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이해

‘산문’

사찰은 거룩한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청정하고도 장엄한 곳이며 스님들이 머물면서 수행하는 터전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닦고 올바른 삶을 다짐하는 곳도 여기며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전법의 주요 공간도 이곳입니다.
사찰의 중심인 큰 법당에 들어서려면 일주문(一柱門)금강문(金剛門)천왕문(天王文)해탈문(解脫門)을 지나야 하는데 이러한 문들을 일컬어 산문(山門)이라 합니다.

일주문

일주문은 사찰의 입구입니다. 속세로부터 벗어나 부처님의 대지인 진리의 터전으로 들어서는 첫 관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일주문의 기둥이 사각이 아니고 한 줄로 늘어선 두 개 혹은 네 개 기둥이 버티고 서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우리들의 깨끗한 마음인 일심(一心)을 상징합니다. 불자들은 여기서 마음을 가다듬고 법당 쪽을 향해서 반배한 후 한발한발 단정한 자세를 유지하면서 발길을 옮깁니다.

일주문을 지나면 천왕문이 나타납니다. 천왕문은 부처님과 불법과 스님과 불자들을 수호하는 사천왕(四天王)을 모신 건물입니다. 천왕문은 외부의 악한 기운이나 침입자로부터 사찰을 보호하여 청정도량으로 만들기 위한 것으로 사천왕들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서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금강문

천왕문의 좌우측 대문에는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그려져 있습니다. 금강역사는 엄청난 힘을 소유하고 있는데 이 강력한 힘으로 사찰을 수호하는 기능을 맞고 있습니다. 그래서 금강문이라는 별도의 문을 갖춘 사찰도 있는데, 이 곳에는 금강역사가 조각으로 조성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불이문

천왕문을 지나 길을 오르면 다시 불이문(不二門)이 나타납니다. 이 문은 번뇌의 속된 마음을 돌려서 해탈의 세계에 이르게 한다하여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하며, 궁극적으로 번뇌와 해탈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불이문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해탈문은 누각 밑을 통과하는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2층의 다락집 형태인 누각 밑 1층 기둥 사이로 길이 나 있어 문의 모습을 이루고 있는 것이지요. 2층 누각은 불법을 설하는 강당으로 쓰여 왔습니다. 그래서 진입하는 쪽에서 보면 문이요 진입하고 난 뒤 법당 쪽에서 보면 누각으로 다가옵니다.
해탈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사찰의 중심 법당이 보입니다. 그리고 법당 앞마당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나 말씀인 경전을 간직한 탑이 우뚝 서 있습니다.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는 지금부터 약 2600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시작된 종교입니다. 당시 인도는 사상적으로 혼란한 때였습니다. 많은 종교들이 제각기 자기들의 가르침을 진리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리라는 것이 각 종교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있을 수 있는 것일까요? 또한 만약 어느 한 종교가 자기들의 가르침만이 옳고 다른 종교의 가르침이 그르다고 주장한다면, 다른 종교에 의해서 똑같이 그 가르침이 완전한 진리가 아니라고 비판받게 되는 것은 뻔한 일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여러 종교의 서로 다른 주장이 모두 진리라고 한다면, 결국 서로 다른 종교란 있지 않게 되고 모두 하나의 종교가 될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어느 종교에서 주장하는 진리가 과연 참다운 진리인지 아닌지 하는 것을 확인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교적 진리는 다른 어떤 것과 달리 인생의 가장 마지막의 문제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잘못된 종교적 가르침은 인생을 잘못된 길로 이끌 수 있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여기에서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어왔고 그것이 진리라고 주장되어 왔습니다만, 실제로는 평평하지 않고 공처럼 둥근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모든 천체는 지구의 주위를 돈다는 천동설이 수 천년동안 진리라고 믿어져왔습니다만 사실은 반대로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이처럼 단순히 오랜 경험을 통해서 이루어진 믿음이나 신념들이 무조건 진리가 될 수 없다는 점이 과학에 의해서 밝혀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 당시의 많은 종교들도 자기들의 가르침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속에는 그 가르침들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녔다는 이유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자신들이 믿어온 신이나 성인의 가르침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졌다고 해서 그 가르침이 절대적 진리라고 믿어왔던 것입니다.

깨달음의 진리(法)

그래서 부처님은 당시의 종교에서 주장하고 있는 진리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의문을 품게 되었고, 그 때까지 진리라고 믿어 왔던 것들이 대부분 고정된 관념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아셨던 것입니다. 부처님은 그런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정말 어느 한편의 입장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편견과 집착에서 벗어나 모든 현상들을 설명해낼 수 있는 완전한 진리를 찾게 되었고 드디어 그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깨달음의 진리를 다르마(Dharma), 즉 법(法)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법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변치 않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다고 해도 그 깨달음의 법이 고쳐지고 또 보충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 법이 인도의 종교전통에서 사셨던 석가모니 부처님에 의해서 깨달은 것이니까 인도에서는 잘 맞을지 몰라도, 미국이나 유럽처럼 관습이나 문화적 배경이 인도와 다른 곳에서는 맞지 않는 점이 조금 있다거나, 아프리카처럼 문화나 역사적 전통이 전혀 다른 곳에서는 그 법이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거나 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부처님의 깨달음의 법이란 언제 어디서나 항상 올바른 진리인 것입니다.

불성(佛性)

부처님은 인도의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가르침을 펼쳤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시작입니다. 불교는 우리 모두가 깨닫기만 하면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깨달은 사람, 즉 부처님이 될 수 있으며 그러한 능력과 부처님의 성품, 즉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부처님의 성품(佛性)은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들이 다 지니고 있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평등하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다른 종교의 가르침과는 달리 몇 가지의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절대자로서 신을 믿고 그 신에 의지하여 구원을 받으려 합니다. 모든 현상과 사물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고, 신의 의지에 의해 유지되고 관리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모든 가르침이 절대적 존재인 신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믿고 있는 오늘날의 대표적인 종교로는 그리스도교나 이슬람교를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종교에서는 인간의 구원이 스스로의 의지나 노력보다는, 오로지 신의 뜻에 달려있다고 믿기 때문에 인간의 신에 대한 태도는 거의 절대적으로 의존적입니다.

