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 제1절 (2) 자력의 천도, 타력의 천도

해인사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 이야기는 영가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그것과 연결시켜 영가 천도에 대한 이야기들을 전개시켜 보자.

죽어서 육체를 이탈한 영(靈)은 업을 좇아 헤매게 되고, 자기의 업과 인연이 있는 곳에 이르면 걷잡을 수 없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 비단 개구리가 화려한 옷을 입고 풍악을 울리며 놀고 있는 청춘 남녀로 보인 것이나, 또아리를 튼 뱀이 어여쁜 여인으로 보인 것도 한 예이다.

영혼은 자기가 태어나야 할 인연처에 이르면 그곳이 이 세상에서 가장 바람직한 낙원처럼 보이게 된다고 한다. 이것이 묘한 점이다. 까마귀로 태어날 영혼에게는 까마귀 둥지가 대궐보다 더 아름답게 보이게 되고, 그래서 그 대궐 같은 까마귀 둥지로 들어가 까마귀 새끼로 태어나고 만다. 스스로 지은 업의 에너지가 맞는 사이클을 찾아 파고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명업력(無明業力)이다.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어둠이다. 이 업의 장벽에 가리어 까마귀 둥지를 까마귀 둥지로 보지 못하고 뱀의 몸을 뱀으로 보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렇듯 깜깜한 무명(無明)을 제거하여 있는 그대로를 보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분명히 있다. 그리고 그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살아생전에 스스로 닦아 익힌 수행의 힘이요, 다른 하나는 49재 등의 타력적(他力的)인 천도 의식을 통한 구원이다.

살아생전에 불경을 공부하고 참선, 염불 등의 수행을 많이 한 사람은 죽은 후에도 미혹에 휩싸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아 스스로가 꼭 태어나야 할 곳에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열심히 수행하지 않았더라도 부처님의 한 말씀 가르침, 예를 들어 <금강경> 사구게(四句偈) 한 구절이라도 마음에 깊이 새겨 좌우명으로 삼는 이라면 나쁜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게 된다.

옛날, 공부한 것이라고는 <금강경> 사구게 한 구절밖에 없는 스님이 평생토록 욕심을 부리다가 죽었다. 그 스님의 영혼은 이곳저곳을 헤매 돌아다니다가 대궐보다 더 화려해 보이는 까마귀 둥지가 너무나 좋게 보여 그곳에 들어가서 머물고자 하였다. 그때 허공에서 우레와 같은 소리가 들려 왔다.

무릇 모양 있는 것은
모두가 허망한 것이다.
만약 모든 모양 있는 것이
모양 아닌 줄을 알면
곧바로 부처님을 보리라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처망(皆是處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

“네가 평소에 이것 하나만을 부지런히 외웠거늘, 어찌 까마귀 둥지를 대궐보다 더 좋게 보고 들어가려 하느냐? 눈을 떠라. 눈을 떠라. 네가 그곳에 빠져들면 영원히 헤어나기 힘드느니라.”

그 소리를 듣고 스님은 까마귀 둥지를 벗어나 새롭게 발심하고 불법을 잘 닦을 수 있는 인연처를 찾아 태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 불가(佛家)에서 몇 년마다 윤달이 드는 해에 베푸는 예수재(豫修齎)도 같은 의도에서 마련된 의식이다. 사후 세계를 위하여 미리 닦는 예수재. 이 예수재 때 수행을 잘하게 되면 그 공덕이 밑거름이 되어 능히 좋은 인연처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재는 이름 그대로 ‘미리 닦는 것’이다. 단순히 몇 푼의 돈을 내고 형식적으로 이 절 저 절을 찾아다녀서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 참으로 그 이름에 걸맞은 ‘예수재’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에 선심(善心)을 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아 내생까지도 구제할 수 있는 불연(佛緣)을 맺어야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예수재를 마련한 참 뜻이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고 깨달음의 씨를 심도록 인도하기 위함에 있다는 것을 예수재에 참여하는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만약에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처럼 참된 원을 심고 깨달음을 이루는 공부를 해 익힌다면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고 생사윤회를 두려워하겠느냐? 오히려 죽음을 옷을 갈아입듯이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내생을 새로운 희망으로, 정진의 터전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마음가짐만 가지고 수행하면 자기 영혼은 능히 스스로 천도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자력 천도(自力薦度)인 것이다.

또 하나의 방법인 타력 천도(他力薦度)는 다른 사람이 죽은 자로 하여금 좋은 인연처로 나아갈 수 있도록 빛을 비추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다. 바로 망자의 마음을 바꾸는 법문이다.

망자가 살아생전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속에서 한 평생을 보냈으니 죽었다 하여 어찌 그 마음이 바뀌겠는가? 자연 그 마음은 어둡지 않을 수가 없다. 바로 그러한 마음을 밝혀 주기 위해 행하는 것이 공양, 독경, 염불, 법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재의식(齋儀式)인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이 마음을 고쳐서 새 사람이 되듯이, 영가도 염불과 법문을 듣고 마음을 바꾸어 참회하면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우리는 재를 지낼 때 준비하는 음식이나 법공양하는 책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재를 지낼 때 충분한 음식을 마련하여 베푸는 것은 망인으로 하여금 재시(財施)의 공덕을 쌓도록 하는 것이고, 각종 불교 서적을 법공양하는 것은 “법시(法施)의 공덕”을 쌓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의 법공양은 특히 의미가 있도록 행하여야 한다.

곧 법공양은 망인을 대신하여 법문을 베푸는 것이므로, 그 책을 받아 읽는 사람이 불교의 진리를 잘 이해하여 발심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곧 최상의 공덕인 발보리심(發菩提心)을 이룰 수 있도록 하는 책을 선정하여 법공양을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길인 것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어려운 한문 경전이나 난해한 불경을 준다 한들 누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법공양 책을 선택하는 스님이나 가족들도 꼭 어려운 불경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쉽게 전할 수 있고 인생과 수행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불서를 채택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을 것이다. 내가 이것을 굳이 강조하는 까닭은 법공양한 책을 읽은 이들이 발심할 때라야만 그 공덕이 망인에게 참된 도움을 줄 수 있고 밝음을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부디 법공양을 하는 스님, 가족, 친지들은 이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란다.

日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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