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스님─ 짜지않은 소금 얻겠다면 인내하고 인내하라

짜지않은 소금 얻겠다면 인내하고 인내하라 조계총림 방장 보 성 스님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증득하신 부처님은 깨달으신 바를 어떻게 펼칠 수 있을까 고민하셨습니다.

깨닫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이 도리를 과연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진정 이 법을 세상에 펼쳐야 하는가.

그러나 부처님은 대자비심을 내어 설법하기에 이르렀고 그 법은 오늘날에도 이렇듯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겉옷만 벗고 속옷은 못 버려 여러분이 집을 떠나 이 법회에 온 연유는 저에게 무엇인가 얻어들으려는 뜻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저 역시 이 자리에서 무엇인가 여러분에게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분에게 줄 것은 없습니다.

저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그 뜻을 조금이나마 여러분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방편에 따라 말씀드릴 뿐입니다.

그러니 얻고 못 얻고는 여러분의 몫입니다.

이 자리서 무엇인가 하나라도 뇌리에 남아 여러분의 마음을 확 돌릴 수 있는 한마디를 가슴에 담아야 진정한 법문을 들은 것입니다.

지난 가을에는 온 산천이 불타는 듯한 단풍으로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습니다.

들녘은 황금빛 물결로 출렁였습니다.

지금은 단풍은 온데간데 없고 나무들은 옷을 벗고 하얀 눈을 맞으며 서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봄에는 다시 싹이 트고 꽃이 피겠지요.

지금의 국회 의사당이 들어서기 전 그 자리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당대의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욕심을 벗고 멋진 삶을 살아보자는 취지에서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던져버리고 거리를 활보한 적이 있습니다.

신문을 비롯한 매스컴은 이들을 향해 어떤 말을 했겠습니까? 또 이 소식을 접한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을 두고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각양각색이었겠지요? 얼마전 해외포교에 혁혁한 공로를 세우신 숭산 스님이 입적하셨습니다.

숭산 스님은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라는 책을 낸 현각 스님을 비롯해 많은 제자들을 두셨습니다.

그 중 무량 스님이라는 스님이 계십니다.

그 스님은 미국 로스엔젤레스 한 유지의 자제분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을 하지 않고 세월을 보내던 중 몇몇 젊은 사람과 함께 사회에 강한 메시지를 남기고자 누드인채로 로스엔젤레스 거리를 누볐습니다.

낮에는 옷을 벗고 돌아다녔지만 저녁에는 쌀쌀하니 모닥불을 피우고 옹기종기 모여 있었는데 바로 그 자리를 숭산 스님이 지나가게 됐습니다.

그냥 지나가셨을리 없던 숭산 스님이 그들에게 한마디 던집니다.

“겉옷은 벗었지만 속옷은 벗지 못했다.”

어리둥절한 젊은이들이 묻습니다.

“저희들은 보시다시피 속옷도 모두 던져버렸습니다.”

“겉옷만 벗어던졌지 너희들 속옷은 그대로 있다.

그 옷 하나 벗지 못하면서 지성인처럼 행세하려 해!” “진정 벗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가르쳐 주십시오.”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그냥 나체로 따라오면 나도 제정신 아닌 사람인줄 알 것이니 옷을 입고 찾아와라.

어디어디에 절이 있으니 그리 와라.”

젊은 사람 몇이 숭산 스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을 맞이한 숭산 스님은 부처님전에 절을 하라고 권합니다.

“부처님이 일러주신 방법이 있으나 그 길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저울질해 보아야겠다.

너희들 성의를 보고자 하니 부처님전에 절을 하라.”

고락의 변화속에서 헤매 그 젊은이들은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서툴지만 부처님전에 절을 올렸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숭산 스님과 마주앉았습니다.

숭산 스님이 묻습니다.

“누가 찾아왔는가?” “아무개가 찾아왔습니다” “그 이름은 누가 지어준 것인가?” “부모님이 지어주셨습니다.”

“지금 당장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지어보라.”

