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며
율은 부처님의 행이다
이것은 선과 교와 계율에 대한 옛 스님들의 정의이다.
이 정의를 토대로 하여 계율을 풀이하면, 지극히 평등하고 자비로운 마음에서 우러나온 부처님의 행위가 계율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이며, 그 계율을 행할 때 부처님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자는 어떠한 존재인가?
불자는 부처님을 닮고자 하는 존재이며, 장차 부처가 될 부처님의 아들이다.
어떤 사람이 불자가 되는가?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계율을 받아지녀야만 비로소 불자가 되는 것이다.
묵묵히 선과 교와 율에 대해 생각해보라. 선은 불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닦을 수 있고, 교는 누구든지 배울 수 있다. 불교집안 바깥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선과 교는 누구나 얼마든지 배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계율만은 다르다. 오직 계율만은 불교집안 사람들의 전유물이다. 비구계를 받으면 비구불자가 되고, 사미계를 받으면 사미불자가 되며, 보살계를 받으면 보살불자가, 재가 5계를 받으면 재가불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 집안사람, 곧 불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계를 받아야 한다. 곧 불자가 가장 먼저 지녀야 할 것도 계율이요, 가장 소중히 지녀야 할 것도 계율인 것이다.
이토록 중요한 계율, 무릇 이 계율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먼저 네 가지 과별을 가려놓고 말을 시작해야 한다.
그 네 가지는 계법, 계체, 계행, 계상이다. 계율을 논함에 있어 지금 계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가, 계행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가, 계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를 잘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계법과 계체
계법은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율법을 가리킨다.
비구 250계와 비구니 348계, 사미 10계, 신도 5계 등의 계율이 그것으로, 받는 이의 신분이 무엇이냐에 따라 받아 지녀야 할 계법도 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집안의 7중이 공동으로 받을 수 있는 계, 7중뿐만 아니라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존재라면 누구라도 받을 수 있는 보살계가 있다.
이들 계법은 그 계를 받은 사람의 신분이 무엇이냐에 따라 지켜야 하는 계법의 수와 내용이 달라지게 된다.
신도는 5계법만 받아 지키면 되지만, 비구는 250계법을 받아 지켜야 한다. 이와같이 신분에 따라 지켜야 할 계법의 수가 큰 차이를 보이게 되는 것이다.
또한 동일한 계법이라 할지라도 내용에 있어 엄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근본 4계인 살생계, 투도계, 음계, 망어계 중 음계를 예로 들어보자.
부처님의 재가 신도들에게는 삿된 음행만을 금하였지만, 출가승려의 경우에는 전단음욕, 음욕을 완전히 끊으라고 하셨다.
이와같이 계법은 받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지켜야 할 계의 수가 다르고, 하나하나의 내용도 조금씩 다르게 제정되어 있는 것이다.
계체는 ‘계를 전수하는 승가의 작법에 의지하여 수계자가 마음속에 받아들인 법체이며, 그릇됨을 막고 나쁜 일을 그치게 하는 능력을 가진 계의 체성’이다. 이 정의를 조금 쉽게 풀어보도록 하자.
수계식을 할 때 율사스님은 한 조목의 계를 설한 다음, “능히 지키겠느냐? 말겠느냐?” 하고 묻는다. 이때 계를 받는 이는 ‘능지’라고 대답한다.
능지! ‘능히 지키겠습니다.’ 하는 것은 마음속 깊이 받아들여 진정으로 지키겠다는 맹세이다. 결코 건성으로 또는 형식적으로 ‘능지’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올바로 지키겠다는 강한 결심이 능지라는 말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키겠습니다. 지키겠습니다…” 할 때마다 그 하나하나의 계에 대한 계체가 수계자의 마음속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계체만은 누가 만들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계를 받는 사람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직 자기의 의지에 의해서만 계체가 생겨날 수 있으므로, 계를 설하고 받는 이 의식을 설계식이라 하지 않고 수계식이라 하는 것이다.
곧 계체는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계법을 마음으로 전하여 받는 것을 가리킨다. 이 계체야말로 마음의 문제이며, 부처님의 계법을 꼭 지켜야 되겠다고 하는 마음을 가졌을 때 비로소 계체가 생겨나게 된다.
그러므로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하는 의지가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들어갔을 때, 모든 계법이 계를 받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올바로 발현되는 것이다.
옛날에는 이 계체를 ‘무표’라고 번역하였다. 그 모양이 없고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표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계법, 계체, 계행, 계상 가운데 이 계체를 설명하기가 가장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렵다고들 한다.
그러나 계를 받을 때 간절한 마음으로 “나는 반드시 이 계를 지키겠다.”고 하면 계체를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계를 받고도 계체를 성취하지 않으면 그 계는 올바로 받은 것이 될 수 없다.
수계자가 받은 그 계법을 마음으로 받아 들여서 계체를 이루게 될 때 참된 불자가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스스로 그릇됨을 막고 나쁜 일을 그치게 하는 능력이 생겨나서 해탈의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참 정신을 발현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계행과 계상
계행은 받은 계를 낱낱이 행동으로 나타내어 계법의 조목에 따라 이를 실천 수행하는 것이다. 이미 수계하여 생겨난 계체에 의지하여 몸과 말과 뜻의 삼업으로 법답게 계법을 실천하는 것을 계행이라고 한다.
그리고 계상은 현실 속에서 계법을 실천으로 옮겨갈 때, 상황에 따라 적용시키게 되는 여러가지 세세한 차별상을 가리킨다. 비구 250계라고 하면, 그 250계 하나하나마다에 지범개차가 있다. 그 하나하나의 계에 대해 지키고 범하고 열고 막아야 할 경우가 있으며, 그것을 적절히 실행하는 것이 바로 계상인 것이다.