연기(緣起)

그러나 불교는 신의 존재와 같이 증명할 수 없거나, 혹은 검증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모든 괴로움은 무명, 즉 무지에서 생긴다고 보았으며, 깨달음은 무지에서 벗어나 커다란 자유를 얻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을 해탈이라고도 합니다. 결국 불교에 있어서 궁극적 구원이란 이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즉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현상과 법칙이 신의 섭리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연기(緣起)’ 또는 ‘인연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모든 존재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으며 평등하다는 지혜를 깨닫게 되면, 모든 존재들을 향해 무한한 자비를 베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각을 통한 인격완성을 목표로 하는 불교와 신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종교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삼장(三藏)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경전은 시대의 변천과 더불어 꾸준히 편찬되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들었던 팔만 사천 법문이라는 것은 바로 불교에 많은 경전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모아 놓은 것을 경장(經藏)이라고 하고 교단의 규율을 적어놓은 것을 율장(律藏), 그리고 경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붙인 것을 논장(論藏)이라고 합니다. 이 셋을 삼장(三藏)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생애

불교의 시작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과 가르침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석가모니라는 명칭은 ‘석가족 출신의 성자(聖者)’라는 의미이며, 부처님은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본래 부처님의 성은 고타마이며 이름은 싯달타였는데 진리를 깨달은 이후부터 부처님(Buddha)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소리를 따서 ‘불타(佛陀)’로 적거나 혹은 뜻을 옮겨서 ‘각자(覺者)’라고 합니다만 한국에서는 ‘부처님’이라고 부릅니다. 이 밖에도 부처님은 여러 다른 명칭으로 불리는데, 전통적으로는 여래십호(如來十號)라 하여 10가지의 이름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B.C. 624에 탄생하셔서 544년에 열반하셨습니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불기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해를 기준으로 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석가족이 세운 카필라 왕국의 정반왕(淨飯王)과 마야(摩耶) 왕비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카필라 왕국은 지금의 인도 북부 네팔 땅에 위치한 작은 왕국으로 벼농사를 주된 산업으로 하는 농업국이었습니다. 마야왕비는 당시의 풍속에 따라 출산하기 위해 친정으로 가던 도중, 룸비니 동산에서 싯달타를 출산하게 되었습니다.
마야 왕비는 아기를 낳은 지 7일 만에 세상을 떠났고, 싯달타는 이모인 마하파자파티에 의해 양육되었습니다. 비록 일찍 어머니를 잃은 싯달타였지만 왕자로서 모자람 없는 환경 속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태자 싯달타는 날이 갈수록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생각보다는 인생의 근본문제인 삶과 죽음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부왕인 정반왕은 태자 싯달타의 번민을 알고 그의 마음을 돌리려고 삼시전(三時殿)이란 세 개의 궁전을 지어 철마다 옮겨다니면서 호화스러운 나날을 보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왕궁의 호화로운 생활도 싯달타 태자에게는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 했습니다. ‘사람은 왜 늙어야 하며, 또 병들고 아파야 하며, 결국은 죽어야 하는 것인가? 또한 현실은 너무나도 괴로움이 많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러한 괴로움은 왜 생기는 것이며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세상의 많은 가르침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가르침만이 옳다고 하는데 과연 어떤 가르침이 옳은 것인가?’하는 의문들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고, 이에 대한 사색과 번민은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19세에는 같은 석가족의 콜리성주의 야쇼다라공주와 결혼하였고, 아들 라훌라가 태어납니다만, 싯달타 태자의 머리 속에는 어떻게 해야 생로병사를 벗어나 해탈을 이룰 것인가 하는 문제로 늘 가득 찼습니다.

드디어 싯달타 태자는 출가를 결행하니 그의 나이 29세였을 때입니다. 출가를 한 싯달타는 스승을 찾아 나섰습니다. 당시 가장 훌륭하다고 소문난 두 명의 수행자로부터 선정(禪定)에 이르는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즉 정신통일을 하여 고요한 경지에 도달하여 해탈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정(禪定)도 깨어나면 전과 똑같은 상태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괴로움이 없는 편안한 상태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정신통일을 반복할 수밖에 없으며 결국 정신작용의 완전한 정지는 죽음에 이르러야만 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싯달타는 두 스승을 떠나게 됩니다.

전통적인 수행자들로부터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음을 안 싯달타는 혼자의 힘으로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찾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가야의 네란자라 강가 숲 속에 자리잡고 정신적인 자유를 얻기 위한 고행을 극심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육체적 고행으로 싯달타의 몸은 날이 갈수록 쇠약해졌을 뿐 깨달음은 얻지 못하였습니다. 드디어 그는 네란자라 강에서 몸을 씻고 고행을 그만두었습니다. 그 때 마침 지나가던 수자타라는 소녀로부터 우유로 발효시킨 죽을 받아 마시고 기운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건강해진 몸과 상쾌한 정신으로 싯달타는 보리수 그늘 아래에 앉아 참선수행에 몰입하였습니다. 며칠이 지난 새벽에 그는 드디어 깨달음을 이루었습니다. 왕궁을 떠나 출가하여 수행의 길을 걸은 지 6년만이었고 그의 나이는 35세 때였습니다. 깨달은 사람 부처님이 된 것입니다.

그의 깨달음의 주요 내용은 ‘모든 것은 원인에 의해서 결과가 있는 것이며, 모든 것은 그 어느 것도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관계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무명(無明)’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행복과 불행은 신이나 운명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스스로가 지은 원인에 의해서 받는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한 여행을 떠났습니다. 부처님은 부다가야의 보리수를 떠나 처음으로 향한 곳은 바라나시의 녹야원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부처님은 최초로 다섯 수행자들에게 수행의 바른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수행자는 지나친 향락에 빠져서는 안 되며, 그렇다고 극단적인 고행을 하는 것도 옳지 않으므로 두 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의 길을 가라고 가르쳤습니다. 이어서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인 사성제(四聖諦)를 가르쳐 다섯 수행자들을 깨우치게 했습니다. 그들은 부처님의 최초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이후 왕사성(王舍城)을 중심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퍼져나가 수많은 제자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국왕과 대신, 부호, 평민, 천민 할 것 없이 각계 각층의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큰 감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죽음은 살아있는 모든 것에게 평등한 것입니다. 온 생애를 오로지 모든 사람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을 살게 하는 데에 바치신 부처님께서도 죽음을 맞이하셨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 자신에 의지하라
진리에 의지하고, 진리를 스승으로 삼아라.
진리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리라.
이 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된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니
부지런히 정진하여 고통의 속박에서 벗어나라.”
라는 가르침을 마지막으로 남긴 채 쿠시나가라 사라쌍수 아래에서 대지를 붉게 물들이는 장엄한 황혼처럼 부처님은 80세의 위대한 생애를 마치십니다.

