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참나 찾을 수 있다

참나 찾을 수 있다

무비스님

“악을 악으로 되갚는 전쟁 연기의 도리 모르기 때문” 지금 온 세계의 시선이 아프가니스탄에 쏠려 있습니다.

이번 전쟁을 불교적 관점에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달라이 라마가 부시 대통령에게 ‘원한을 원한으로 갚으면 끝이 나지 않는다.오직 참음으로써만이 원한이 끝난다’는 (법구경)의 말을 인용해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참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하지만 참는 것만으로는 갈등이 풀리지 않습니다.

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이해가 필요합니다.

바른 이치를 이해함으로써만이 갈등이 풀릴 수 있습니다.

이치를 이해한다는 것은 연기의 도리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미국이 연기의 도리를 이해했다면 테러를 당했다고 해서 전쟁으로 되갚음을 하겠다고 나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목숨을 버려가며 왜 테러를 해야만 했는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모습을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코살라국의 유리왕이 자신의 나라인 가비라국과 석가족을 멸망시키기 위해 쳐들어왔을 때 타들어가는 마른나무 아래서 제자들과 함께 유리왕을 기다렸습니다.

유리왕은 그런 부처님을 보고 “왜 타들어가는 나무 아래에 서 있느냐”고 묻자 부처님께서는 “당신이 나의 조국에 쳐들어오는 것을 보니 내 마음이 이 나무와 같다”고 답했고, 유리왕은 부처님의 말씀에 감동해 되돌아갔습니다.

유리왕은 그 후 또다시 군사들을 이끌고 출정했다가 처음과 똑같이 나무 아래 있는 부처님을 보고는 또다시 되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유리왕이 세 번 째 출정을 하자 부처님은 유리왕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리를 피했습니다.

부처님의 이런 태도는 자존심을 내세워 무모하게 대응하는 미국의 행동이 얼마나 큰 화를 부를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부처님께서는 치욕과 민족을 잃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타들어가는 나무 아래서 유리왕을 기다렸습니다.

부처님께서 남과 나를 구분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나와 남을 구분하는 것은 적대감과 원한을 확대시킬 뿐입니다.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또다른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요즘 불교를 가르치거나 배우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가르치고 배우기 위해서는 진정한 자기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그리고 인간의 삶에 유익하고 값진 최상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화두로 삼아야 합니다.

불교의 가르침에서 연기나 인과법도 중요하지만 핵심은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인식입니다.

아무 조건이나 규제, 차별, 지위도 없고 끈도 없는 것이 진정한 ‘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온갖 차별과 지위와 끈에 얽매여 자기 자신을 올바로 인식할 겨를조차 없습니다.

불교의 위대성은 그런 모든 조건과 규제, 차별과 지위와 제약이 없는 참나를 인식시키는 가르침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진정한 생명이고 부처님의 생명인 것입니다.

견성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참나’를 찾는 것입니다.

나를 한순간도 떠나 있지 않는 ‘나’를 찾는다는 것은 불교를 많이 안다고 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선은 ‘참 나’에 대한 이론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하고, 그 바탕위에 확신이 자리 잡아야 합니다.

확신이 들면 ‘나’를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본체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무비스님─ 참 불자

『 참 불자 / 무비 스님 』 참 불자는 참 불교를 낳고, 참 불교는 옳바른 믿음과 이해와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즉 옳바른 스승을 만나 참다운 가르침을 자주 듣고 보아 깊이 사유하면서 이해하고 한 가지씩이라도 실천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옳바른 신행생활이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신 부처님께서 일생 동안 수 많은 말씀을 남기신 경전(經典)말씀을 옳바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흔히 팔만대장경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인류의 소중한 유산인 이 모든 경전은 부처님께서 삶과 죽음의 실상을 깨닫기 위하여 태자의 지위마저 버리고 육년간의 피나는 고행을 거치고 나서 큰 깨달음을 이루셨고, 그 깨달음의 내용을 모든 인류에게 전하기 위해 설하신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경전의 가르침이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그 깨달음의 내용과 사람들에 대한 큰 바램인 원력을 담고 있습니다. 깨달음의 내용과 원력을 우리는 부처님의 마음이라고 부르며, 경전의 말씀은 곧 부처님의 마음으로부터 비롯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자들은 경전을 통해 부처님의 마음을 읽고, 그 마음을 따라 자신도 부처님처럼 되고자 수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전 공부를 하는 것은 결국 부처님의 생각을 더듬어 보는 기회를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바람직한 불자, 즉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지름길을 찾아 가자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경전 공부를 함으로써 위대한 성자인 부처님의 생각을 좇아 우리도 부처님 같이 성공한 인생, 의미 있고 값진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경전 공부는 바로 부처님을 닮아 가려는 수행의 한 과정입니다. 세상살이에서 얻어지는 그 어떤 것보다도 부처님과 인연을 맺고, 부처님의 온갖 유익하고 참된 세계를 나의 것으로 만드는 일은 가장 큰 이익이요 보람입니다. 작은 벌레는 혼자의 힘으로는 멀리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잘 달리는 말의 꼬리에 붙어 있으면 하루에 천리를 갈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이 비록 보잘 것 없고 능력이 부족하더라도 인간으로서 이를 수 있는 궁극의 경지에 이르신 부처님의 지혜를 빌린다면 진정 유익하고 값진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수 많은 생명 중에서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그리고 부처님의 제자가 된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게다가 깨달음의 내용인 경전을 공부한다는 것은 더욱 큰 행복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부처님과 함께 하는 인생은 늘 새롭고 상쾌한 아침을 맞는 것과 같습니다. 결코 물러서지 않는 신심으로 경전 공부에 임하면, 우리 곁에 늘 부처님께서 함께하고 계심을 깨달을 것입니다. “잠 못 드는 사람에게 밤은 길고, 피곤한 나그네에게 길이 멀듯이, 진리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인생의 밤길은 멀고 험해라.” [법구경] –

무비스님

말씀 중에서 –

무비스님─ 일곱가지 진정한 보시

■일곱가지 진정한 보시/

무비스님

■ 돈 없이 베푸는 일곱가지 (無財七施) (잡보장경) 보시(布施)란 남에게 무엇을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이 보시에는 흔히 세 가지 형태의 보시가 있습니다.

