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법발원은 다들 아시는 바와 같이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호법은 바로 부처님의 크신 법문을 받들어서 이 땅에 부처님의 광명이, 부처님의 위법이 널리 퍼지고 부처님의 진리광명을 위해서 이 땅이 빛나도록 하는 원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발원을 하시는 분들은 다생 동안 인연을 심어서 부처님의 정법을 부처님의 것으로 돌리지 아니하고 바로 내 생명의 진리광명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의 참된 진리 생명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숙된 불자로서 비로소 이런 발원이 가능한 것입니다. 여기 이 자리에 호법을 발원해서 부처님의 진리광명이 빛나는 것은 부처님의 일, 남의 일 불법문중의 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의 일로 생각해서 이 땅에 진리광명이 빛나고 이 땅에 진리의 질서가 이루어지는 것을 원하고 정진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어디다 내놓아도 성숙된 불자로서 자랑할 만하고 칭찬과 존경을 받을 만하다고 생각해마지 않습니다. 오늘 새로 호법발원하셔서 이 법회에 참석하신 형제들에게 거듭 경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 불광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이 뭐냐고 말하면 반야바라밀일 것입니다. 반야바라밀, 바라밀 수행, 바라밀 행자, 바라밀 전법, 바라밀행이라고 그럽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겉모습, 겉형상의 모습이 아닌 진실생명의 모습, 진실한 자기회복된 자세, 그 진실한 자세에 입각한 참자기의 발휘, 그것을 가리켜서 바라밀행이라고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라밀 입장에서 볼 것 같으면 겉형상, 대립하고 원망하고 하는 현상들은 겉형상이고 실로 있는 내면의 세계는 부처님의 진리공덕이 충만한 부처님의 크신 위덕이 넘쳐나는 그것이 실상이라 그것이 진리의 실상이고 바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생명의 참모습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끊임없이 반야바라밀을 염해서 반야바라밀의 생명을 살고 반야바라밀 공덕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은혜를 안다고 하는 것이 그 중에 하나가 됩니다.
눈을 뜬 사람이 자기가 살고 있는 환경이 얼마나 많은 은혜에 감싸여 있으며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기 이전에 이미 얼마나 많은 은혜와 위신력을 부어주고 계신가 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진실생명에 복귀해서 봤을 때 바로 온 우주가 부처님의 은혜다 하는 것을 알게 돼서 언제나 감사한 생각, 언제나 죄송하고 은혜로운 세상에 살고 있다 하는 겸허한 생각, 그것이 바로 바라밀 행자의 기본적인 행위 가운에 하나가 아니겠는가 생각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결코 우리 불자들은 은혜를 보지 못하는 맹인이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경전 말씀에서는 거듭 거듭 사은(四恩)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부모님의 은혜, 중생의 은혜, 나라의 은혜, 그리고 삼보님의 은혜가 말씀되어 있습니다마는 그 은혜는 그렇게 숫자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원천적으로 내가 존재하고 있는 자체가, 내가 살고 있는 나를 감싸고 있는 온 우주의 일체가, 바로 크신 은혜의 표현입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들은 언제나 은혜의 눈을 활짝 뜨고 은혜를 끊임없이 보고 끊임없이 감사할 줄 알 때 비로소 진리의 공덕이 내 생명에서 피어나는 구체적인 바라밀 행자가 되리라고 생각됩니다.
또 하나, 우리 바라밀 행자가 관심두어야 할 것은 세상살이 하면서 느꼈던 미움과 원망과 대립감정, 혹은 슬픔, 아픔 등 마음의 혐오심이나 마음에 입은 상처, 거기서부터 훤출히 자유스럽게 벗어나는 일입니다.