35세에 깨달음 얻은 후, 녹야원에서의 첫 설법을 시작으로 하여, 쿠시나가라에서 80세에 열반에 들기까지 부처님은 45년 간 쉬지 않고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이와 같이 길에서 태어나시어, 길에서 고뇌를 하시고, 길에서 수행하며, 길에서 깨달음을 이루시고, 길에서 사람의 갈 길을 가르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길에서 주무시며, 길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글자 그대로 부처님은 바로 길에서 길을 인도하신 도사(導師)였던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구도(求道)와 성도(成道) 그리고 교화(敎化)와 입멸(入滅)의 길을 걸으신 부처님의 생애는 참으로 위대하다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정신적인 깊이와 도덕적 위대성을 지니시고, 지혜와 자비를 갖추신 분으로서 인류에게 인간의 위대성을 보여준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종교를 초월하여 부처님을 인류의 위대한 스승으로 존경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세계관

불교에서는 창조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창조신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창조신이 인간의 역사와 운명을 그의 뜻대로 좌지우지하는지 하는 물음에 매달려서 밤새도록 입씨름을 한다고 하여도 그 대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불교는 인간의 상상과 추측을 바탕으로 출발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가 보고, 듣고, 먹고, 느끼는 현실세계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무엇보다도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세계에 대한 문제부터 꼼꼼하게 따져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물음들을 해결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확실한 것은 무엇일까요? 아무래도 그것은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광활한 우주가 끝이 있는지 없는지, 이런 우주를 누가 만들었는지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하고 확실한 것은 바로 내가 여기에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 이상으로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 모습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내가 산다는 것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나는 무엇인가와 끊임없이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산다는 것은 쉼 없이 무엇과 만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살펴봅시다. 우리가 눈으로 무얼 보고 있다는 것은, 바로 눈을 통해서 내 밖에 있는 사물들과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푸른 하늘의 구름도, 바다에 펼쳐지는 수평선도 모두 눈으로 만나는 것이고,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알게 됩니다. 광활한 우주의 수많은 별들도 눈을 통해서 만나고, 아주 작은 생물들의 움직임도 눈으로 알게 됩니다. 눈으로 만나서 알게 되는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눈으로만 사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이런 만남은 눈이 아닌 귀를 통해서도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소리들과 만나게 되고 그 소리를 통해서 갖가지 다양한 소리들의 세계를 알게됩니다. 우리는 귀로 듣는 소리의 세계와 눈으로 보는 세계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잘 압니다. 다시금 우리는 코를 통해서 여러 가지의 냄새를 맡게 되고 그 냄새들이 서로 다른 것을 알게 됩니다. 또한 입으로 들어와서 우리와 만나는 다양한 음식들을 혀로써 그 맛을 보고, 그것이 짠지 신지 매운지 하면서 음식의 맛을 알게 됩니다. 이것 또한 다른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몸을 통해서 덥다거나 춥다거나 아니면 부드럽다거나 딱딱하다거나 하는 촉감들을 느낄 수 있습니다. 참으로 산다는 것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렇게 끊임없이 무엇과 만나고 있는 것이며, 그 만남을 통해서 무언가를 자꾸 알아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이 만나서 만들어진 경험세계 이외에도 우리는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 의지는 인간이 주체적인 존재라는 특질을 나타냅니다. 이와 더불어 자연은 객체적인 존재로서의 특징인 법(法)을 지니게 됩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이처럼 눈, 귀, 코, 혀, 몸을 우리가 우리의 의지(意志)를 통하여 각각 무엇과 만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기에서 잠시 함께 생각을 해 봅시다.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무엇일까요? 과연 태초에 창조신이 세계를 존재하게 했다고 믿어야 할까요? 잘 알 수 없는 것이니 믿어야 한다는 태도는 지혜롭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불교에서는 지금 여기에서 살고 있는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세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세계는 여기 있는 나와 그리고 나와 만나는 모든 것들을 모두 합한 것을 세계, 즉 일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이 세계, 즉 일체는 어떻게 구성되었으며, 어떤 성질을 갖고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존재, 즉 인간을 포함한 일체의 성질에 대하여 불교에서는 대체로 세 가지로 밝히고 있습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첫째, “모든 것은 멈추어 있지 않고 변한다(諸行無常)”는 것입니다. 거대한 우주에서 작은 생물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물론 인간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상(無常)이란 말을 ‘덧없다’거나 ‘허무하다’라는 뜻으로 알고, 마치 불교의 가르침이 허무주의인양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제행무상은 모든 것들은 변한다는 뜻입니다, 변한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이미 생성된 것이 파괴된다는 뜻이 있는가 하면, 아직 생성되지 않은 것이 성장하고 발전한다는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한 예로 사람이 병들어 죽는 것만 무상이 아니라 말기 암환자가 병을 극복하고 건강해진 것도 무상입니다. 만일 무상하지 않다면 오히려 더 큰 문제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무상하기 때문에 아이가 어른이 될 수 있고, 사과나무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물이 변하고 인간이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것이 그 누구의 뜻에 따른 것이 아닐 뿐더러, 또한 죄악의 대가도 아닌 것입니다. 또한 무상이란 좋고 나쁘고 기쁘고 슬프고 하는 감정의 문제가 아닌 만물의 성질을 나타내는 법(法)인 것입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

둘째,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諸法無我)”라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말은 어떤 일에 몰두해서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는 망아의 경지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무아(無我)는 ‘나’라고 할 수 있는 고정 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제법은 무아’라고 할 때 이것이 인간만 아니라 모든 사물에게도 다 적용됨을 말합니다.

모든 존재는 서로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존재의 원인과 근거가 된다는 연기의 가르침에서 보면 모든 존재는 이 연기적 관계를 벗어나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또한 무상의 진리에서 본다면 어떤 존재도 불변의 실체나 자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 존재를 유지시키는 원인과 조건도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한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에 딸기잼이 있다고 합시다. 그렇지만 저장을 잘못하면 부패하고 썩어버리게 되어 쓰레기로 변하고 맙니다. 또한 딸기잼은 딸기와 설탕과 향료와 굳게 만드는 물질 등 여러 가지가 함께 모여서 생성된 것이기 때문에 그 어느 하나를 딸기잼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는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성, 유지되며 그러한 모든 것은 고정 불변하는 성질이나 실체가 없다는 것을 무아라고 합니다.

일체개고(一切皆苦)

셋째, 모든 존재의 속성을 밝히는 법으로서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들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라고 해서 마치 불교가 염세주의를 표방하는 종교로 오해받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괴로움, 고(苦)란 말은 인간의 가치관이나 감정이 개입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존재들의 성질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고(苦)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느끼는 고통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는 의미를 갖는 일체(一切)가 모두 고(苦)라고 말하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불완전하고 불편한 상태이며, 이러한 상태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갖은 힘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스스로를 유지하려고 힘을 들이고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한 마디로 고(苦)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만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사물 즉 일체가 이와 같은 상태에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상이라는 진리 속에 서 있는 존재가 가진 ‘불완전성’과 그 불완전한 개체를 지속시키려고 ‘힘들이는’ 모든 작용까지도 함축한 것이 바로 고(苦)인 것입니다. 꽃이 피는 것도, 어린아이가 배고파 우는 것도, 책상이 여기에 이렇게 있는 것도 고(苦)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도 따라서 ‘일체의 모든 것이 고(苦)이다’는 결코 염세주의가 아니라, 모든 존재의 속성을 밝혀낸 법(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계는 어떻게 형성되고 움직이는가?