《대지도론》 제 14에 보면 보시의 유형으로 법시(法施)·재시(財施)·무외시(無畏施)를 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법시란 진리를 모르고 무명 속에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재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보시의 개념으로 물질적인 것을 남에게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외시는 다른 사람에게 정신적 불안이나 공포를 주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보시입니다.

일반적으로 무엇을 베푼다고 할 때 거기에는 당연히 어떤 물질적인 것이 상정됩니다.

특히 물질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시하면 당연히 돈이나 물질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지요.

하지만 불교에서는 물질을 가지지 않고도 7가지의 보시를 베풀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재물을 갖지 않고 베푸는 일곱 가지 보시’라는 뜻의 무재칠시(無財七施)입니다.

1.

안시(眼施) 부드럽고 편안한 눈빛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드럽고 안온한 눈빛 하나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보시가 됩니다.

요즘처럼 서로가 서로를 이기고 극복해야할 경쟁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만나면 서로 첫눈에 강한 눈빛으로 상대를 제압하고자 날카롭게 반짝이는 눈빛으로 상대를 대합니다.

이런 눈빛은 사람들에게 경쟁심을 불러일으키고 불신을 심어주며 마음을 불안하게 합니다.

그럴 때 부드럽고 편안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2.

화안열색시(和顔悅色施) 자비롭고 미소 띤 얼굴로 사람을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도 안시와 비슷한 개념입니다.

흔히 외국 사람들이 우리 나라 사람들을 보고 늘 싸우는 표정이라고들 하지 않습니까? 성난 표정, 그리고 무심한 표정은 사회를 삭막하게 하고 서로간에 말없는 긴장감을 조성합니다.

하지만 얼굴에 화기애애하고 기쁨으로 가득찬 미소를 머금은 표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안겨주는 소중한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3.

언사시(言辭施)공손하고 아름다운 말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말 한 마디로 천냥 빚 갚는다는 속담도 있잖아요.

우리는 늘 험악한 말들을 쉽게 합니다.

일상생활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인터넷 게시판이나 대화방 같은 곳에 가보면 정말 눈뜨고 못 볼 지경입니다.

이렇게 험악한 말이나 가시돗힌 말은 자칫 상대방과 언쟁을 일으키고 분쟁에 휘말리게 합니다.

언사시는 삼업(三業) 가운데 구업(口業)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몸으로 짓는 열가지 업 가운데 입으로 짓는 업이 무려 네개나 된다는 점을 상기해 봐도 우리의 언어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수경에서도 첫 구가 바로 우리의 구업을 깨끗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부드럽고 친절하며 예의바른 말 한 마디, 그것은 자신의 인격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를 대하는 다른 사람에게는 따뜻한 보시행이 되는 것입니다.

4.

신시(身施) 예의 바르게 친절하게 사람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몸으로 베푸는 보시행으로 삼업 가운데 신업(身業)에 해당합니다.

사람을 만나면 공손한 자세로 반갑게 인사하고, 어른을 만나면 머리 숙여 인사할 줄 알고, 몸으로 남을 돕는 이런 행위들이 바로 몸으로 베푸는 보시행입니다.

이렇게 공손하고 예의바른 몸가짐은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훈훈한 마음을 안겨주는 보시행입니다.

5.

심시(心施) 착하고 어진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으로 이웃들에게 베푸는 보시행으로 삼업 가운데 심업(心業)에 해당합니다.

마음 가짐을 늘 따뜻하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상대를 대한다면 우리 사회는 한 결 아름다운 사회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착하게 가지고 사람를 대하는 것도 하나의 소중한 보시행입니다.

6.

상좌시(床座施)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요즘 같은 때 얼마나 필요한 보시인지 모릅니다.

전철을 타거나 버스를 탓을 때 젊은이들이 노약들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고 눈을 감고 자는 척 하는 광경을 자주 봅니다.

하지만 노약자에게 또는 지치고 힘든 사람에게 자리 하나를 양보하는 것도 참으로 아름다운 보시행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7.

방사시(房舍施) 사람을 방에 재워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요즘같이 부동산을 재산의 중요한 목록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는 사회에서는 엄격히 말해서 무재시라고 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하지만 이미 있는 집에 사람을 재워 준다고 했을 때 돈 드는 일이 아니므로 무외시로 분류했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옛날에는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밤길을 가다가 남의 집에 하룻밤 묵어가는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요즘처럼 거리에 노숙자들이 많은 어려운 시절이라면 이것도 크고 아름다운 보시행이겠지요.

이상이 물질을 가지 않고도 남을 위해 베풀 수 있는 일곱 가지 보시행입니다.

어쩌면 요즘 처럼 물질적으로 풍요한 사회에서는 이같이 무재칠시가 오히려 더 의미있는 보시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를 아름답고 정이 넘치는 공간으로 만드는데 있어 이 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