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 제1절 (3) 매일 3천배를 삼칠일 동안

제 1공화국 시절 말기에 치안 국장을 지낸 이강학은 대구에서 태어났다.

공부를 열심히 하였던 그는 초창기 경찰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였고, 곧바로 이승만 대통령의 눈에 띄어 30대의 나이에 치안 국장이라는 높은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 대덕화(大德華)보살은 불심이 지극히 돈독한 분으로 열심히 팔공산 파계사를 다녔고, 차를 타고 가다가도 먹물 옷을 입은 스님만 보면 얼른 뛰어내려 큰절을 하고, 주머니를 털어서 얼마라도 보시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었다. 대덕화 보살은 아들이 높은 권력을 쥔 치안 국장이 되자 더더욱 여러 절을 찾아다니며 불사(佛事)를 많이 도왔고, 사찰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적극 해결해 주었다.

특히 당시는 자유당 말기 시절인지라, 아부하기를 좋아했던 지방의 경찰 국장들은 치안 국장의 어머니인 대덕화보살이 움직일 때마다 친히 길 안내를 자청하였다.

하루는 팔공산의 사찰을 찾아갔더니, 경찰이 와서 주지 스님을 잡아가려 하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스님이 큰 나무 하나를 베어 절 앞의 개울에 외나무다리를 놓았는데, 그것이 산림법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대덕화 보살은 길 안내를 맡은 경찰 국장에게 말했다.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나 같은 노인이 개울을 걷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겠소? 외나무다리를 놓아야지.”

“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 주지 스님 일도 잘 해결되겠지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대덕화 보살은 어려운 일의 해결사 노릇을 하였다. 사찰 입구의 길을 닦는 일, 법당을 짓기 위해 나무를 베는 일, 불상을 모시기 위해 돈을 모으는 일 등 당시 어렵던 절 집안을 위해 헌신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를 보다 못한 학생들이 봉기하여 4,19가 일어났고, 그 와중에서 군중을 향해 ‘발포하라.’고 명령을 내린 죄로 내무부장관 최인규와 함께 아들 이강학이 사형을 선고받게 된 것이다.
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가 양지된다더니, 기정사실화된 아들의 죽음과 함께 대덕화 보살의 집안에는 온통 차압을 하겠다는 빨간딱지가 붙었다. 72세의 대덕화 보살은 울고 또 울면서 팔공산 파계사까지 50리 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종수스님 앞에 엎드려 피눈물을 흘리며 하소연을 하였다.

“스님, 아들이 사형을 당하게 되면 저는 이 세상에 단 1분도 더 살아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제 목숨이라도 바칠 테니 제발 아들을 살려주십시오.”

“보살님, 아들을 꼭 살리고자 하면 부처님께 매달려 보십시오, 사람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라면 부처님께 의지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보통 기도로는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드님을 30년 동안 키웠으니, 30년 키운 공만큼 부처님께 공을 들여야 할 것입니다. 죽기 살기로 기도해 보십시오. 부처님의 응답이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기도를 할까요?”

“아들의 사형 집행은 언제쯤 있을 것 같습니까?”

“한 달 정도 있으면 처형될 것입니다.”

“그럼 삼칠일[21일] 동안 매일 3천배씩 절을 하십시오.”

“예, 아들만 살릴 수 있다면…….”

아들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3천배씩 삼칠일을 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유난히 뚱뚱한 체구의 늙은 대덕화 보살로서는 하루 3천배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젊고 날렵한 사람들보다는 절 한 번 하는데 2-3배의 시간이 걸렸던 대덕화 보살. 첫날 1천배를 했을 때 그녀는 이미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아이구 죽겠다. 그놈이 죽을 팔자라면 죽고, 살 팔자라면 살겠지. 나는 못하겠다. 더 이상은 못하겠다.’

그녀는 10여 분을 누워 있다가 ‘내 아들이 죽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면 다시 일어나서 절하고 또 절하고.

이렇게 3천배를 거의 하루 종일 걸려서 끝마쳤다. 둘째 날도 셋째 날도 그녀는 첫날과 같이 고달픈 몸과 ‘아들을 살려야 한다.’는 마음의 싸움을 하며 정말 지루하게 절을 하였다.

그러다가 4일째 되는 날, 대덕화 보살은 마음을 굳혔다.

“죽을 목숨 살리기가 어찌 쉬운 일이랴. 나는 지금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살리고자 부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다. 일념으로 빌고 또 빌어도 이루어지기 어려운 일인데, 몸 고달픈 것을 핑계 삼아 절을 할까 말까 망설이고 불평불만까지 하다니……. 내 목숨을 걸어 놓고 정성껏 절을 해보자. 지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이 길밖에 없다.”