이미 앞에서 모든 존재는,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고(無常), 실체가 없고(無我) 그리고 고(苦)라고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비록 실체가 없고 변하는 것이라 해도 무질서하게 제 마음대로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변하지만 그 변화 속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습니다. 즉 모든 사물은 현실적으로는 엄연하게 법칙에 따라 각각의 성질을 나타내면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세계는 원칙이 없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법칙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 세계가 법칙이 없이 생성변화 한다면,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 일대 혼란이 올 것입니다. 물이 흐르고 싶을 땐 흐르다가 어떤 때는 안 흐르고,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안 열리고 배가 열리다가는 별안간 감이 열리고, 사계절이 뒤바뀌어 봄이 오다가 겨울이 되고 다시 가을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는 법칙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인과법(因果法)

부처님께서는 이 법칙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즉 모든 결과는 원인이 있는 것이고, 원인은 반드시 결과를 가져온다는 인과의 법칙입니다. 인과의 법칙은 삼척동자도 다 알 수 있는 너무나 당연한 법칙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여기에 깨달을 무엇이 더 있겠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인과의 관계가 생각보다는 훨씬 복잡하게 전개됩니다. 어떤 원인은 결과로 즉시 나타나기도 하지만 어떤 원인은 수 십년 혹은 수 백년이 지난 후에야 결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원인과 결과의 진행이 기계의 작동처럼 시간의 선후관계가 고정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원인이 결과 속으로 다시 투입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원인과 결과는 복잡하게 여러 가지가 서로 관계를 맺으며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과의 법칙이 복잡하다고 해도 자연의 변화에는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에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인간의 행위에는 의지(意志)가 들어있기 때문에 자연의 법칙과는 다릅니다. 즉 인간은 자신의 마음에 따라서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이러한 의지가 담긴 행위를 인(因)이라 부르지 않고 업(業)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업에 따라 받는 결과를 보(報)라고 합니다. 인간이 선업을 짓게 되면 선보를 받고, 악업을 짓게 되면 악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떤 의지를 갖고 행위를 하느냐에 따라서 그 과보(果報)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자기 스스로가 짓는 만큼 자신이 받는 것이지, 자신 이외의 다른 어떤 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에 인간의 행복이나 불행이 자신 이외의 다른 존재에 의해서 좌지우지된다면, 개인이나 사회의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지, 그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도 우리를 행복하게 하거나 불행하게 만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법을 가르쳐서 그 법을 우리가 깨달아 바르게 살게 하신 분입니다.

연기법(緣起法)

다음으로 인과의 법칙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인연화합(因緣和合)의 법칙’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여기에 치즈가 있다고 합시다. 우유가 발효되어 치즈로 변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우유를 냉장고에 보관하면 우유는 그대로 우유로 남아있게 됩니다. 그러나 우유가 유산균과 만나 서로 어울려서 발효가 되면 치즈가 생겨납니다. 이때에 우유를 인(因)이라 하고 유산균을 연(緣)이라고 합니다. 우유와 같은 일차적인 원인을 인(因)이라 하고 유산균과 같은 이차적인 원인을 연(緣)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두 원인이 결합해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인연화합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점을 알게 됩니다. 즉 우유가 유산균과 같은 발효조건을 만나지 않았다면 치즈는 생겨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이 치즈는 치즈과자라든가 치즈피자, 치즈햄버거를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이처럼 치즈는 우유와 유산균의 화합에서 나온 결과이지만 다시 치즈는 치즈햄버거의 원인이 됩니다.

치즈로 예를 들어보았으나, 사실 모든 만물은 이와 같이 서로서로 밀접하게 의존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물도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이처럼 서로 관계를 맺고 의지하면서 끊임없이 생겨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물의 관계를 ‘상의상관(相依相關)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모든 존재는 이와 같은 관계 속에서 끝임 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인과의 법칙, 인연화합의 법칙, 상의상관의 법칙을 통틀어서 ‘연기법(緣起法)이라고 합니다.

어떤 것이 생겨나려면 이것과 저것이 서로 어울려야 생겨나고, 또한 어떤 것이 사라지는 것도 결국 이것과 저것이 어울려야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 연기의 이치를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하셨습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으며, 이것이 생기면 저것도 생겨나고, 이것이 없어지면 저것도 없어진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연기의 법칙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도 홀로 독립된 영원한 것은 없고, 서로의 관계 속에서 변하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은 이와 같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만물들은 서로 관계를 맺고 끊임없이 생겨나고, 잠시 머물다가는 변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없지요. 어떤 물질이나 현상도 적절한 환경에서는 나타났다가 다시 그 환경이 바뀌면 그에 따라서 물질이나 현상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교에서 깨닫는 것은 바로 이 연기의 법칙을 깨닫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초기 불교에서는 탐ㆍ진ㆍ치의 삼독이 무명의 뿌리라고 하는데 이 중에서 치(痴), 즉 어리석음은 바로 이 연기법을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연기법은 곧 우주의 모든 현상이 나와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한 톨의 쌀알이 생겨나는 것을 보십시오. 한 톨의 쌀알 속에는 농군들의 노력의 땀이 서려있는가 하면, 여름날의 햇빛과 바람이 담겨있고 천둥과 먹구름과 빗방울이 들어있습니다. 온 우주가 힘을 기울여야 쌀 한 톨이 여무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주가 들어 있는 쌀을 먹고 살아갑니다. 나는 바로 온 우주와 둘이 아님을 느끼게 됩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나와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이웃에 사랑을 보내고, 모든 사물에 사랑을 보냅니다. 이 끝없는 사랑이 자비입니다. 자비는 불교의 인간관계에서 기본이 되는 윤리입니다.

불교의 목표인 인격의 완성이라는 것도 사실은 나와 이웃이 마치 손과 발이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서로 뗄 수 없는 동일체라는 것을 깨닫고 무한한 자비를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곧 나 자신을 완성하는 길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 그리고 연기를 보는 자는 나를 본다.”고 가르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해탈에 이르는 길

모든 존재는 어떤 성질을 지녔으며 그것들은 어떠한 법칙에 따라서 진행되는가 살펴보았습니다. 실로 부처님께서 밝히신 연기법을 통해서 우리는 모든 존재들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러한 인식 위에서 우리가 해야할 실천은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불교의 실천행입니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자신의 이상향을 제시하고 그 이상을 성취하기 위한 실천행을 제시합니다. 불교는 그 이상향을 열반(Nirvana)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이룬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부처님께서 일러준 길을 따라가야 됩니다.

이제부터 부처님께서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다섯 비구들에게 설하신 가르침인 ‘네 가지의 거룩한 진리’를 살펴보면서, 어떻게 해야 우리도 열반에 이르고 어떻게 살아야 부처님처럼 될 수 있는지 함께 그 길을 찾아 걸어가야겠습니다.

