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근보교리 (9) 윤회설

나고 죽는 인간의 생사를 불교에서는 윤회라고 합니다. 불교의 인생관과 세계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교설입니다. 사실 불교적인 사고 방식의 근간에는 이 윤회설이 깔려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른 바 순환적 사고방식의 배경이 되는 이론입니다.

윤회란 바퀴가 굴러간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이지만, 여기서 죽었다가 저기서 태어나는 생사가 공간적으로 이동하여 옮겨진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범어로는 samsara인데 sam과 sara의 합성어입니다. 원래 sam 은 함께 라는 뜻이고 sara는 달려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중국에서 바퀴가 돈다는 뜻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이것은 중생들이 여러 세계를 바퀴가 돌 듯이 이러 저리 옮겨가면서 돌고 있다는 뜻입니다. 한 존재가 죽으면 그가 살았던 세상에 다시 태어나거나 다른 세상에 가서 태어나며 그곳에서 죽어 또 다른 세상으로 가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여기서 살다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서 사는 경우처럼 나고 죽는 것이 여러 곳으로 옮겨진다는 뜻입니다.

이 윤회설에 있어서 특기할 사항은 일체 중생, 곧 모든 존재는 나고 죽는 생사를 거듭 거듭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해가 뜨고 지는 일이 반복되면서 하루하루가 이어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밤낮이 교차되면서 무한한 세월이 되듯이 생사가 교차되면서 무한한 윤회가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생사는 언제나 멈추지 않고 진행되고 있는 통과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불교의 목적을 이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합니다. 윤회에서 벗어난 것을 다시 해탈(解脫moksa)이라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정각을 이룬 후 “나는 해탈을 얻었다. 다시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합니다.

윤회 속에서 볼 때 생사, 즉 삶과 죽음은 언제나 똑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반복되고 있는 한 과정인 점에서 둘 다 똑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똑같은 시간인 것처럼 태어남은 죽음을 의미하고 죽어 가는 것은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이 윤회설에 있어서 또 하나 특기할 점은 생사를 거듭하는 윤회 속에서 몸을 받는 업(業)에 따라 다르게 받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죽어서 다시 태어날 때 언제나 사람 몸을 받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죽어서 짐승의 몸을 받는 수도 있고 짐승이 죽어 사람 몸을 받는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전생(轉生)이라 합니다 몸을 바꾸어 다른 생명체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왜 이렇게 다른 생명체로 태어나게 되는 것인가? 여기에 대한 설명을 해 주는 것이 업(業karma)입니다. 윤회의 원리는 업으로 설명됩니다. 업은 행위를 두고 하는 말인데 이 행위가 윤리·도덕적으로 좋으면 선업이 되고 나쁘면 악업이 됩니다. 그리고 이 행위는 반드시 결과를 초래합니다. 어떤 인연에 의해서 행위가 일어나면, 그 과보(果報)가 뒤따라 업으로 인한 인과의 법칙이 성립됩니다. 업이 종자가 되어 이것과 일치되는 결과의 과보가 온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윤회설은 업설과 인과설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중생의 업이 남아 있는 한 윤회는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불교신앙에서 이 업을 소멸하자는 참회 신앙이 있는데 업이 소멸되면 윤회가 끝나고 윤회가 끝난 세계를 열반의 세계 혹은 앞서 말한 대로 해탈의 세계라 합니다.

중생이 업을 지어 그 과보로 태어나는 공간적 범위를 구분하여 삼계(三界), 또는 육도(六道)라 합니다. 삼계는 세 세계라는 말로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가 그것입니다. 욕계란 욕망으로 생활하는 세계로 인간세상을 위시한 축생의 세계가 있고 천상에 사는 사람과, 그 곁에 있는 아수라 그리고 지옥과 아귀의 육도가 모두 욕계에 속합니다. 이 세계는 모두 본능적 욕구가 있어 이것을 의지하여 업을 지으면서 생활하는 곳입니다.

지안스님강의. 월간반야 2001년 11월 (제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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