지요?부처님은 그 무명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름길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남이 대신 걸어줄 수도 없거니와 인내 하지 않고는 도달할 수도 없습니다.

부처님이 수행하실 때 코브라가 부처님의 그늘이 되어주는 장면에 대해 많은 분들이 아실 것입니다.

부처님이 코브라에게 그늘을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까? 코브라가 마음을 낸 것입니다.

뱀의 모양을 한 코브라지만 그 높고 깊은 마음을 냈으니 더 이상의 뱀이 아닌 것입니다.

근본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백척간두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라 했지요? 지금 이 순간, 이 법문 속에서 느끼는 바가 있다면, 단 한마디라도 가슴에 남는 것이 있다면 한 발짝 더 내딛어 보세요.

그 마음을 내는 순간 깨달음은 멀지 않은 것입니다.

정리=채한기 기자 보성 스님의 이 법문은 지난 해 12월 12일 광주 보각사에서 설해진 것이다.

보성 스님은? 조계총림 송광사 방장 보성 스님은 1928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1945년 해인사에서 구산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1950년 해인사에서 상월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한 후 1973년부터 1994년까지 송광사 주지와 중앙종회의원 등을 역임했다.

1997년 조계총림 제5대 방장에 오른 보성 스님은 현재 송광사에 주석하며 후학들을 제접하고 있다.

(2005-01-19/788호)

보성스님─ 부처님은 어떻게 살라고 하셨는가

부처님은 어떻게 살라고 하셨는가?

-보성 스님-

불어오는 바람을 움켜잡고 흘러가는 물을 멈추게 할 수는 있을지언정,

세월을 붙잡을 수는 없습니다.

올해도 벌써 반 가까이 지나갔습니다.

우리가 한 세상을 산다고 하지만, 하루하루가

지나 한 달이 되고, 한달 두달이 쌓여서 1년이 되며,

1년씩 흘려보내다 보면 문득 한 세상이

막을 내립니다.

한 번 손 끝으로 헤아려 보십시오.

‘나’의 나이가 얼마인지를? 그리고 어디쯤에 와 있는지를?

하지만 지금, 어느 누구도 이것을 문제로 삼는 이는 드뭅니다.

과연 우리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은 무엇일까요?

나이 일까요? 아닙니다.

부처님일까요? 아닙니다.

진리일까요?

아닙니다.

‘행복하게 잘 살아야지’ 바로 이 생각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고생 덜하고 행복하게 살 것인가?

아들딸 좋은 학교에 보내고 좋은 직장에 취직 시킬 것인가?

관심은 오로지 나의 행복과 가족의 행복으로 모아집니다.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 마음은 한정이 없습니다.

높고 크기로는 한라산이나 지리산 보다 더 크고,

넓기로는 동해바다보다 더 넓습니다.

그러나 내가 행복해지고 내 가족이 잘 되려면 ‘나’가 무엇인지.

어느 자리에 와 있는지부터 잘 알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가만히 돌이켜 보십시오.

내가 지금 어떠한 지점에 와 있는지?

내가 앉아 있는 자리가 어떠한 자리인지? 지금의 내가 어떠한 나인지?

도대체 나는 무엇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인지? 얕은 욕심을 부리며

사는 사람인지? 깊이 있게 행복을 구하는 사람인지? 등을 곰곰이

돌아보십시오.

“나”라는 존재를 제대로 아는 이는 참으로 드뭅니다.

누구에게 물어보아도‘나’에 대해 말해 주는 이는 극히 드뭅니다.

그럼 나는 ‘나’를 알까요? 모두가 나를 위해 살고, 잔뜩 힘을 주어

“나, 나”하면서 큰소리를 치고는 있지만, ‘진짜 나에 대해 말해 보라’고 하면

입을 꽉 다문 채 벙어리가 되고 맙니다.

어떤 이는 말할 것입니다.

“나요? 내가 왜 나를 몰라요? 잘 알지요.”

그러나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며 생년월일 등, 외형적인 사항들만

열심히 늘어 놓을 뿐,

진짜 나에 대한 설명은 잘하지를 못합니다.

이렇듯 나도 잘 모르고 내가 있는 자리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나의 행복’을 가꾸고 그 행복을 이루어 낼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지금의 ‘나’와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잘 점검할 줄 모르면

참된 행복은 나에게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넓은 야망이 있다한들, 그 야망은

나를 힘들게만 만들 뿐입니다.

과연 어떻게 하여야 하루하루를 헛되지 않게,

안락하게 살 수 있는 것일까요?

