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간의 용맹정진!
이렇게 7일의 참선수행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선방에서는 7일 동안 잠을 자지 않는 가행정진을 여러 차례 행하고 있다.
이때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은 졸음이다. 망상이 죽 끓듯 하지 않으면 졸음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것이다. 그리고 잠을 이기지 못해 갖가지 일이 벌어지기까지 한다.
꾸벅꾸벅 졸다가 방바닥에 이마를 ‘꽝’ 박는가 하면, 계속해서 옆으로 넘어지는 사람도 있다. 엉엉 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졸음을 쫓아주기 위해 장군죽비로 내리치는 입승스님의 멱살을 잡고 “나는 졸지도 않았는데 왜 때리는 것이냐?”며 괜한 시비를 거는 사람도 있다.
정녕 망상과 졸음이 없다면 도를 깨닫는 것이 어찌 어려운 일이기만 하겠는가?
참선 수행자는 오로지 망상과 졸음을 이겨내야만 한다. 그런데 외진 곳에서 오래오래 정진하면 망상은 차츰 쉬어지지만, 망상이 없어지고 나면 졸음은 더 자주 찾아온다.
번뇌가 없는 고요 속의 졸음. 이 졸음의 맛은 좋다. 깜박 졸은 듯한데 한 시간이 후딱 지나가버리는 이 졸음은 그렇게 맛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졸음에 맛을 들이면 암흑의 귀신굴에 빠져서 영영 헤어날 수가 없게 되고 만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옛날, 인도의 마갈타국에서는 왕궁을 짓기 위해 터를 닦다가 큰 유리독 하나를 발견했다. 그런데 유리독의 그 어느 한 곳도 틔어 있지 않아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왕은 톱으로 켜보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박을 타듯이 한쪽 끝을 조심조심 자르도록 하였다.
막상 켜보니 그 속에는 머리카락이 한없이 긴 사람이 앉아 있었고, 자세히 살펴보니 유리막은 그 사람의 손톱, 발톱이 자라서 만들어낸 것이었다. 왕은 그를 흔들어 깨우도록 하였고, 그때서야 일어난 그는 이상한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이곳은 마갈타국의 왕궁을 지을 장소요. 도대체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저는 비바시불을 가까이 모시고 정진하던 승려입니다.”
이 말에 왕은 깜짝 놀랐다. 비바시불은 과거칠불 중 첫번째 부처님으로, 91겁 전에 사셨던 분이었기 때문이다. 왕이 자세한 사정을 더 물어보았으나 그는 ‘좌선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밖에 알지를 못했다. 이에 부처님께 그 연유를 묻자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는 비바시불 당시에 선정을 닦다가 무기공의 상태에 들어갔느니라. 이렇게 몇 달 동안 먹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있었는데, 갑자기 산사태가 일어나 그를 묻어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무기공에 너무나 깊이 빠져 있었으므로 아직까지 죽지 않게 된 것이니라.”
이처럼 졸음을 깊이 즐기다보면 개구리나 뱀이 몇 달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겨울잠을 자는 것처럼 무기공에 빠져드는 경우가 있다.
얼른 보면 무기공이 대단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이것은 모든 수행의 가장 큰 장애일 따름이다. 흐리멍텅한 상태에 빠져 자기 한 몸조차 구제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을 하는 사람은 또렷또렷함을 생명으로 삼아야 한다. 열두 시각 어느 때나 화두에 정신을 집중시켜 또렷또렷하게 의심을 일으켜야 한다. 이것을 ‘성성’이라 한다. 그리고 다니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한결같이 화두삼매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어찌 이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겠는가? 그러므로 끊임없이 빛을 돌이켜 스스로를 살펴보아야 한다. 집으로 찾아가고 장으로 달아나는 생각을 화두로 다시 붙잡아야 하는 것이다.
인생이 긴 것인가? 아니다. 수행할 순간은 바로 지금이다. 부디 사람의 목숨이 찰나에 있음을 상기하면서 스스로를 경책해보라. 틀림없이 새로운 힘이 솟아날 것이다.
일찍이 야운스님은 <자경문>에서 말씀하셨다.
일생을 헛되이 보낼 것 같으면 만 겁이 지나도록 한이 될 것이다. 무상이 찰나 속에 있으니 날마다 놀랍고 두려운 일뿐이요, 사람의 목숨은 잠깐 사이인지라 한때라도 보장되어 있지 않느니라.