1.고성제

이 세계의 모든 존재들이 처해 있는 불완전한 현실과 그 불완전한 존재를 유지하면서 겪게 되는 고통과 노력을 고(苦)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개체들이 자신을 유지하려고 애를 써도 이미 살펴본 것과 같이, 모든 존재들은 실체가 없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개체들이 스스로를 유지하려고 힘을 들이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이렇게 힘들이는 모든 존재는 마치 병이 든 것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고(苦)를 ‘괴로움’이라고 하여 오직 인간의 감정만을 표현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존재의 모습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2.집성제

그러면 왜 이렇게 모든 존재들이 고(苦)의 상태에 있는가? 존재하려고 힘들이는 것은 갈애(渴愛)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 갈애로부터 번뇌가 생깁니다. 갈애가 있기 때문에 윤회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을 무명(無明)이라고 합니다.

무명에 의해 고(苦)가 발생하는 과정을 열 두 가지의 인과의 고리로 설명한 것을 12연기라고 합니다. 인간의 감정, 욕망, 질병, 충동, 노쇠, 질병, 죽음 등은 하나의 현상입니다. 이 현상은 어떤 원인에 의해 생성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커다란 인과적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또한 생성소멸 한다는 연기의 법칙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의 고(苦)도 그것을 일으키는 원인과 조건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3.멸성제

무지는 고(苦)의 근본적인 원인이며 이 무지로부터 비롯된 윤회의 고리를 끊고 해탈을 이루는 것이 열반입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추구하는 이상(理想)입니다.

부처님은 무명을 타파하고 갈애를 남김없이 소멸시켜 열반에 이른 분입니다. 열반은 갈애의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기에 때문에 해탈이라고도 부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바로 열반의 길입니다. 다시 말하면 욕망과 화냄과 어리석음을 소멸시키는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반을 성취하면 인간의 생존도 함께 소멸되는 것으로 이해해서 꼭 죽음과 동일시하는 견해는 올바른 열반관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나는 심지를 끌어내린다. 불길이 꺼지는 것, 그것이 마음의 구제이다.”란 말씀은 열반은 살아있는 상태에서 얻어지는 것이지, 죽은 후에 기대되는 낙원의 개념이 아닌 것입니다. 열반을 성취한 사람은 완전한 인식과 완전한 평화와 완전한 지혜를 갖고 인간을 구속하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한 열반에 이른 사람은 세속의 일상사로부터 벗어나 현실 생활과 세계에 대해 무관심하고 초연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열반에 이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이웃의 고통과 슬픔에 함께 아파하고 그들의 행복과 해탈을 위해 노력합니다.

4.도성제 – 팔정도

그러면 이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그 길은 부처님 자신이 발견하여 걸어갔던 길로서 ‘여덟가지 거룩한 길’ 팔정도입니다. 팔정도는 깨달음 이후의 부처님의 삶을 표현한 것이며 동시에 깨달음을 이루려는 사람이 따라가는 길입니다. 이 길은 비밀스러운 길이 아닙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그리고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지식이 많거나 적거나 그 누구나 갈 수 있는 보편적인 중도(中道)의 길입니다.

첫째, 바른 견해(正見)입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을 똑바로 인식하고 자각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의 참 모습을 보는 것은 부처님의 연기의 진리를 통해 세상을 바로 보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둘째, 바른 생각(正思)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의 진리를 통하여 올바른 견해를 가지려면 그 진리로 항상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을 향하여 끊임없이 그리워하고 마음을 모으는 것을 정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연인이 서로 연모하고 사랑하듯이, 마음이 오로지 진리를 향해 모으고, 늘 진리를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진리에 대한 그리움이란 진리를 내 안에 품겠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향한 그리움과 열정이 자신을 꽉 채운다면 다른 생각이 들어올 수 없게 됩니다.

셋째, 바른 말(正語)입니다.
부처님의 진리를 내 안에 품게 되면 결국 그 생각은 말로 나타나게 됩니다. 늘 진리를 향해 생각하면(正思) 진리의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머리 속에 돈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 차면 이자율과 부동산 시세에 관해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에 대한 생각에 내 생각이 집중되어 있다면 나는 진리의 말을 하게 됩니다.

넷째, 바른 행동(正業)입니다.
진리를 생각하고 진리의 올바른 말이 행동으로 옮겨진 것을 정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업은 살생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는 등의 계율로만 이해되어서는 안됩니다. 정업은 부처님의 진리 안에서 깨어 있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행위 하나 하나가 진리를 향해 깨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위대한 진리를 품고 이루어지는 행위야말로 위대한 행위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런 행위는 윤회를 일으키는 원인으로서, 업으로 남지 않게 됩니다.

다섯번째, 바른 생활(正命)입니다.
진리에 비추어 이루어진 올바른 행위는 당연히 바른 생활을 하게 되며, 바른 직업을 통해서 바른 의식주를 영위하게 됩니다. 앞의 정업이 개인적인 차원의 의미가 강조된 행위라고 한다면 정명은 사회지향적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얽히고 설켜서 다양한 생업에 종사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각자의 생업을 자세히 살펴보면 자신만의 생존을 위해서 종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루에 모자를 백 개 만드는 사람이 그가 만든 모자를 자신이 모두 쓰고 다니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쓰고 다닙니다. 사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모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회생활 속에서 연기법을 깨닫고 사는 것을 정명이라고 합니다.

여섯 번째, 바른 노력(正精進)입니다.
병이 깊으면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한번 먹고 낫기 어려운 법입니다. 병을 완치하려면 계속 약을 잘 복용해야 하는 것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열반에 이르려면 쉼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는 올바른 노력, 즉 정정진을 자신의 해탈뿐만 아니라 곧 이웃과 사회를 위한 노력과 관심까지 포함합니다. 올바르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은 자신의 해탈만 지향하는 것이 아니고 이웃과 사회를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깊은 관심을 항상 지니고, 그에 맞는 실천을 해야 합니다. 종교는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라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의 앞에 언급된 다섯 가지 연결고리가 열반으로 이끌어 가는 길이라 해도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바로 정정진은 쉬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일곱번째, 바른 집중(正念)입니다.
‘생각할 바에 따라서 잊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진리에 대한 열정과 실천이 항상 현재에서 이루어짐을 의미합니다. 종교적 실천은 바로 이 순간에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 뒤로 미루고 주저하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여덟 번째, 바른 수행(正定)입니다.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움직임이 없음을 의미하는 올바른 삼매입니다. 바른 삼매는 진리와 일치된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열반은 살아 있는 동안 여기에서 얻어지는 것이고 진리의 체현된 모습입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의 체현을 통한 무한한 자유이고 해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팔정도는 하나하나 떨어져 있는 실천 덕목이라기보다는 진리체현의 길로서 서로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팔정도를 통한 해탈은 나와 세계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 커다란 자유를 얻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격을 완성하여 ‘깨달은 자’, 즉 붓다(Buddha)가 된 것처럼 인간은 스스로 계정혜(戒定慧)의 삼학(三學)을 닦아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각을 통한 인격완성을 목표로 하는 불교와 신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종교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전통적으로 구원이란 말보다는 해탈이나 열반이란 말을 사용합니다.

