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여여로 상사디여

주장자를 들어 법상을 치시고

황앵상수일지화(黃鶯上樹一枝花)요
백로하전천점설 (白鷺下田千點雪)이로다

부득이 해서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고 거기에다 송(頌) 하나를 붙이되 주장자를 들어서 대중에게 보인 도리는, “노랑 꾀꼬리가 나무에 오르니 한 떨기 꽃이요.” 법상을 친 도리는 “백로가 밭에 내리니 천 점의 눈이니라.” 내가 이렇게 일렀다.

그 다음에 또 주장자를 들었다가 법상을 치고 이 도리를 이르되, “사자는 사람을 무는데 한나라 개는 흙덩이를 쫓는다.” 했으니 그만하면 알 것이지 거기에다 또 무엇을 첨부해서 말할 것인가.

그러나 알수록 그 허물이 많고, 우리 중생의 알음알이가 모르는 것보다 더 허물이 많아 법문을 듣고 알음알이를 내는 학자에게는 방(棒)을 내리는 것이다. 아무리 알아 보았자 분별식으로 아는 것은 번뇌 망상만 더하고 차라리 모르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알음알이가 없느니라.

우리 중생들은 분별(分別) 망상(妄想) 때문에 생사고(生死苦)를 받는 것이다. 그러니 아는 것이 모두 망상이고 업(業)인데 이런 소견으로 법문을 들어보았자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모르는 것은 한 방망이요, 아는 것은 두 방망이라 하는 것이니 도대체 이것이 무슨 도리인고.

이 자리에서 이런 법문을 듣고 언하(言下)에 도인은 마음을 취하고 범부는 경계를 취한다. 또 사자는 짐승 중의 왕이니 흙덩이를 던지면 사람을 물고 개는 흙덩이를 쫓는다.

그러면 도인은 마음을 취한다고 하니 어떤 것이 마음인가. 마음을 쫓아 들어가도 마음도 아니며, 부처도 아니며, 모든 색상이 끊어진 자리인데 어떤 것을 마음이라 할 것인가? 그러나 도인은 마음을 취하고 범부는 경계를 취한다고 하니 도인이나 사자도 색견상견(色見相見)에 떨어지거늘 하물며 경계를 취하고 흙덩이를 쫓는 것은 그 얼마나 어긋난 것인가.

그래서 우리 불법의 해탈도리(解脫道理)는 부처와 부처가 서로 보지 못하며, 천성(千聖)도 알지 못하였고, 석가도 오히려 알지 못하였다. 그 생사 없는 근본당처(根本當處)에 들어가서는 무일물(無一物)이니 유일물(有一物)이니 하여도 맞지 않는 말이다.

그러니 어떻게 일러야 하겠는가? 이 생사해탈법이 언하에 있는 것인데, 언하를 여의고는 참으로 얻기 어려우니 언하에 대오(大悟)해야 하느니라. 즉, 법문을 듣다가 깨닫는다는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 서울 선학원에서 만공 스님과 용성 스님 두 선지식이 서로 법담을 하시게 되었다.
용성 스님이 만공 스님에게 말씀하시기를 “어묵동정(語默動靜)을 여의고 이르시오.” 하시니 만공 스님은 아무 말씀도 없이 계셨다.
그러자 용성 스님은 만공 스님에게 “양구(良久)를 하시는 겁니까?” 하고 물으니
만공 스님의 대답이 “아니오.” 라고 하셨다.

그 후 이 법거량(法擧揚)의 내용을 들은 나는 용성 스님을 뵙고 “두 큰스님께서는 서로 멱살을 쥐고 흙탕에 들어간 격입니다.” 하니
용성 스님께서 “그러면 자네는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스님께서 한번 물어주십시오.” 하였더니
용성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묵동정을 여의고 일러라.” 하셨다.
내가 대답하기를 “어묵동정을 여의고 무엇을 이르라는 말씀입니까?” 하니
용성 스님은 “옳다, 옳다.” 하시었다.

불법이란 것은 이렇게 한번 방망이를 업고 들어가서 뒤집고 살아가는 것이다.

근세 한국불교에서 선의 중흥조이신 경허 대선사의 오도송(悟道頌)을 한번 말하여 보겠다.
홀문인어무비공(忽聞人語無鼻孔)하고
돈각삼천시아가(頓覺三千是我家)로다
유월연암산하로(六月燕巖山下路)에
야인무사태평가(野人無事太平歌)로다

홀연히 콧구멍 없다는 말을 듣고
문득 삼천 세계가 나의 집인 줄 깨달았다.
유월의 연암산 아랫길에
들사람이 일없이 태평가를 부르는구나.

아무리 부처님이라도 허물이 있으면 한번 방을 쓰고 들어가는 법이다.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후, 일곱 걸음을 걸으신 뒤 사방을 돌아보시고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시며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하셨는데 그 후 운문선사(雲門禪師)가 나와서 말하기를 “내가 당시에 만약 보았더라면 한 방망이로 타살하여 개에게 주어 씹혀서 천하를 태평케 했으리라.” 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운문끽구자(雲門喫狗子)’ 라고 하는 선문중(禪門中)의 ‘척사현정(斥邪顯正)’ 공안이다. 그런데 나도 경허 큰스님의 오도송에 대하여 일방(一棒)을 쓰고 한마디 하였다.

우리 선가(禪家)에는 참선해서 견성(見性)하는 법을 소에 비유하여 말한 것이 있는데, 만약 중이 시주의 은혜만 지고 도를 닦아 해탈하지 못하면 필경 죽어서 소밖에 될 것이 없다는 말을 어떤 처사가 듣고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만 되어라.” 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경허 큰스님은 언하(言下)에 대오(大悟)하였던 것이다.