아무도 선뜻 이름을 짓지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에 몰린 사람처럼 꿈적하지 못하자 숭산 스님이 한마디 던졌습니다.

“자신의 이름 하나 짓지 못하는가.

남이 지어준 이름 말고 자신이 지은 이름으로 세상을 살아야 진정한 자유인이 아닌가?” 이에 젊은이들은 감동을 받고 한국선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그 젊은이들 중 한 사람이 바로 무량 스님입니다.

숭산 스님의 이런 한마디가 진정한 법문입니다.

그 법문을 의심없이 가슴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곧바로 부처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본래청정함에도 무명을 벗지 못해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은 다 알고 있지만 진정 내가 무명에 가려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인정하는데는 인색하기만 합니다.

그러니 자신을 돌아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에 온 것도 따지고 보면 헤매고 있기 때문에 온 것입니다.

무명 속에 헤매고만 있는 사람은 그 해결의 실마리를 잡을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았지만 이름 하나 지어주었을 뿐 그 무명은 벗겨줄 수 없습니다.

매일 사는 게 괴롭다 하지만 괴로움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사는 게 우리입니다.

먹을 것을 먹지 못하면 배고픔이 괴로움입니다.

밥 좀 먹으면 그 괴로움이 가시니 만사 해결된 것 같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귀로는 좋은 것 듣고 싶고, 혀로는 맛있는 것 느껴보고 싶고, 눈으로는 좋은 것만 보고 싶고, 한이 없습니다.

일시적인 괴로움만 알 뿐이니 그 괴로움 잠깐 없어지면 모든 것이 해결된 것 같지만 또 다른 괴로움이 밀려오지요.

부처님이 말씀하신 고(苦)는 이런 일시적인 단순한 괴로움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무명 속에 가려져 있음으로 해서 나타나는 고를 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고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면 무명을 걷어내야만 하는데 우리는 일시적 괴로움과 즐거움의 변화 속에서만 허덕이고 있으니 해결의 실마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무명을 벗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소금은 짠 것이 본성입니다.

짜지 않은 소금은 없습니다.

짜지 않은 소금을 얻으려면 스스로 그 소금을 계속 먹어보면서 적응해 짜지 않음을 느낄 수 있을 때 짜지 않은 소금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스님 보고 당장 ‘짜지 않은 소금을 달라’고 합니다.

저인들 여러분에게 이 세상에 있지도 않은 짜지 않은 소금을 어찌 줄 수 있습니까? 스스로 얻어야만 합니다.

‘코브라 마음’이라도 가졌는가 숭산 스님이 옷 벗는 그 방법을 일러주겠다면 부처님전에 절을 하라고 했지요?부처님은 그 무명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름길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남이 대신 걸어줄 수도 없거니와 인내 하지 않고는 도달할 수도 없습니다.

부처님이 수행하실 때 코브라가 부처님의 그늘이 되어주는 장면에 대해 많은 분들이 아실 것입니다.

부처님이 코브라에게 그늘을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까? 코브라가 마음을 낸 것입니다.

뱀의 모양을 한 코브라지만 그 높고 깊은 마음을 냈으니 더 이상의 뱀이 아닌 것입니다.

근본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백척간두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라 했지요? 지금 이 순간, 이 법문 속에서 느끼는 바가 있다면, 단 한마디라도 가슴에 남는 것이 있다면 한 발짝 더 내딛어 보세요.

그 마음을 내는 순간 깨달음은 멀지 않은 것입니다.

정리=채한기 기자 보성 스님의 이 법문은 지난 해 12월 12일 광주 보각사에서 설해진 것이다.

보성 스님은? 조계총림 송광사 방장 보성 스님은 1928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1945년 해인사에서 구산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1950년 해인사에서 상월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한 후 1973년부터 1994년까지 송광사 주지와 중앙종회의원 등을 역임했다.

1997년 조계총림 제5대 방장에 오른 보성 스님은 현재 송광사에 주석하며 후학들을 제접하고 있다.

(2005-01-19/7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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