현대 사회와 불교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20세기는 실로 많은 변화를 경험한 시대임에는 틀림없다고 합니다. 먼저 인구만 보아도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16억이었던 세계 인구가 한 세기 동안에 4배에 가까운 60억으로 증가했습니다. 이런 인구 증가율은 다른 어느 세기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기현상이라고 합니다.

또한 금세기의 과학문명의 눈부신 발전은 다른 어느 시대보다 인류에게 생활의 편리함을 안겨준 것만은 사실입니다. 과학 기술은 통신 매체와 운송 수단을 발달시켜 지구를 하나의 촌락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금세기를 인류의 역사상 가장 풍요를 구가하고 있는 시대라고 말합니다. 현대인은 산업화 덕분에 과거보다 엄청난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으며, 나아가 더욱 더 풍요로운 물질 문명의 향유를 위해 더욱 산업 발전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인이 물질 만능주의에 빠져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정치, 과학, 학문, 예술 및 문화 등 모든 부문의 가치를 물질적 가치로 환산해서 가늠하려고 합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인간의 가치를 그가 얼마나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있느냐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경제적 가치의 생산 부품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보다는 물질을 앞세우는 물질 만능주의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은 여지없이 무시됩니다.

결국 물질만능주의는 인간을 이기적인 존재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오로지 자신의 물질적 풍요에만 전념하는 이기적인 사고 방식은 환경을 무차별하게 파괴시키게 되었습니다. 지구는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공간입니다. 그런데도 현대인의 이기적인 인간 중심주의는 생명이 존속해가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리인 자연을 파괴해 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21세기에 들어선 인류는 커다란 전환기에 처해 있음이 분명합니다. 서구의 인간중심주의 세계관이 인류를 이처럼 절박한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면, 이러한 위기로부터 벗어나고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인류를 암울한 미래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관으로 일대 전환이 요구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환경, 생명, 생태계, 자연에 대한 관심과 위기의식은 세계관과 인간관에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으며 새로운 종교문화를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대의 종교가 가장 관심을 가져야 문제는 바로 생명의 문제이며 환경의 문제입니다. 이 환경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고 또 그 의미를 강화시켜 종교 문화화 하는 것이 중요한 관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종교문화는 어떤 가치나 윤리를 제시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환경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현실적으로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방법이 모색되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은 모든 존재가 생명이 있는 유기체처럼 서로 뗄 수 없는 불이(不二)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연기의 가르침으로 우리에게 일깨워 주셨습니다. 이렇게 모든 존재가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음을 자각하고 그 존재들을 향한 사랑이 자비입니다. 따라서 생명체에 대한 불살생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무생명에도 불성이 있으니 산천초목이라도 부처님을 대하듯이 공경하고 보호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최근에 우리사회에서는 생명경시 풍조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태아의 성감별과 임신중절이나 안락사와 장기매매와 같은 문제들이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또한 유전공학의 발달로 동물복제에 이어 인간복제까지 현실화되고 있는 바, 생명의 존엄성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죽이지 말고 아끼며 사랑하라”는 불살생의 계를 첫 번째 실천 덕목으로 세우신 것은 생명체를 사랑하고 보살피라는 불살생의 계율이야말로 인간이 실천해야 할 최고의 윤리라는 뜻입니다.

또한 불교의 연기법에서는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바라봅니다. 나를 둘러 싼 모든 존재를 중생이라고 부릅니다. 중생의 개념은 유정(有情) 즉 생명체 뿐만 아니라 생명현상이 없는 무정(無情) 즉 무생명체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모든 중생은 부처님의 성품인 불성을 지니고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란 말은 부처님으로 성불할 수 있는 범위가 인간을 넘어 모든 생명으로, 다시 생명체에서 모든 무생명체로 확대 되어간 것입니다. 이것은 전존재를 평등하게 보는 불교의 생태관의 일면입니다.

이러한 바탕에서 모든 중생이 하나이고 존중되어야 한다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사상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범망경』에는 “모든 흙과 물은 모두 나의 옛 몸이고 모든 불과 바람은 모두 다 나의 진실한 본체이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러한 통찰은 세계와 내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物我同根)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즉 불교의 생태윤리는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동물뿐만 아니라 식물에게도, 식물뿐만 아니라 돌, 물, 흙에게도 미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자비의 생태윤리는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야기된 지구환경의 문제를 해결하고, 모든 생명체들이 공존 공생해야 하는 21세기의 시대적 가치로 받아들여져야 할 종교적 윤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환경문제가 근원적으로 모든 생명체의 존재위기로까지 인식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이제는 그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할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인간 중심적 환경윤리가 생태 중심적 종교윤리로 승화되어야 하는 것은 이 시대의 종교적 당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안이 되는 종교 윤리는 바로 불교의 동체대비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환경의 위기는 생명의 위기이며, 생명의 위기는 곧 불성을 가진 모든 중생의 위기입니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길은 바로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생명중심의 사고로의 전환에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성실하게 추구하는 실천적 인간형으로 제시된 인물이 바로 보살입니다. 보살은 세계의 모든 현상이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음을 깨달은 존재입니다. 모든 사물이 자신과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음을 알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웃, 즉 생물과 무생물에까지 사랑을 보냅니다. 이와 같은 지혜의 실천에서 오는 끝없는 사랑이 자비입니다. 자비는 불교의 인간관계에서 요구되는 기본윤리이고 더 나아가서 모든 존재 사이에 기본이 되는 생태윤리입니다. 따라서 보살은 현대사회가 요청하는 생태적 가치관과 생태적 인간관을 제시합니다.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인간성의 상실과 가치관의 전도, 개인주의의 피폐에 대한 근본적인 치유는 인간성의 회복에 있습니다. 인간성의 회복은, 불교의 연기법에 따라 모든 삼라만상이 자신과 유기체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자각하여 이웃에 대한 사랑이 곧 나 자신을 완성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온 세계를 빈곤과 무지와 괴로움이 없는 이상 세계, 즉 생태적으로 온전한 불국토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보살의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환경보살의 길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구호에 그치던 환경운동이 아니라 불사적(佛事的) 차원에서 모두 환경보살의 길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대승불교의 역사적 진실

1.인도불교의 발전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간직한 채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주변의 여러 가지 상황과 주고받으며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인도에서 불교의 역사는 크게 근본불교(根本佛敎), 부파불교(部派佛敎), 대승불교(大乘佛敎)로 전개되어 나옵니다. 이후 불교는 동남 아시아 및 동북아시아로 전래되어 아시아 대륙을 불법으로 교화했으며 이제 서구 사회에서는 불교가 급속도로 뿌리 내리고 있습니다.