오늘을 잘 다듬으며 살아야 가능합니다.

오늘을 알뜰하게 다듬는 노력이 있어야만

내일을 바람직하게 살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를 제대로 다듬는 노력이 없으면 한평생이 막막해집니다.

물론 살다가 보면 방향을 잃고 표류할 때가 가끔씩 있습니다.

이것이 누구 탓입니까? 내탓입니다.

‘나’를 버리고 누가 있습니까?

또 방향을 잃고 표류할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갈 길을 잃어버린 ‘나’를 꾸짖고, 정신을 차려 길을 찾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책임을 돌리기보다는,

남을 탓하고 주변을 원망합니다.

살아온 환경을 원망하고 여기저기에 핑계를 대면서,

이런 저런 생각만 굴리다가 주저앉아

버립니다.

그리하여 더 큰 불행의 수렁 속에 빠져듭니다.

내 탓인데 주저앉아 있으면 어떡합니까?

위기를 벗어날 생각은 않고 근심걱정에 빠져만 있으면 누가 구해줍니까?

이러한 때가 찾아들면 스스로 용기를 불러 일으켜야 합니다.

용기를 불러 일으켜야 기운이 생겨나고 지금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물론 살다보면 근심걱정은 늘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업보중생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근심걱정에 잠기고 불안 속에 빠져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어지간한 근심걱정은 모두 내려놓고, 지금 이 자리에서

해야 할 바를 잘 실천하며 살 줄 알아야 합니다.

일상의 의식을 바꾸어 나에 대한 집착을 조금씩 비우고,

나에게 찾아든 근심걱정 등을 자꾸자꾸 내려놓고자 하십시오.

의식이 깨어나고 의식이 바뀌어야 삶에 변화가 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불교가 무엇입니까?

‘나’ 곧 나의 참된 인간성을 회복하도록 깨우치는 종교입니다.

부처님은 그 길을 보이신 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이 마땅히 가야 할 길을 발견하여 그 길을

사람들에게 전하신 분입니다.

그 길을 다듬어 모든 사람들이

갈 수 있게 하신 분입니다.

인간 정신의 황무지에서 탐욕을 갈아엎고 성냄을 잠재우고

어리석음을 뽑아내어, 씨뿌릴 준비를

마칠 수 있도록 하신 분입니다.

물론 이 황폐한 대지를 경작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비와

햇볕과 거름도 필요하고 제초작업도

해주어야 합니다.

인간 정신의 경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하루 일상 속에서 스스로를 지켜보면서, 불필요한

근심걱정을 내려놓고 나를 향상시키는,

선하고도 바람직한 일들을 오늘 이 자리에서 해나가야 합니다.

결코 나에게 맞고 좋은 것만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싫든 좋든 오늘을 기꺼이 맞이하여, 이 자리에서 해야 할 일들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제 곧 무더운 여름이 됩니다.

덥기 때문에 견디기가 힘들고,

덥기 때문에 활동하는 것이 편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무더위가 없어 보십시오.

우선 쌀밥을 먹지 못합니다.

여러 가지 곡식이며 과일이며 채소 등을 먹을 수 없습니다.

덥고 비가 많은 여름 덕분에, 생존에 필요한 곡식 등을

잘 재배 할 수 있습니다.

그 더운 땡볕을 이용하지 않으면 결실은 있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더위가 싫다고 게을리 살면 어떻게 됩니까?

논밭은 잡초에 지배당하여 황폐해져 버리고, 수확은 아득해져 버립니다.

그러므로 여름의 더위를 고맙게 생각하여 잘 받아들이고 잘 활용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수확이 있고 성공이 있고 겨울이 편안해 집니다.

더운 여름만이 아닙니다.

신선한 가을도 필요하고, 따스한 봄과 추운 겨울도 필요합니다 .

이 모두가 있어야 이 지구가, 이 자연이, 이 인간의 세계가 건전해 집니다.

우리 인생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계절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어느 것 하나, 거부하거나 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중 어느 계절에도 집착해서는 안 되지만,

그 계절마다 취해야 할 것은 분명히 취해야 하고, 그 계절에 해야 할 것은

분명히 해야 합니다.

왜? 봄, 여름, 가을, 겨울과인간은 늘 함께 해야할 인연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봄에는 따스한 기운으로 모든 것을

소생시키고, 여름에는 땀을 흘리고,

가을에는 풍요로움과 신선함을 누릴 줄 알아야 하며,

삭막한 겨울에는 쉴 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반야의 실천입니다.

