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행원품 (2) – 서분

<경문> 그때 보현보살마하살이 부처님의 수승한 공덕을 찬탄하고 나서 여러 보살들과 선재에게 말했다. 선남자여, 여래의 공덕은 시방의 일체 부처님들이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부처님 국토의 가장 작은 먼지 수만큼 많은 겁을 지나오면서, 서로 계속하여 말씀하여도 다 말할 수 없느니라. 만약에 누구든지 이 부처님 공덕의 문을 성취하려면 응당 열가지 광대한 행원을 닦아야 하나니, 그 열가지 행원이란 첫째 모든 부처님께 예경 드리고, 둘째 부처님을 칭찬하고, 셋째 널리 공양을 닦고 넷째, 업장을 참회하고 다섯째, 공덕을 기뻐하고, 여섯째 법륜굴리기를 청하고, 일곱째 부처님이 세상에 머무시기를 청하고, 여덟째 항상 부처님을 따라 배우고, 아홉째 항상 중생들을 보살피고, 열째 널리 모두 회향하는 것이니라. <풀이> 보현보살은 행원을 상징하는보살이다. 원래 범어 사만타바드라(Samantabadra)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보살로, ‘보현’ 혹은 ‘변길(遍吉)’이라 번역되기도 한다. 『화엄경』에서는 문수보살과 함께 법신불 비로자나의 협시불로 등장한다. 문수보살이 여래의 왼편에 서서 부처님의 지덕(智德)을 맡는 반면, 보현은 오른쪽에 서서 행덕(行德)을 맡는다. 『화엄경』에서는 비로자나·문수·보현을 화엄삼성(華嚴三聖)이라 한다. 특히 보현의 역할은 불도를 수행·실천하는 중생들의 근기를 성숙시키기 위해 교(敎)를 설하는 교기인분(敎起因分)을 관장한다. 모든 언어와 사량(思量)이 끊어진 부처님의 깨달은 세계를 성해과분(性海果分)이라 하고, 이를 비로자나(毘盧遮那)의 법문이라 한다. 반면에 중생들의 기연(機緣)에 응해서 법을 설하기 시작하는 교기인분을 보현의 법문이라고 한다.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찾아서 구도행각을 하는 일련의 과정을 설해 놓은 것이 「입법계품」이다. 선재동자가 마지막으로 보현보살을 만난 후 보현보살의 모공찰(毛空刹)로 들어가는 것이 입법계이다. 깨달음을 완성하는 것이 곧 행원의 완성이므로 실천적 행동력이 보현을 통해 완성됨을 보여주고 있다. 흔히 대승불교를 보살승불교라 하여, 보살승의 실천을 통해 부처의 과위(果位)를 증득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보살도는 이타원력(利他願力)인 행원인데, 보현보살이 이 행원을 열 가지로 나누어 설하는 것이 「보현행원품」의 내용이다. 행원(行願)이라고 할 때, ‘행’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신체적 활동을, ‘원’은 마음 속으로 항상 구제하겠다는 생각을 잊지 않는 정신적인 의지를 가리킨다. 물론 신구의(身口意) 삼업의 업행이 대비원력에 의해 일어날 때가 행원이 갖추어지는 것이다. 또 대승불교에서는, 대표적 보살행의 특징을 세 가지 혹은 네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이를테면 예불문에 나오는 4대보살의 명호가 있는데 ‘문수·보현·관음·지장’으로 문수는 지혜를 의인화하여 나오는 보살이고, 보현은 행원을, 관음은 자비를, 그리고 지장은 악도중생 구원을 위한 특별한 비(悲)를 띄고 나오는 것을 의인화한 보살이다. ‘문수·보현·관음’을 3대보살이라 하고, ‘지장’을 합하여 4대보살이라고 한다. 사람의 신체에 비유해 말한다면 문수는 눈이고, 관음은 손이며, 보현은 발이다. 지장은 대비천제로 애끓는 모정과 같은 마음으로 아픈 중생을 자식처럼 불쌍히 여겨 흘리는 눈물과 같은 보살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 전신을 움직이는 활동을 상징하는 것은 역시 보현보살이다. 이는 대승적인 실천력에 의해 부처님의 과덕(果德)이 성취되고 동시에 부처님의 법이 살아있는 활동의 상태가 되어야 법의 가치가 중생들에게 입혀진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보현행원을 고려시대 균여대사는 노래로 지어 일반사람들이 부르며 외우게 했다. 향가문학으로 간주되는 국문학사상 유명한 가요다. 「보현십원가」라는 이 노래는 십종행원 하나하나에 붙인 가사 10수와 총결무진가(總結無盡歌) 1수를 더해 모두 11수로 되어 있다. 보현의 10종행원은 결국 부처님의 공덕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라는 동기를 밝히면서 말할 수없고 말할 수없는 부처님 국토의 작은 먼지 수만큼 많은 겁을 지나면서 설해도 다 말할 수 없는 부처님의 공덕이 보현의 10종 행원으로 성취된다는 사실을 밝혀 놓은 것이 서두의 이야기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5월 제4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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