근본불교

근본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이 생생하게 전해져 그 말씀대로 신행하던 시절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신지 1 ∼2백년 경과한 시절로 이때에 부처님 말씀을 담은 경전이 편찬됩니다.

부파불교

이후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출가 사문들 사이에서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생겨나 여러 가지 학파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부파불교라고 합니다. 이들은 부처님의 말씀, 즉 법(法)에 대한 연구를 심화하여 불교 교학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 스님들은 오직 사원에 머물러 법에 대한 철학적인 연구만 하고 자신의 번뇌만 없애는데 골몰할 뿐 이웃이나 사회의 구원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대승불교

그래서 여기에 불만을 품은 새로운 불교 혁신 세력들이 나 하나만의 깨달음뿐만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함께 성불의 길로 나가자는 불교 개혁운동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만의 구원만을 추구하는 부파불교도들을 작은 수레를 타고 가는 소승불교(小乘佛敎)라 비판하고 여럿이 함께 큰 수레를 타고 저 피안의 언덕에 이르자는 대승불교를 주장하게 됩니다. 대승(大乘)이란 바로 ‘큰 수레’라는 뜻입니다. 현재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이 부파불교의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소승불교의 단점은 오직 출가한 스님들만 번뇌가 끊어진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신분과 지식, 인종과 남녀의 구분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을 피안의 언덕으로 실어 날라주는 큰 불교요 위없는 가르침을 지향합니다. 한국불교를 비롯하여 중국과 일본, 티벳, 몽골, 그리고 동남아시아에서는 베트남이 대승불교권에 소속됩니다. 대승불교의 가르침은 근래에 접어들어 미국 및 유럽의 각국으로 퍼져나가 보편적 가르침으로서의 우수함을 널리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2.대승불교의 정신과 발자취

이 대승불교 운동의 여명은 보살(菩薩)이라 불리는 새로운 불교 개혁 세력에 의해서 전개됩니다. 보살이란 진리의 길로 들어서 자각적 존재로서 구도자(求道者)를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보살을 여성불자를 지칭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은 올바른 보살의 의미가 아닙니다. 자각적 존재로서의 보살은 한편으로는 진리를 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체득하여 그들을 그 고통의 질곡에서 구제하기 위해 애씁니다. 아파하는 이웃들과 함께 깨달음의 길로 나서고자 하는 보살의 이상을 상구보리(上求菩堤)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 합니다.

보살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여섯 가지 피안에 이르는 길인 육바라밀(六波羅密)이 요청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반야(般若)바라밀입니다. 반야란 초월적인 지혜를 일컫습니다. 사물을 객관적으로 분석하여 아는 지식이 아니라 그 사물과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직관적 지혜인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이 마음을 잘 다루고 관리해 행복은 물론 일체로부터 자유로운 해탈의 경지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다루고 깨우치기까지는 스스로의 주체적인 행위가 요구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불교를 자력불교(自力佛敎)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고통에도 굴하지 않고 깨달음의 세계, 천당이며 극락에 갈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태어나면서부터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나약한 사람도 많습니다. 이렇게 생존 자체마저 위협받는, 그래서 이리저리 흔들거리는 나약한 의지의 소유자에게 불교는 부처님의 가피력에 몸과 마음을 의지하는 타력(他力)신앙을 내겁니다. 이들에게 자력으로 해탈의 세계에 이르게 한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타력신앙에서 그 믿음의 대상은 아미타부처님이며, 아미타부처님이 계시는 곳은 안락세계인 극락정토(極樂淨土)입니다. 아미타 부처님은 수명이 무한하여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고도 부릅니다.『법화경』에서도 부처님을 굳건히 믿고 예배하는 신앙을 통하여 성불에 이르는 길을 잘 제시하고 있습니다.

대승불교는 이렇게 반야의 지혜를 전면으로 내세우면서 도도한 불교사의 맥을 형성하게 됩니다. 중관학파와 유식학파를 태동시켰으며 정토 타력신앙도 꽃피웠습니다. 이러한 인도의 불교는 중국으로 전해져 동북아시아 대륙에 전파됩니다.

3.중국불교의 특징

중국에 불교가 최초로 전래된 시기는 불기 611년(서기 67) 후한(後漢)시대로 인도에서 불교가 발생한지 500년쯤 경과한 시기입니다. 그 이후 불교가 물밀 듯 중국대륙으로 들어오는데 인도에서 발생한 원시불교ㆍ소승불교ㆍ대승불교의 모든 것이 한꺼번에 들어오고 번역되었기 때문에 무엇이 최고의 가르침인가를 가늠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각각의 판단에 따라 경전을 체계화하여 종파를 세우게 되니 화엄종ㆍ천태종ㆍ열반종ㆍ삼론종ㆍ선종ㆍ정토종등의 수많은 종파가 생겨납니다. 이렇게 각자의 기준에 따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리하고 체계화하는 것을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고 부르며 중국불교의 특징인 종파불교가 성립하는 근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종파 가운데 가장 중국적인 불교로는 선종과 정토종을 들 수 있습니다.

선종(禪宗)을 창시한 인물은 보리달마(菩提達磨)입니다. 달마는 숭산 소림사에 9년 동안 면벽(面壁)에 들어가 깨달음을 열고 중국대륙에 선의 깃발을 크게 휘날리게 됩니다. 선종에서는 경전이나 문자 등의 이론에만 매달려 입씨름이나 하고 있는 학문불교, 허약한 지식사회를 비판하고 주체적인 나 자신의 마음과 깨달음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선은 일상생활 속에서 깨달음과 평정한 마음을 강조하는 실천불교를 내걸어 중국을 비롯하여 우리나라나 일본의 정신풍토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습니다.

정토종 역시 선과 더불어 중국불교를 대표하는 실천불교입니다. 오로지 아미타부처님에 대한 염불을 강조하여 중국의 민중들에게 정토왕생이라는 염불신앙을 굳건히 해주었으며 절망에서 희망을 빛줄기를 찾게 해주었습니다.

한국불교의 역사와 고승들

1.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의 불교

우리나라에 최초로 불교가 전래된 공식 기록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입니다. 이후 불교는 백제, 신라로 차례차례 전래되면서 한국인의 마음에 인간이 갖추어야 할 소중한 이상을 심어왔으며 그 이상에 버금가는 찬란한 정신과 문화를 꽃피워 왔습니다.

신라는 삼국 중에 가장 늦은 법흥왕 14년(537)에 이차돈 성사의 순교로 불교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원광, 자장, 원효, 의상, 도의, 도선과같은 훌륭한 스님들이 배출되어 신라 땅을 불연 깊은 부처님의 대지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원광 스님은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지어 화랑도들이 미륵의 후예로서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자리잡게 했습니다. 자장 스님은 “내 비록 단 하루를 살더라도 계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파계하고 백년 동안 살기를 원치 않는다”는 수행자로의 단호한 의지를 천명한 청정 율사였습니다. 스님은 중국에서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가져다 통도사를 비롯한 5대 적멸보궁에 모셨습니다. 사리란 수행의 결정체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리를 모셨다는 것은 스님들에게 부처님의 수행 정신을 보여주어 수행자의 갈 길을 제시한다는데 있었습니다. 황룡사 9층탑을 세우신 분도 이 자장 스님입니다. 불법으로 신라의 위용을 내외에 크게 떨치기 위해 세운 이 탑은 그 규모에서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탑이었다 합니다.