만일 조사관을 뚫지 못한다면 어떻게 편안히 잠만 잘 수 있겠는가?
그렇다. 야운스님의 이 말씀처럼, 참선수행인은 모름지기 조사관을 뚫어야 한다.
조사관은 조사선, 곧 조사의 선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선을 닦는 수행자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 바로 이 관문을 통과해야만 앞서 들어간 모든 조사들과 함께 깨달음의 세계에서 노닐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럼 이 관문은 누가 지키고 있는가? 앞서 도를 깨달은 조사가 지키고 있다. 언어와 문자, 이론과 지식을 초월하여 곧바로 마음자리를 보고 자성불을 확실하게 회복해 가진 조사들이 지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문을 통과하려는 자는 조사들로부터 수행을 점검받게 되고, 한치의 어긋남이 없이 확철대오하였음을 인가받으면 그 문을 통과하여 조사의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조사의 관문을 통과할 수 있는가?
역대 조사들이 던진 화두의 참뜻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앞에서 조주선사의 무자화두와 염화시중의 화두를 살펴보았다.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한 이 무자화두는 1천7백 가지 화두 중의 한 가지이며, 조주선사가 ‘무’라고 하신 까닭을 분명히 알게 되면 조사관을 통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조사관을 통과하게 위해서는 반드시 잠을 이겨야 한다. 옛 스님들은 잠을 이기기 위해 일부러 머리를 길러 솔잎 상투를 만들었고, 그 상투에다 끈을 묶어 천정이나 대들보에 연결하였다. 조금이라도 졸거나 자세를 흐트리게 되면 머리가 잡아당겨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또 비수나 송곳을 턱 밑에 놓고 공부하는 스님네도 있었고, 잠들 때마다 송곳으로 다리를 찌르던 스님도 있었다.
우리는 이런 스님들을 본받아 한바탕 용맹심을 일으켜야 한다.
7일의 용맹정진!
7일 동안 잠을 안자기로 했지만, 물론 졸음 속에 빠지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지만 7일 동안 등을 바닥에 대고 눕지 않는 것만 해도 큰 효과는 있다.
“이제 겨우 이틀, 닷세가 남았구나. 이를 악물고라도 버티어 보자.”
“나흘이 지났으니 반은 넘어섰다. 나라고 못할까보냐.”
“이제 하루 남았지. 죽기 아니면 살기다.”
이렇게 스스로에게 용기를 주며 7일 동안의 정진을 끝내면 확실히 달라지게 된다. 안 했을 때와 비교하면 정신이 그만큼 단련되어 있다. 이렇게 용맹정진, 용맹스럽게 정진하면 반드시 바뀌기 마련인 것이다.
모름지기 잠을 이겨라. 진정 참선수행자가 겨울잠을 자는 뱀처럼 잠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화두 타파는 고사하고 동서남북도 분간하지 못하게 된다. 정신이 별처럼 또렷또렷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때 우리 스스로가 간직하고 있는 취모리검을 꺼내야 한다. 칼 끝에 털을 놓고 훅 불면 털이 끊어지는 최고의 보검, 취모리검을 사용해야 한다. 취모리검은 별다른 것이 아니다.
사람들 누구나가 갖고 있는 용맹심이 그것이다. 그 용맹심을 잡아 일으킬 때 번뇌의 구름은 스스로 사라지고 마음의 달은 스스로 밝은 빛을 뿜어내는 것이다. 잠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용맹심, 바로 나의 강한 결심뿐이다. 그 결심이 나를 바꾸어 놓는다.
그러므로 대용맹심을 일으켜 목숨을 걸고 정진해보라.
전혀 졸지 않고 7일 동안만 용맹정진하면 틀림없이 도를 이룰 수 있다.
여기까지 읽은 재가 불자들은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어려운 참선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차라리 시작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하지 않는 것보다는 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참선이야말로 자기의 힘으로 자기의 참 생명, 참된 주인공을 찾는 공부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재가 불자들 중에서도 참선을 열심히 하여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적지 않다. 그중에서 젊은이도 아니요 남자도 아닌, 죽을 날이 그렇게 멀지 않았던 한 나이 많은 부인의 오도이야기를 예로 들고자 한다.
