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정초에 서울 봉은사와 대구에 있는 서봉사, 그리고 대원사 두 사찰에 정초기도 산림 법회를 다니며 8일 동안 법문을 하였다. 가끔 나는 법문해 달라는 청을 받아 가서 설법해 주고 거마비를 얻어 온다. 이를 나는 아르바이트 수입이라 생각하고 있다. 지난 정초기도 산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난실을 하나 짓기로 하였다. 공사비가 예상보다 많이 들어 아르바이트 수입으로 다 충당되지는 못했지만 난실이 하나 생겨, 방에 있던 난분을 그리로 옮겨 두고 또 몇 개의 분을 사들여 놓기도 하였다. 동양금과 모과나무 등 꽃망울이 예쁘게 맺혀 있는 분재도 몇 개 사들여 놓고 요즈음은 하루에 몇 번씩 난실을 드나들며 감상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어제는 극락암에 와 산철 정진을 하고 있는 무연수좌가 반야암 근처 숲속에서 꽃대가 예쁘게 솟아 있는 춘란을 발견하고 같이 보러가자고 하였다. 가보니 낙엽 속에 새파란 잎을 몰래 드러내고 꽃대를 숨긴 춘란이 세포기가 있었다. 잘됐다 싶어 당장 캐와 난실에 옮기려 하니 무연 수좌가 반대를 했다. “스님, 이거 캐지 말고 자생하는 그대로 두고 키우면 안 될까요?” 딴엔 옳은 말이긴 하나 내 생각에 난을 캐러 다니는 사람들의 눈에 띄어 누군가가 캐 가버릴 것 같아 난실에 옮겨 키우자고 했더니 그래도 무연 수좌는 캐는 것이 내키지 않아하는 눈치였다. 마침 포행 나왔던 극락암 수좌 두 명이 우리를 보고 오기에, ‘이 난을 캐야 하느냐 그대로 두어야 하느냐’를 놓고 의논했다. 결론은 3대 1로 누가 캐 가버릴지 모르니 캐서 난실로 옮겨 영축산 난을 영축산을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을 보았다. 이리하여 난실의 식구가 또 하나 늘게 되었다.
큰절에 있을 때부터 나는 내 방안에 난을 몇 분씩 두고 지내왔다. 난을 좋아하는 정서적 취향 탓이긴 하지만 거제도에 커다란 난실을 만들어 평생을 난과 함께 살다간 고(故) 향파(香坡) 김기용 거사님을 알고 지낸 인연도 한 몫 하였다. 내게 난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가지게 해 주고, 손수 재배한 제주 한란 몇 분을 선물해준 인연으로 나도 한때 난에 매우 심취하기도 하였다. 또 절에 살다보니 가끔 난분을 선물 받는 일도 생겼다. 작년 가을 은해사 우리 대학원에서 전강식을 가졌을 때 축하로 보내준 난분이 많았고, 3년 전 입적한 전 총무원장 법장 스님께서도 생일 축하 난분을 보내준 적이 있었다. 문제는 이렇게 받은 난분들을 제대로 가꿀 수가 없어 여러 해 동안 꽃을 피워보지 못했다. 방안에 햇볕이 잘 들지 않음으로 일조량이 부족해서 꽃대가 올라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서재에 놓인 잎만 무성한 난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하였다. 저 난분 몇 개가 여러 해 동안 꽃을 피워보지 못했다. 해마다 꽃을 피울 수 있는 식물이 꽃을 피우지 못한다면 역할의 장애를 받고 있는 것이다. 내가 꽃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저 난 자체가 꽃을 피워보지 못해 얼마나 안타까울까? 이런 생각을 하니 난이 꽃을 피우도록 도와주자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뭐 보살 10지 경계나 되는 대단한 이타원력의 보살정신을 발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생각전환이 일어나 난실을 지으려는 마음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아르바이트 하여 책살 돈을 난실에 투자하였지만 요즈음 난실에 의자를 놓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한쪽 귀퉁이에 있는 난과 분재를 보면서 내가 경전을 보고 있다는 착각이 든다. 아니 이건 착각이 아닌 착각이다. 깊은 명상에 들어가면 꽃 속에서도 경전이 보이고 책 속에서도 꽃이 보인다. 책이든 꽃이든 간에 실제로 보이는 것은 마음의 그림자, 그림자 아닌 그림자를 내는 마음을 보면 된다. 마음을 보면 이 세상에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고 했고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으면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본다고 했다.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7년 4월 제7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