유마경의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문수보살은 말로써 이를 수가 없다고 하였는데 유마거사는 묵묵히 말이 없음으로써 이르니 유마거사야말로 불이법문을 가장 잘 설했다고 찬탄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니 도는 승속에 관계없는 것이다.

단 한마디 ‘소 콧구멍 없다’ 는 언하에 대오하였던 것이다. 견성하여 생사해탈법을 얻어 삼천 세계가 그대로 나의 집인 줄 깨달았으니 무슨 일이 있으리오.

‘유월의 연암산 아랫길에 야인이 일없이 태평가를 부르는구나’ 참으로 훌륭하고 거룩한 오도송이라고 여러 큰스님들이 모여서 찬탄하시기에 나는 경허 큰스님의 제자이신 만공 스님과 만공 스님의 제자 보월 스님이 계신 앞에서 직접 말하였다.

“무비공(無鼻孔)에는 없다(無)는 허물이 있고, 돈각시아가(頓覺是我家)에는 깨달았다는 각견(覺見)의 허물이 있으며, 무사태평가(無事太平歌)에도 역시 허물이 있으니, 이런 것이 붙어서 생사묘법(生死妙法)을 못 보고 또 제구 백정식(白淨識)을 못 건너가게 딱 가로막고 있어서 학자가 그 곳에서 넘어지게 되는 것이니 학자를 바로 지시하여야 하겠습니다.” 라고 하니 보월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그 사람 참 공연히 말을 제멋대로 하네.” 하셨다.

그때 만공 스님께서 “그러면 자네가 한번 일러보소.” 하셨다.
“예. 참, 저보고 일러 보라고 하시니 참말로 감사합니다. 천하에 없는 해탈 보배를 바로 주신들 그 위에 더 반갑겠습니까. 그러면 큰스님께서 한번 청하여 주십시오.” 하니
만공 스님께서 물으시기를 “그러면 경허 큰스님의 ‘무비공 도리’ 나, ‘각견 도리’ 나 ‘무사태평가 도리’를 어디 한번 제쳐 버리고 일러 보소.” 하시었다.
내가 말하기를 ” ‘유월연암산하로’ 까지는 경허 큰스님이 송하신대로 두고, 제가 외람되지만 큰스님 송의 끝 구절 ‘야인무사태평가 도리’만 이르겠습니다.” 하고서 “여여 여여로 상사뒤여” 내가 농부가를 부르듯이 이렇게 일렀다.
그랬더니 만공 스님이 있다가 “아, 이 사람아 노래를 부르는가? 여여로 상사뒤여가 노래가 아닌가, 노래를 부르는 일이 무슨 일인가.” 하시었다.
그래서 나는 “스님이 재청하시면 다시 한번 이르지요.” 그러고는 보기 좋게 춤을 추면서 곡조를 부쳐서 다시 “여여 여여로 상사뒤여.” 하니
“적자농손(嫡子弄孫)일세.” 라고 만공 스님은 점검하셨다.

심월고원(心月孤圓)하니
광탄만상(光呑萬像)이요
광경구망(光境俱忘)하니
부시하물(復是何物)고

마음 달이 외로이 둥글으니
빛이 만상을 삼키도다.
빛과 경계를 모두 잊으니
다시 이 무슨 물건인고?

이것이 경허 대선사의 열반송이다. 경허 대선사는 이렇게 송하시고 일원상(一圓相)을 그리신 후 임자년 4월 25일에 갑산에서 입적(入寂)하시었다.

대중들이여! 어떤 것이 일원상의 본래면목인고?

누구나 나에게 화두를 요구하면 조주(趙州) 스님의 화두가 많지만 그 중에서 ‘여하시 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이닛고.’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를 선택하여 주었다.

그러면 여기서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법을 간단히 말하겠다. 오직 화두만 잡되 이치 길도 없고, 말 길도 없고, 마음 길도 없어야 하느니라. 화두를 참구해 감에 십년을 하다가 또는 일생을 하다가 언하에 대오가 있는 법이다. 이 생사고해에서 아무리 분별 망상을 하나 언하에 한번 깨달아 버리면 본래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진여(眞如)의 자성(自性)에서 생각을 일으키되, 육근(六根)이 비록 보고 듣고 깨닫고 알더라도 모든 경계에 물들지 않고 참 성품이 항상 자재(自在) 하느니라.

천지상공진일월(天地尙空秦日月)이요
산하불견한군신(山河不見漢君臣)이니라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도인은 마음을 취하고 범부는 경계를 취한다는 것과, 또 사자는 사람을 무는데 개는 흙덩이를 쫓는다는 것은, 더하고 덜할 것 없이 다 허물인데, 천지에 오히려 진나라 일월이 공했고, 산하에 한나라 군신을 보지 못하였구나.

이것은 또 무슨 도리를 취한 게송(偈頌)인가? 내가 대중을 위하여 이 뜻을 보이노니,
“九九는 번성(飜成) 八十一이니라. 즉, 구구는 아무리 뒤집어 일러도 팔십일이니라.”

산승이 모든 허물을 이 주장자에 미루어 놓고 불법을 설하였지만, 이 해탈정법을 혼자만 듣고 알아 가지고 남을 위하여 전해주지 않으면 안된다. 차라리 무량영겁에 생사고를 받고 있을지언정 소승심을 발하지 말라 하신 말씀도 있으니 이 법문을 듣고 모두 신수봉행(信受奉行)하고 남을 위하여 꼭 전하여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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