중국 송나라의 수도 개봉에는 허씨 성을 가진 노부인이 살고 있었다. 그녀의 법명은 법진으로, 일찍이 결혼하여 장태사의 부인이 되었다. 그러나 남편은 그녀의 나이 삼십에 어린 자식 둘을 남겨놓고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불교를 열심히 믿으며 두 아들을 지성껏 키웠고, 마침내 큰아들 소원은 자사(지금의 도지사)에, 작은아들 덕원은 승상의 지위에 올랐다.
어느덧 나이 칠십이 된 그녀는 후원으로 물러나 남은 여생을 보내고 있었으나, 항상 마음속으로는 당대의 큰스님이신 대혜선사를 친견하여 가르침을 받았으면 하는 원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수만리 떨어진 항주의 경산사로 큰스님을 찾아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하루는 대혜선사의 제자인 도겸스님이 집으로 찾아왔고, 노부인은 정중히 법문을 청하였다.
“스님, 저는 대혜 큰스님의 법문을 듣기를 소원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늙은 몸이라 감히 수만리 먼 곳으로 찾아갈 수가 없습니다. 부디 스님께서 대신 법문을 들려 주십시오. 대혜 큰스님께서는 우리 같은 늙은이를 만나면 어떤 법문을 해주십니까?”
“우리 큰스님께서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에게든지, ‘마음이 있는 자는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법문을 들려주시고, 도를 닦아 부처가 되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무자화두’를 참구하게 하십시다.”
“어떻게 무자화두를 참구하도록 지도하십니까?”
“한 승려가 개에게 불성이 있는가 없는가를 물었을 때 조주스님은 무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조수스님께서 답하신 ‘무’의 참뜻, 이것을 알면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곧 ‘왜 무라고 하셨는가’를 간절히 의심하고 하여 해답을 얻으면 됩니다. 이 의심을 놓지 말고 앞으로만 사뭇 밀어붙일 뿐, 왼쪽도 보지 말고 오른쪽도 보지 말아야 한다.”
“잘 알겠습니다. 이제 대혜 큰스님을 친견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으니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그날부터 노부인은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오로지 한 생각, ‘왜 무라 하셨는가?’를 되뭇고 또 되물으면서 하루, 이틀, 사흘, 마침내는 7일 밤낮동안을 정진하였다. 한순간, 노부인은 깜박 잠이 들었다. 그런데 오색이 찬란한 큰 봉황새 한 마리가 집안의 뜰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아, 저 새 위에 올라앉으면 참 편안하겠구나.’
생각과 동시에 그녀는 새의 등에 올라 털이 푹신하게 깔려 있는 목덜미 부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자 봉황새는 허공을 향해 날아올랐고, 잠깐 사이에 구만리 장전에까지 이르렀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집들은 조그마한 점이 되어 오글거리고, 큰 강은 줄 하나 그려놓은 것 같았다.
‘조그마한 점과 같은 저 집들 속에서 서로 살겠다고 욕심을 내고 성을 내고 치고 받고 곤두박질을 치며 살다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녀는 인생살이의 참 면모를 깨달았다. 그리고 봉황새가 날아가는대로 몸을 맡긴 채 세상의 이곳 저곳을 모두 구경한 다음 집으로 돌아왔다. 봉황새는 사뿐히 뜰에 내려앉았고 순간 그녀는 꿈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무자화두’를 깨쳤다.
그녀는 기쁨에 못이겨 덩실덩실 춤을 추다가 시를 지어 깨달음의 경지를 노래하였다.
꿈속에서 봉황 타고 푸른 하늘 올랐더니
인생살이 하룻밤을 여관에서 지냄과 같음을 알았네
돌아올 때 그릇 한단몽의 길인가 하였더니
봄비 온 뒤 산새 소리 해맑더라
날마다 경전의 글을 보고 있으니
옛적에 알았던 이를 만남과 같구나
자주 걸림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
한번 보니 한번 다시 새롭도다
그뒤 도겸스님이 다시 그 집을 방문했을 때 노부인은 이 두 수의 시를 대혜 큰스님께 보여줄 것을 청하였고, 시를 본 대혜선사는 노부인의 깨달음을 인가하는 편지를 써서 보내주었다. 현재 그 편지는 대혜스님의 <서장>속에 <답국태부인>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 진국태부인처럼 재가 불자들도 얼마든지 참선을 하여 도를 깨달을 수 있다. 물론 재가 불자들은 용맹정진이나 참선정진에만 전념하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형편 따라 하루에 30분 정도만이라도 참선을 하게 되면 생활의 큰 변화를 가질 수 있게 된다.
日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