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어생일각(魚生一角)

고불미생전(古佛未生前)에
응연일상원(凝然一相圓)이라
석가유미회(釋迦猶未會)거니
가섭기능전(迦葉豈能傳)가

옛 부처 나기 전에
한 상이 뚜렷이 밝았도다.
석가도 오히려 알지 못했거니
가섭이 어찌 전할 손가.

육조 스님의 적손이신 마조 스님은 남악회상에서 좌선만 하면서 좌복을 일곱 개나 뚫었다. 좌에 집착되어 마치 죽은 사람 같고 또한 목석으로 만든 등상(等像)같았다.
그때 회양 선사(懷讓禪師)께서는 조금도 진전이 없는 것을 보시고 묻기를,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니
마조 스님이 답하기를 “좌선합니다.”
또 회양 선사께서 묻기를, “좌선을 해서 무엇을 하려는가?” 하니
마조 스님의 답이 “부처가 되려고 좌선합니다.” 라고 하였다.
회양 선사께서는 암자 앞의 바위 위에서 벽돌을 갈고 있었다. 벽돌 가는 소리를 듣다 못한 마조 스님은 회양 선사에게 그 까닭을 묻되, “스님, 벽돌을 갈아서 무엇 하렵니까?” 하니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 라고 대답하였다. 마조 스님은 아무리 생각하여 보아도 벽돌을 갈아서는 도저히 거울이 될 것 같지 않아서 또 묻기를,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하니
회양 선사는 “벽돌을 갈아 거울이 안되면 앉아 있어서 부처가 될 줄 아는가?”하시니
마조 스님이 묻기를, “어떻게 해야 옳겠습니까?”
“우차가 가지 않을 때에 소를 때려야 되겠는가, 수레를 때려야 되겠는가?” 하는 언하에 마조 스님은 확철대오하였다.

이것이 바로 ‘언하대오(言下大悟)’인 것이다. 회양 선사의 일구(一句)는 그대로 생사해탈을 할 수 있는 활구(活句)인 것이다.

참다운 선을 하려면 일체 선악 경계에 분별이 없고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아니해야 하며 반드시 간화선(看話禪)을 하여야 한다.

화두를 참구 하는데는 들어서 알 수 없고 생각하여 알 수 없다. 그러니 알 수 없는 화두를 용맹스럽게 꼭 잡고 의심을 매하지 말아야 필경에는 그 의심이 잡혀 들어와 뚜렷하게 나타나며 그 의심 전체가 한 덩어리 되어 내외가 없고 동서가 없으며, 또한 백만인 중에 있더라도 한 사람도 있는 줄을 모른다. 이렇게 의단이 차면 언하에 대오하여 생사 없는 해탈락을 얻게 된다.

급히 스승을 찾지 않으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모름지기 최상승법을 깨달은 선지식을 찾아서 바른 길을 지시 받도록 할 것이다. 만일 스승을 잘못 만나면 외도소견만 듣고 그것을 말하기까지 하니 외도가 번성하는 것이다. 외도지견은 팔만 사천 가지나 되니 얼마나 잘 번성하겠는가? 그러니 옳은 스승을 찾아서 증득한 바를 똑바로 점검을 받아야 하느니라.

대중들이여! 이 삼계화택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인데 달마대사가 부처님의 정법을 동토에 전한 도리를 깨닫지 못하면 중생견에 빠져서 사후에는 삼악도밖에 갈 길이 없다.
그러니 생사해탈의 참선법을 배우는 대중들은 이 몸을 잃은 후에는 도저히 정법을 만나기 어려운 것이니 용맹정진을 하여 육신을 가진 이 기회에 기어코 우리의 본래면목을 깨달아야 하느니라.

십년단좌옹심성(十年端坐擁心城)하니
관득심림조불경(慣得深林鳥不驚)이라
작야송담풍우악(昨夜松潭風雨惡)터니
어생일각학삼성(魚生一角鶴三聲)이로다

십년을 단정히 앉아 마음의 성을 지키니
깊은 숲의 새가 놀라지 않게 길들었구나.
어젯밤 송담에 풍우가 사납더니
고기는 한 뿔이 남이요 학은 세 소리더라.