내 마음에 깃들어 있는 미움과 원망과 대립감정과 슬픔과 마음의 상처들 그 모두는 반야바라밀에는 실로는 없는 것인데 반야바라밀이 아닌 망념의 그림자가 내 마음에 깃들었을 때 보고 느끼는 현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반야바라밀을 염해서 부처님의 진리광명 즉, 불광이 넘치고 있는 것을 끊임없이 관해서 마음에서 어둠과 모든 대립감정과 미움과 슬픔과 과거의 실패관념이라든가 이러한 마움속의 상처를 벗어나서 그러한 상처에서부터 자유스럽게 항상 활발한 마음이 되는, 밝은 마음이 되고 기쁜 마음이 되는, 이것이 또한 바라밀 행자의 중요한 여건이 되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려서 우리 바라밀 행자의 일상생활은 절대적인 감사입니다.
은혜를 보고 은혜로 살고 있는 이 생명인 것을 알기 때문에 절대감사, 아무리 괴로움과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 실로 있는 것이 아닌 어두운 그림자, 실로는 반야바라밀 진리광명밖에 없다 은혜광명밖에 없다는 것을 마음속 깊이 다지고 반야바라밀을 염해서 마음속에 끊임없는 감사를 행할 때 감사는 감사로 끝나지 않습니다.
감사는 감사할 무수한 새로운 일들을 불러 일으킵니다.
감사를 끊임없이 드리는 사람에게 감사할 일은 연달아 일어납니다. 감사는 바로 소극적인 관념이 아니라 바로 적극적인 창조라는 말을 하게 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감사는 진리세계에 있는 것을 긍정하는 말, 긍정하는 자세, 진리를 긍정할 때, 진리를 긍정하는 자세가 됐을 때, 그 진리에 있는 구체적인 내용이 우리 생활 전면에 나타납니다.
우리 바라밀 형제들은 그 점을 마음속에 확실히 다져서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 한 가지 덧붙여 말한다면 절대의 감사와 절대의 화해입니다. 절대로 아무하고도 대립감정 두지 않는, 원망을 두지 않는, 미움을 두지 않는, 과거에 나를 해쳤다고 하는 그러한 어두운 관계를 가지지 않는 절대의 화해, 이것이 바라밀행자의 기본적인 자세 가운데 하나가 되리라 생각됩니다.
왜 그런가. 본래 반야바라밀에서 볼 때는 반야바라밀 그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진리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진리밖에 따로 없기 때문에 어떤 것을 가지고 미워하고 대립할 대상이 될 것인가. 미워하고 대립할 대상이 있다고 그러면 그것은 부처님을 미워하고 대립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미워하고 대립하고 해서 무엇이 이루어질 것인가 아무리 이유가 있고 조건이 맞는다 하더라도 절대로 미워하거나 대립감정을 않고 깨끗이 화해해서 나와 더불어 한 생명인 것을 철저히 사무쳐서 알 때에 은혜는 거기서 더욱 크게 넘쳐납니다.
우리 형제들 언제나 밝은 마음이라 했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항상 하나가 되어서 화해하는 마음, 밝은 마음이 됐을 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 더 붙이면 반야바라밀 행자는 자기 생명 가운데서 끊임없이 진리광명의 아침해가 솟아오르는 것 같은 밝은 태양이 타오르는 내 생명의 모습을 항상 지켜보고 일체 성취, 일체 원만의 현 상태를 마음속에서 굳게 믿고 다짐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서원이라고도 할 수 있고, 직관이라고도 할 수 있고, 때로는 이것은 희망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존입니다. 내 생명의 현존, 현재 있는 실지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진리광명이 넘쳐나고 아침에 타오르는 것같이 솟아오르는 것같이 찬란한 부처님의 위덕과 위신력이 내 생명에서 항상 빛나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이것이 반야바라밀 불자의 기본적인 직관의 하나입니다. 이렇게 해서 불광형제들은 언제나 크게 밝은, 크게 지혜로운, 크게 화목한 일체와 더불어 하나가 된, 부처님의 위신력을 쓰는 크신 밝은 공덕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마는 반야바라밀이, 바로 부처님의 진리생명이 내 생명에서 타오르고 있는 것은 끊임없이 지켜보고, 내 생명에 넘쳐나고 있는 부처님의 공덕을 내여 쓴다고 하는 이러한 기본적인 믿음을 귿게 가져서 더욱 크게 빛나고 성장하기를 서로 기약합시다.