의상 스님은 중국에서 화엄학을 배우고 귀국하여 낙산사에서 관세음보살님의 진신을 친견한 이후 부석사와범어사 등 유명한 대찰을 창건하여 이 땅을 갖가지 꽃으로 아름답게 장엄하게 되는 화엄의 가르침을 널리 전하게 됩니다. 사찰에서 법회 때 독송하는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는 화엄의 철학적 원리를 짧은 게송으로 요약한 세계적으로 자랑할만한 의상 스님의 대표 저작입니다.

원효 스님은 신라의 여러 고을과 산하를 돌아다니면서 걸림없는 대 자유의 노래인 무애가(無碍歌)를 부르며 서민들에게 불법을 선양했습니다. 나아가 스님은 여러 가지 경전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저술했는데, 그 저술들은 후대 한국불교를 발전시키는 굳건한 토양이 되었습니다. 스님은 서로간의 다툼을 조화롭게 화해시키는 가르침을 펴 한국불교는 중국불교와 일본불교와는 달리 종파적 경향이 덜하게 됩니다. 이를 회통불교(會通佛敎)라 하는데, 이것이 한국불교의 큰 특징으로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훌륭한 스님들의 공헌뿐만 아니라 신라 역대 왕들은 모두 법명을 자기 이름으로 삼을 정도로 불법으로 나라를 다스려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신라 통일 이후 신라의 문화는 더욱 번성하여 경덕왕 시절 세계적인 문화유산 중에 하나인 불국사와 석굴암이 창건되었으며, 성덕대왕 신종과 같은 수많은 불교 문화유산을 남기게 됩니다.

신라말 오늘날 대한불교 조계종의 시조가 된 도의 국사가 출현한 이후 아홉 개의 산에 선문이 차례로 개창되어 우리나라에 선불교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를 구산 선문(九山禪門)이라 합니다.

2.고려시대의 불교

도선 국사의 풍수사상은 고려를 창시한 태조 왕건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습니다. 왕건은 훈요십조를 통해 불교를 국시로 내걸고 고려를 다스려나갈 통치 이념을 세웠으며 그러한 정신은 고려의 모든 역사를 통해 지속되어 왔습니다. 고려 시대 내내 고승대덕들이 국가나 임금의 스승인 국사나 왕사로 모셔졌으며 국가적인 대규모의 법회도 많이 열어 부처님의 가피로 국가를 외침과 환난에서 보호하고자 했습니다. 고려의 유명한 스님들로서 균여, 의천, 보조, 일연, 보우, 무학스님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균여 스님은 고려 화엄학의 대가로서 보현보살의 10대원을 향가로 노래한 ‘보현행원가(普賢行願歌)’를 지어 그것이 고려의 모든 국민들이 노래하는 국민가요이자 애창곡으로 자리잡도록 하여 자연스럽게 불교의 가르침을 접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의천 스님은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로서 천태종을 창시하여 선교의 통합을 꾀하였으며 방대한 경전과 논서를 모아 고려속장경을 간행하였습니다.

고려 후기에 들어 무신의 난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선과 교의 대립으로 불교가 심한 침체에 빠졌을 때 나타나 고려불교에 새로운 힘을 부여한 유명한 스님이 있었으니, 그분이 바로 대한불교 조계종의 중흥조로 일컬어지는 보조국사 지눌입니다. 스님은 지금의 송광사인 수선사에서 ‘정혜결사(定慧結社)’운동을 벌여 선과 교를 함께 닦아나가면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운동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또한 일연 스님은 현재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서가 된『삼국유사』를 저술하였습니다. 태고 보우 스님은 중국으로 건너가 석옥 청공 선사의 법을 입고 들어와 임제선풍을 크게 드날리니 보조 스님과 더불어 조계종의 중흥조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문화재로 현재 해인사에 봉안되어 있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들 수 있습니다, 당시 고려는 몽고군의 침입으로 인한 누란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팔만대장경 판각 불사를 통해 국민 정신을 하나로 모았습니다. 이 불사를 통해 고려인들은 일치 단결된 힘으로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었으며 부처님의 가피력은 사람들의 가슴에 희망과 꿈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3.조선시대의 불교

조선은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아 불교를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불교는 조선 500년 동안 혹심한 탄압 속에 신음하게 되며 스님들은 서울인 도성으로의 출입을 금지당했습니다. 비록 태조, 세종, 세조가 궁전 내의 법당인 내불당(內佛堂)을 지어 불교를 신앙했고 세조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대기인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짓는 등 한글 경전을 간행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 차원에 머무른 것이었습니다. 사회 전반에 걸쳐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배불의 분위기는 바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배불의 시기에도 조선불교의 명맥을 이어오고 발전시켜 온 스님들이 있었습니다. 함허, 보우, 휴정, 유정 스님 등이 그 대표적 인물입니다.

허응당 보우는 명종5년(1550) 유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님들의 등용문인 승과를 부활시켜 불교의 중흥을 꾀하였습니다. 이 승과를 통해 배출된 유명한 인물이 서산 스님과 사명 스님입니다. 두 스님은 의승군으로 활동하여 누란에 위기에 빠진 국가를 건져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특히 서산 스님은 꺼져가던 선맥을 살려내어 이를 계승시켜 한국 조계종풍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습니다. 스님은 선을 최고의 수행으로 내세우면서도 염불 신앙과 경전 공부를 통한 성불의 가능성도 제시하였습니다.

이런 스님들의 역할에도 불구하고 불교에 가해진 탄압은 매우 참혹한 것이었습니다. 불교는 산 속으로 스며들고 스님들은 천민 대접을 받아 양반들의 시중을 드느라 동분서주했습니다. 이에 따라 수행 풍조 또한 점점 혼미를 거듭해 무질서해졌으며 참선하는 스님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혜성 같이 나타나 한국불교의 활발발한 선풍을 다시금 일으킨 거장이 경허(鏡虛) 스님입니다. 1879년 동학사에서 스님의 오도를 계기로 한국의 선풍은 다시금 힘찬 발돋음을 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전국적으로 선원이 여기저기서 생겨나 참선하는 스님들의 오도소리가 청아하게 울려 퍼졌으며 이러한 참선 가풍은 성철 스님을 비롯한 오늘날의 청정 수행스님들에게로 면면히 계승되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불교는 조선시대의 억불과 근현대의 불협화음 속에서 멍들었던 불심을 회복하고 미래 사회의 대안으로 힘차게 도약할 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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