이 계상에 의해 모든 계법은 얼마든지 융통성을 가질 수 있다.
‘망어계’를 예로 들어보자. 망어계는 망어를 짓지 않는 것을 근본으로 하지만, 계상에 의하면 때에 따라 망어계를 열어서 거짓말을 할 수도 있고, 망어계를 닫아서 절대로 허튼소리를 하지 않기도 하는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보자.
망어계라고 하면 흔히 망어 하나로 통용되지만, 그 속에는 소망어가 있고 대망어가 있고 여망어가 있다.
소망어는 스스로의 이익 또는 습관성에 의해 아닌 것을 그렇다고 하거나 맞는 것을 아니라고 하는 소소한 거짓말을 가리키며, 대망어는 많은 사람의 공경을 받기 위해 ‘나는 부처의 후신이다.’, ‘나는 보살의 후신이다.’라고 하면서 성인을 자칭하는 거짓말이다. 따라서 대망어는 절대로 범하지 말아야 한다.
요즈음의 신흥종교 교주들 중에는 자칭 하느님이요, 성인의 특사라고 하면서 대망어를 짓는 무리들을 종종 볼 수 있지만, 불교에서는 이와같은 대망어를 짓게 되면 불자로서의 자격이 박탈됨과 동시에 불문 밖으로 쫓아내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소망어를 지으면 참회로써 그 죄를 면할 수가 있다.
그런데 여망어는 대망어도 소망어도 아닌 여유있는 망어이다. 방편으로 거짓말을 살짝 함으로써 더 좋은 일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 여망어이다. 포수에게 쫓겨 뛰어가는 사슴을 보았지만, 포수에게 사슴이 간 반대쪽을 가르쳐주는 거짓말이 바로 여망어인 것이다.
자비구제, 남을 구하기 위하여 자비심으로 짓는 이 여망어를 하지 못하게 한다면 계율은 참으로 살아있는 계율이 될 수가 없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에는 망어계를 열어서 기꺼이 범할 줄 알아야 한다.
대망어는 절대적으로 지키고 소망어는 범하였으면 참회하며, 자비구제를 위한 여망어는 기꺼이 범할 줄 아는 도리가 계상인 것이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옛날 어느 마을에 가난한 선비가 살고 있었다. 그 선비는 거의 매일같이 마을 뒷산의 절에 올라가서 법문도 듣고 스님과 글도 짓고 이야기도 나누며 소일하였다. 그러다가 공양 때가 되면 밥 한술을 얻어먹고 집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요즈음 같으면 한끼 식사를 대수롭게 않게 생각하지만, 그 당시에는 밥 한 그릇만을 얻어도 신세를 많이 졌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으므로 선비는 언제나 스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어느날 장에 나갔던 선비는 마침 물건을 사러 온 스님을 만났다.
스님을 본 선비는 너무 반가웠고, ‘스님이 내려오셨을 한끼 식사라도 대접해야지.’ 하며 집으로 모시고 갔다. 그리고는 아내를 따로 불러 말했다.
“여보, 저분이 내가 항상 폐를 끼쳤던 웃절의 고마우신 스님이오. 혹 대접할 것이 없겠소?”
“글쎄요? 밀이 한 주먹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그럿으로라도 어떻게 해보구려.”
비록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이었으나 부인은 정성을 다해 밀국수를 만들었다. 그리고 맛이 좋으라고 새우젓도 조금 넣고 파와 마늘도 썰어서 넣었다. 국수가 완성되자 남편 그릇에는 국물을 많이 넣고 스님 그릇에는 국수를 많이 넣은 다음 상을 차려 들고 갔다.
그러나 스님은 파, 마늘 냄새가 싫었다. 거기에다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어보니 새우젓 맛까지 나는 것이었다.
“처사님, 저는 먹지 못하겠습니다.”
“입에 맞지 않더라도 조금만 드시지요?”
“어찌 중이 파, 마늘을 먹을 수 있겠소?”
그리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가버리는 것이었다. 마음이 좋을 까닭이 없은 선비는 혼자 투덜거렸다.
“저분은 천생 중 노릇밖에 못해 먹겠다. 저 옹고집으로 어떻게 중생을 교화할까? 남의 정성도 헤아릴 줄 알고 중생을 위해 동사섭도 할 줄 알아야지. 사람이 저렇게 막혀서야…”
선비는 신심이 뚝 떨어져서 다시는 절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평범하나마 계상이 무엇인지를 잘 대변해주는 이야기이다. 선비 부부의 성의를 생각해서 스님이 파, 마늘을 한쪽으로 젖혀놓고 국수 건더기만이라도 먹었으면 되었을 것인데, 굳이 숟가락을 놓고 가버리면 누군들 좋아하겠는가?
이것은 계행을 올바로 지키는 것이 아니다. 계상에 의거하여 갖가지 차별상에 맞게 방편으로 따라줄 수도 있는 것이다.
계율을 위한 계율, 그것은 참된 지계정신이 아닐 수도 있다. 부처님께서는 계율을 참된 해탈법이 될 수 있게끔 하기 위하여 계법, 계체, 계행과 함께 계상을 설하신 것이다.
불자들은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계법을 마음 깊이 새겨서 계체를 만든 다음 계행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그리고 중생구제를 위해서는 계상의 문을 잘 여닫을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계율은 진정한 해탈의 법이 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계율의 의미 및 근본 계율인 삼귀의계와 5계에 대해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日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