우리에게는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등 중요한 수행 덕목이 있습니다. 보살은 이 여섯 가지 수행으로 자신을 빛내고 궁극적 완성을 이룹니다. 그 중에서 인욕은 보시 다음가는 귀한 수행입니다. 참기 어려운 것은 능히 참으며 겸손하게 자기를 반성하는 것이 인욕의 덕인 것입니다. 만약 남에게 수모를 당했다면 분노하고 변명하기에 앞서 자기 자신에게 그런 모욕을 받을 이유가 과거에 있을 것이라고 먼저 생각하는 것이 수행자의 지혜입니다.
지금은 비록 아무 일이 없을지라도 과거 언젠가 수모를 당할 만한 생각이나 행동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금생만이 아니고 보다 먼 과거세의 일일지도 모릅니다. 도대체 원인이 없는 곳에 결과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남에게 욕을 당하는 것은 과거에 지은 행위가 있고 그 과(果)가 지금 형상으로 나타나서 소멸된다는 것은 안다면 어떤 악구라도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도리어 감사하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흥분하지 않고 평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는 것에 대항하는 것은 분풀이하는 것입니다. 대항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나이 40이 되면 얼굴에 대해서 책임을 진다는 말이 있습니다마는 자기 얼굴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습니다.
용모를 다듬는다든가, 또는 용모가 단정하도록 서로 관심을 가져서 조심한다든가, 더 좋게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별 미용술을 다 쓰는 것이 오늘의 세상의 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가장 가기 모습을 아름답게 가꾸는 방법이 무엇인가. 그것은 인욕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성을 내지 않는 것입니다. 미워하고 원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미워하고 원망하고 성낼 때 가장 추악한 얼굴이 되어버립니다. 그런 마음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을 때 얼굴에 표정이 나타납니다. 얼굴 빛깔에 변화가 온다든가 미세한 신경의 영향을 주어서 그 색깔에 이상이 온다든가 또 굳어진다든가,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서 얼굴의 모양새와 얼굴에 대한 분위기를 바꿔버립니다.
성낸다고 하는 격한 감정이, 대립한 상대들을 격파하고자 하는, 미워하고자 하는 그런 감정이 자기얼굴을 바꾸고 빛깔을 바꾸고 모양을 바꾸고 형체까지 바꾼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얼굴에 관심이 많은 분들은 특별히 이 인욕법문에 대해서 더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참기 어려운 것을 능히 참는다. 겸손하게 자기를 반성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항상 염해서 참기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엉뚱한 일을 당하면 마하반야바라밀을 한 번 외우고 생각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참기 어려울 때 마하반야바라밀 염하는 그 힘으로 해서 능히 참고 그리고 생각을 돌이켜서 대립하고 다툴 것이 아니라 이것은 과거 어느 때인가 지었던 원인이 이렇게 나타남으로써 소멸되는 것이다. 내가 알고 모르고 간에 이미 있는 과거의 원인, 잠재해 있던 원인이 이렇게 소멸되어서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돌릴 여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반야바라밀 염송을 평소에 해 놓지 아니하면 그런 일을 다해서 그냥 말이 먼저 나간다든가 반박하는 행동이 먼저 나가서 결국 성을 내게 되고 관계는 파괴되고 결과는 더욱더 좋지 않은 방향으로 확대가 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반드시 어떤 수모를 당하거나 격한 감정을 유발할 수 있는 사태를 당하더라도 이유가 과거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 우리불자 수행자의 지혜인 것입니다.
우리 형제들 반야바라밀을 염송해서 많은 공덕을 거두시겠지만 그렇게 격한 감정에 놀아나지 않는 부동심,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이 생겨서 어떤 일, 결한 일을 당하거나 거슬리는 말을 듣더라도 동요하지 않는 마음이 되는 것이 바로 바라밀 수행자가 가지는 공덕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야바라밀, 끊임없이 반야바라밀을 염해서 자신 가운데 반야바라밀의 부동심을 가꾸어 놓아야 합니다. 어떠한 사태가 생기더라도 동요되지 아니하고 지혜를 써서 그 사태를 극복할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光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