이것이 서산 스님의 게송이다. 의심이 많고 놀라기 잘 하는 새가 이제는 사람이 와도 놀라지 않는다고 하니 그 얼마나 여여부동(如如不動)한 경계인가.

분별·망상·산란심·무기심이 개시묘법(皆是妙法)이요, 그대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이요, 해탈대각(解脫大覺)인 것이다. 말하자면 그 속에서 옷을 입고 밥을 먹지만 분별이 없고 산하대지(山河大地),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의 온갖 것이 그대로 해탈인 것이다.

바로 ‘어생일각(魚生一角)’이 그대로 각(覺)인 것이다. 이 도리는 속일 수 없고 ‘어생일각’ 이란 말로는 아무리 하여도 안된다. 인간 시비, 애착, 생로병사가 다 끊어진 곳이니 분별로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고기가 뿔이 하나 난 도리’ 란 무엇인가? 이 도리는 언하에 시간도 공간도 없는 본마음을 바로 깨닫고, 생멸이 없는 본성품을 바로 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도리를 나 전강이 이르되, “어생일각이 그대로 학삼성(鶴三聲)이니라.”

대중들이여! 언하에 대오할지어다.

금일 내가 참선법을 닦는 정법학자에게 권하노니, 평시에 구두선(口頭禪)만 익혀서 도를 통달한 것처럼 말하나 경계를 당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홀연 죽음이 닥치면 무엇으로 생사를 대적하겠는가. 다만 남을 속여 왔으나 이 때를 당하여 어찌 자기마저 속일 수 있으랴. 몸이 잠을 자는데 또 다시 몸이 생겨서 별별 일을 다하면서 분별·망상·싸움을 하였던 것인데 꿈을 깬 후 잠잘 때 생겼던 몸은 어디에 있는가.

평상시에 맹렬히 정신을 차려 화두만 지켜 가면 날이 가고 해가 가서 화두가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서 불조대기(佛祖大機)를 깨달으면 천하선지식의 혀끝에 속지 않고 스스로 큰소리를 치리라.

선에 어찌 관문이 있으며 도에 내외가 있고 출입이 있겠는가. 그렇지만 사람에 따라 미오(迷悟)가 있으므로 이에 선지식인 관문지기가 부득불 때에 따라 관문을 열고 닫으며 열쇠를 잘 단속하며 그것을 엄하게 다스려서 혹 말과 복색을 달리하여 법도를 어기고 넘어가려는 자가 있으면 그 간계를 못 부리게 하니 관문을 통하기가 쉽지 않다.

만약에 자기를 밝게 알지 못하거든 모름지기 선지식을 참예하여 생사근본을 마칠지어다. 공부하다가 겨우 심식(心識)이 좀 맑아져 약간의 경계가 현전(現前)하면 문득 게송을 읊으며 스스로 큰일 다 마친 사람이라 자처하고 혓뿌리나 즐겨 놀리다가 일생을 그르치고 마니 혓뿌리의 기운이 다하면 장차 무엇을 가져 생사를 당적하겠는가?

우리 정법학자들은 응당 생사를 벗어나고자 하거든 공부는 모름지기 참되어야 하고 깨침도 실다워야 하느니라. 오직 화두만 단단히 잡아 의심이 순일해지면 지각심(知覺心)을 내지 말라.

동정(動靜)이 일여(一如)하고 오매(寤寐)가 성성(惺惺)하면 홀연히 본참공안(本參公案)을 타파하여 자기면목을 보리라. 이때에 널리 선지식을 참예하여 제조사의 중관(重關)을 통과하여야 하느니라.

금일 대중들에게 분명히 이르노니 백천만겁을 몸으로써 보시할지라도 소소영영한 주인공인 본각을 얻은 것만 같지 못하리라.

구년소실자허엄(九年小室自虛淹)하니
쟁사당두일구전(爭似當頭一句傳)이리오
판치생모유가사(板齒生毛猶可事)인데
석인답파사가선(石人踏破謝家船)이니라

구 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이것이 ‘판치생모’에 대한 고인의 송구(頌句)인데 ‘조사서래의’에 이 이상 더 가까운 게송은 없다. 금일 산승은 모든 허물을 ‘판치생모’에 붙이노니 대중들은 오직 ‘판치생모’만 붙잡고 용맹을 다하여 의심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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