이렇게 결심한 그녀는 3일째부터 이를 악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발가락이 부르트더니 짓물러 터졌고, 무릎은 다 벗겨져 피멍이 들었으며, 나중에는 손톱 밑에까지 멍이 들어 한 배 한 배 절을 드릴 때마다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대덕화 보살은 절을 멈추지 않았다. 삼칠일이 거의 다 되었을 때는 기운조차 탈진되어 한 번 엎드리면 머리가 무거워서 일어나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한 번 엎드리면 한참을 쉬었다 일어나고, 한 번 엎드리면 또 한참을 쉬고……. 이렇게 하다가 그만 순간적으로 깜빡 졸게 되었다.

순간, 불단 위에 앉아 계시던 부처님께서 일어나시더니, 탁자를 밟고 내려와 앞에 서시는 것이었다.

대덕화 보살이 고개를 들어보니 조금 전까지 분명히 서 계셨던 부처님은 보이지 않고 웬 스님 한 분이 동냥 그릇을 든 채 손을 내밀고 계셨다. 본래부터 보시 정신이 강했던 대덕화 보살은 평소의 버릇대로 주머니를 뒤졌다.

“돈이 있는지 모르겠네.”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며 주머니를 뒤적이자 돈 한 뭉치가 잡히는 것이었다. 꺼내어 보니 돈은 돈인데 빨간 색의 돈이었고, 감촉이 쥐 껍질을 벗겨 놓은 것처럼 물컹한 것이 아주 기분이 나빴다. 액수를 세어 볼 것도 없이 몽땅 드렸더니, 스님이 그것을 받고는 품속에서 하얀 카드 한 장을 꺼내 주는 것이었다. 대덕화 보살은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것을 받았고, 정신을 차려 보니 꿈이었다.

그리고 다시 무거운 몸을 일으켜 절을 계속하였는데, 마지막 3천배가 끝나 갈 무렵 법당 밖에서 스님의 음성이 들려 왔다.

“보살님! 살았습니다. 아드님이 살게 되었어요.”

“예? 살았다구요?”

“방금 내무부장관을 지낸 최인규는 사형이 확정되고, 아드님은 15년 징역으로 감해졌다는 라디오 방송이 있었습니다.”

그 뒤 이강학은 몇 년형을 살다가 특별사면이 되었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만약 대덕화 보살의 이러한 기도가 없었다면 이강학은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다. 곧 사력을 다한 어머니의 기도가 아들을 살렸던 것이다. 이처럼 지극한 기도는 나의 업이 아닌 다른 사람의 업까지도 능히 녹일 수 있다.

일찍이 부처님께서는 ‘살인 등의 큰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불보살님 전에 지극히 기도를 하여 서상(瑞相)을 입으면 죄가 다 소멸된다.’고 하셨다. 기도를 지극히 하면 어떠한 업장도 소멸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의 일이란 낮과 밤의 원리와 같은 것이다. 어둠이 다하면 밝음이 오고, 밝음이 다하면 어둠이 오게 되어 있다. 이를 기도에 적용시켜 보면 어둠은 업장이요, 밝음은 가피이다. 업장이 두터워 뜻과 같이 되지 않을 때 일월과 같은 부처님의 자비에 의지해 보라. 틀림없이 어두운 것이 사라지고 밝음이 오게 되어 있다.

문제는 오직 나의 정성이니, 만약 업장이 두텁다면 사력을 다해 목숨을 걸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

그 하나의 방법인 3천배 기도법은 과거 장엄겁(莊嚴劫)의 1천 부처님, 현재 현겁(賢劫)의 부처님, 미래 성숙겁(星宿劫)의 1천 부처님, 이렇게 3대겁(三大劫) 동안에 출현하는 3천 부처님께 각각 한 번씩의 절을 올리는 참회 법이다.

만약 지금 우리에게 비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면 비상한 기도, 비상한 참회가 뒤따라야 한다.

참으로 큰일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적어도 3천배를 3일 또는 7일, 나아가 21일 정도는 하여야 한다.

지금, 큰일이 눈앞에 이르렀다면 크게 마음을 일으켜 부처님께 매달려 보라. 이것만은 꼭 소원 성취하게 해 달라고, 잘못했으니 살려 달라고 하라. 부처님께 매달려 온 힘을 다해 기도하면 부처님의 밝은 가피는 나에게 이르기 마련이고, 가피력이 나에게 이르면 어두운 업장이 녹아들어 모든 일이 원만하게 풀리게 되어 있는 것이다.

日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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