깊이 있게 반야를 실천하여 바라밀에 이르는

‘행심반야바라밀(行深般若波羅蜜)의 삶입니다.

반야의 실천, 지혜롭게 사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을 알뜰하게, 간절하게, 성실하게, 깊이 있게 가꾸면

지혜롭게 살 수 있습니다.

반야바라밀을 성취하기 위해서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제대로 노력해 보겠다’는 의지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나를 밝은 쪽으로 가꾸어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강조하신 가르침은 행심반야바라밀이요

극락의 삶입니다.

반야바라밀을 깊이 있게 실천하여 극락 같은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가 나를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밝은 쪽으로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조금 덥고 조금 춥다고 하여 나태해지거나 움츠러 들어서도 아니 되고,

조금 배가 고프다고 하여 허겁지겁 살아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이 세상은 춥기도 하고 덥기도 하고 배부를 때도 있고

배고플 때도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이 이러한 곳일진대, 싫어한들 별 수가 있겠습니까?

싫은 그 속에서 잘 해야 합니다.

내가 나를 잘 다루고 지키고 밝은 쪽으로 가꾸어 나가면서,

적절하게 대처하면 됩니다.

내가 나를 적절하게 다루고 지키고

가꾸어 나가는 것.

이것이 행심반야바라밀입니다.

내가 나와 내 주위를 깊이 있게 들여다 보고, 나와 남을 적절하게

다루고 지키고 가꾸면서 함께 살리는 삶은 사는 것.

이것이 극락 같은 삶이요 행심반야바라밀의 삶입니다.

요즘 많은 불자들이 기도를 합니다.

왜 기도를 합니까?

극락 같은 삶을 이루고자 함입니다.

이 때 적절한 원을 세워

바른 방법으로 기도를 하면 기도 성취가

되지 않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런데 욕심으로 기도를 하거나

요행을 바라고 기도를 하면 절대로 기도는 성취되지 않습니다.

욕심과 요행수를 떠나 알뜰하고 성실하게 깊이 있는 마음으로

기도하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왜? 알뜰하고 성실하고 깊이 있는

이 마음 자세가 바로 진짜 기도요,

내가 알뜰하고 성실하고 깊이 있게 행하는 그 기도자체가

바로 나를 밝은 쪽으로 나아가게 하는

행심반야바라밀, 곧 깊은 반야바라밀의 실천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행복을 바란다면 나와 가족과 이웃을 향해

허욕과 집착을 버리고 늘 행심반야바라밀로 임하십시오.

알뜰하고 성실하고 깊이 있게 임하십시오.

이렇게 살면 모든 것이

다 원만하게 해결됩니다.

실로 불자의 기도는 ‘나’의 그릇된

집착을 벗어버리는 기도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

그릇된 집착이라 함은 ‘나’의 허욕입니다.

가령 가족을 향한

허욕을 예를 들면 자식에 대한 그릇된 욕심,

내 자식이기 때문에 갖게 되는 그릇된 집착과 기대심리 등입니다.

이것부터 놓아버려야 합니다.

가족에 대한 ‘나’ 의 그릇된 집착을 버리고 헛된 욕심을 죽이면,

남편, 아내, 아들, 딸 들은 차츰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여야 이 그릇된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아주 간단합니다.

‘잘못했습니다’로 기도를 시작하면 됩니다.

참회의 마음을 품고, 참회의 절을 하고, 참회의 염불을 하면 됩니다.

지극하고 성실하고 깊이 있게 ‘잘못했습니다.

’ 하면서

참회를 하면, 나의 허욕과 집착은 여름철에 얼음 녹듯이 녹아내립니다.

그 다음에 축원을 하십시오.

‘성실하게 일하는 남편의

승진이나 성공’을 축원하고, ‘고3인 우리 아들딸 원하는 대학에

잘 가게 해주십사’ 축원하고, ‘가족 모두의 건강과 집안의 평안’을

축원하십시오.

그리고 나의 공부와 향상, 곧 행심반야바라밀에 대해서도

축원 하십시오.

모든 축원이 잘 이루어 질 것입니다.

절대로 허욕에 찌들고 집착에 찌든 기도는 하지 마십시오.

허욕에서 비롯된 기도의 결과는 자명합니다.

만사불성(萬事不成)입니다.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반대로 ‘나’의 욕심과 집착을 참회하고,

알뜰함과 정성을 담아 기도하면 반드시 성취됩니다.

그리고 여기에다 자비를 더하면 그야말로

참된 불자가 됩니다.

자비(慈悲)! 자비가 무엇입니까? 주위를 잘 살피고 돌아보고

가꾸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자비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정의하면, 나도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는

자리이타의 삶을 사는 것이 자비로운 삶입니다.

그러나 내 이롭기를 앞세우면 남을 이롭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더욱 이기적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늘 ‘남을 돌아보고

살피고 베풀며 살 것’을 강조하고,

이를 일컬어 자비라고 칭하는 것입니다.

이 자비에 대해서는 참으로 할 말이 많지만 내가 좋아하는

티베트의 지도자 달라이라마의 이야기로 대신 하고자 합니다.

나는 달라이라마를 참 좋아합니다.

달라이라마는 나라를 잃고

조국을 떠난 상황에서도 세상의 평화를 위해 헌신하고 있으며,

자신들을 박해한 사람들을 용서 했습니다.

용서의 진정한 의미를 행동으로 보여준 그는 참으로 용기 있는 분입니다.

달라이라마는 정직한 분입니다.

그이 말에는 가식이 없습니다.

그럴듯하게 꾸민 말이나 어려운 말을 쓰는 법이 없습니다.

평범한 말과 일상의 언어로 많은 사람들을 평화로움과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또한 달라이라마는 유쾌한 분입니다.

남의 나라에 기대어 살면서도 자신들을 그곳으로 내친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사랑으로 돌려 인류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그는 진정한 어른 노릇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용서와 정직과 유쾌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바로 자비심으로부터 나옵니다.

자비심이 깊기 때문에 늘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달라이라마를 처음 만난 것은 20여 년 전인 1991년이며,

첫 만남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라싸에서 참으로 잘 쫓겨나셨습니다.

아니었으면 당신의 놀이터가

어떻게 전 세계로 넓어졌겠습니까?

모영감(모택동)의 은혜가 큽니다” 달라이라마는 박장대소를 하였고,

나는 또 물었습니다.

“모영감이 죽었을 때 조전은 보냈는지요?”

“예, 바로 보냈습니다.”

사실 도의 차원에서 보면 은인과 원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오랜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농담을 나누었습니다.

인자하고 마음씨 좋은 달라이라마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만남이 이어졌습니다.

달라이라마는 세계인과

대화를 나눌 때, 일상적인 대화의 방법으로 상대방이 그 너머의 세계를

스스로 깨닫게 합니다.

종교의 우열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훌륭한 자질과 품성을 갖추고 있다고 가르치며,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믿게 합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자비심입니다.

달라이라마는 사람들에게 인과의 도리를 일러주고 세계의 본질과 현상을

이야기하여 스스로 깨치도록 도와줍니다.

깨달음의 길이

스스로에게 있다는 것을 일러주고 스스로가 깨닫도록 도와주는 것.

이것이 바로 자비입니다.

불교의 본질은 자비입니다.

어떻게

실천하는 것이 자비일까요?

달라이라마는 1989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을 때,

상금의 대부분을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썼습니다.

나병 환자의 치료에 쓰라며 테레사 수녀에게 보시하였고,

거액을 굶주리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 썼습니다.

그 때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당신네들에게도 참으로 많은 난민들이 있습니다.

그들도 잘 살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왜 아프리카에 그 소중한 상금을 줍니까?”

달라이라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티베트 사람들은 가난합니다.

난민의 수도 매우 많습니다.

하지만 못 먹어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배고픈 사람을 돕고 싶습니다.

아프리카에 보낸 상금으로,

다만 얼마의 배고픈 사람이라도 허기를 면하게 되었으면 합니다.

굶주린 사람을 먹여 살리는 일보다 더 급한 것은 없습니다.

아프리카는 지금 이 시간에도 굶어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 입니다.”

얼마나 멋진 마음가짐입니까? 얼마나 큰 자비심입니까?

부처님도 달라이라마도 분명 인간의 몸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도 인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간이 가야 할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 서로를 쪼개고 나누고

시기하고 다투는 일일랑은 내려놓고, 부처님께서 깨우쳐주신

가르침을 따라 인간의 기본을

새롭게 하고 의식을 새롭게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 일이 참된 기도요, 행심반야바라밀의 삶이요 진정한 자비임을

잊지 마시고, 헛된 집착과 욕망에서 벗어나 쉬임없이 흘러가는

이 인생을 멋있게 가꾸어,

영원한 행복을 증득하시기를 두 손 모아 축원 드립니다.

나무사생자부 석가모니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