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無我)의 수행(修行) V

수식관(數息觀), 육묘문(六妙門)

그 다음은 수식관(數息觀)입니다.

앞서 말씀한대로, 우리가 실상묘법(實相妙法)이나 또는 부처님을 생각 하면서, 염불도 하고 참선도 하고 그러한 일승수행법(一乘修行法), 조금도 방편설(方便說)이 아닌 일승수행법을 하면 되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해서 공부가 잘 안될 때는 업장이 무거운 소치이므로, 아까 말씀한 부정관이나 이런 관법을 좀 하는 것입니다. 내나야 업장이 무거운 시초가 결국은 나 때문에 있으니까 말입니다. 아(我)에서 녹아지면, 그때는 업장은 수수께끼처럼 풀려가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부정관과 동시에 호흡관(呼吸觀)이라, 산란스러운 것이 또 큰 병이니까 산란심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호흡관을 말씀하셨습니다.

아까, 쉬는 시간에 어느 보살님이 올라 와서 “산란스러워서 공부가 안됩니다” 고 말씀합니다. 산란심(散亂心)이 없으면 도인(道人)입니다. 일념불생 즉명위불(一念不生 卽名爲佛)이라, 일념도 다른 생각이 안 나오면은 그때는 도인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욕계산지(欲界散地)인지라, 욕계의 산란중생이니까, 산란심이 나오기 마련인 것입니다. 따라서, 산란심이 많을 때는 호흡관을 주로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호흡관(呼吸觀)을 육묘문(六妙門)이라,
여섯 가지로 구분해서 말씀한 법문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경(經)으로서, 호흡만 가르치는 경이 있어 굉장히 번쇄(煩쇄)합니다마는, 그것을 다 소개할 수 없고 다만 간략하니 여섯 가지로 해서 호흡하는 방법을 말씀한 것이 육묘문입니다.

처음에는 수식문(數息門)이라, 숨을 헤아리는 방법입니다.

지금 호흡을 가르치는 어떤 분들은 하나부터 백까지로 하기도 합니다만, 우리 부처님 법문 가운데 수식(數息)하는 법은 그렇게는 안 되어 있습니다. 수를 너무 많이 헤아리면 도리어 그 놈 헤아리는 가운데 잊어 버리기도 하고 산란스러우니까, 많이는 않고서 그냥 하나에서 열까지만 되풀이 합니다. 자기 호흡에 맞추어서 열까지 세고, 다시 또 하나부터서 열을 세고 자꾸만 되풀이 합니다.
이렇게 하는 가운데 숫자에 따라 우리 마음이 모아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자연적으로 호흡도 가지런하니 되어 옵니다. 이같이 자기 호흡과 맞추어 수를 헤아려서 마음을 안정하는 법입니다.

그 다음은 수문(隨門)이라,
숨을 헤아린다고 하면, 그때는 ‘하나구나, 둘이구나’ 하는 관념을 두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그런 관념을 두면 생각하는 그것이 또 산란스럽단 말입니다. 생각을 않고서 그냥 하나, 둘 못 세어갑니다. 곧 관(觀)을, 생각을 두어야 만이 셋이고 넷이고 헤아리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때는 수(數)를 놓아버리고, 수를 헤아리지 않고서 그냥 숨 쉬는대로, 숨 나가는대로 생각만 합니다. ‘아, 숨이 나가는구나, 숨이 들어오는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것이 따를 수자 수문(隨門)입니다. 자기 숨 닿는 데에 따라서 편안히 보면서 다만, 우리 마음을 숨에다만 관심을 두고 의식만 한다는 말입니다.

숫자를 헤아리면 헤아리는 그것 때문에 마음으로 분산(分散)이 생기니까, 숨 따라서 숨이 가는데다 의식만 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문(隨門) 입니다.

그 다음이 지문(止門)이라,
수문으로 해서 공부가, 마음이 좀 모아지겠지요, 그러나 또 한 가지 병은 마음이 숨에다 관심을 두니까 그것도 역시 하나의 집착(執着)이 안되겠습니까, 바로 그때는 ‘숨 쉬든가 말든가’ 가만 두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래서, 숨을 딱 정지를 시킨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지문(止門)입니다.

그러나, 호흡이 산란스러운 것이 약간 제거(除去)가 안 되면, 그때는 숨 그치는 것은 좋지 않은 것입니다. 마음이 안정이 되고, 호흡이 어느 정도 그야말로 참, 스스로 호흡을 의식하지 않을 정도가 되어야 호흡과 마음을 딱 머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접때 말씀한대로, 우리 마음의 산란스러운 정도와 호흡은 같이 상응(相應)하여 정비례(正比例)합니다. 마음이 산란스러우면 따라서 호흡도 산란스럽고 또는 그 반대로 호흡이 정화(淨化)되면 마음도 정화됩니다. 따라서, 마음공부만, 참선이나 염불만, 오로지 하면 자연적으로 호흡도 정화됩니다. 그 반대로 호흡을 다스리면 마음도 역시 정화됩니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 이런 법문을 이렇게 제시(提示)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불교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마음이 주인인 관계상, 마음을 주로하는 데에다 역점(力點)을 두고서 호흡을 곁들이면 되는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정도(正道)가 되는 것이고 외도(外道)가 안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호흡을 딱 멈출 정도가 되면 그때는 몸에서 이상한 기운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호흡이 거치러우니까 우리한테 잠재해 있는 무한한 힘이 안 나오는데, 호흡만 끊어질 정도가 되면 그때는 우리한테 갖추어 있는 무한한 힘 곧, 불성(佛性)의 힘, 불심(佛心)이 조금씩 솟아오는 것입니다. 그때는 환희심(歡喜心)도 충만하고 말입니다.

그러면, 중생이 거기에 또 집착해버립니다. 관세음보살이 보이기도 하고, 훤히 광명이 보이기도 하면 ‘좋다’ 하고 거기에 딱 그때는 박혀버립니다. 이렇게 집착하면 또 역시 공부가 안나가지고 해탈(解脫)로 못 갑니다.

내 스스로가 천지우주와 하나가 되어버리는 그때까지는 내나야 모두가 하나의 과정에 불과합니다. 석가모니가 앞에 보이건, 관음 보살이 보이건 아직 그것은 끄트머리가 아니라 과정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거기에 착(着)하면 안됩니다. 어떤 것에 밀착(密着)되고 거기 다 맛붙여서 착(着)할까 봐서, 지문(止門) 다음에,

관문(觀門)이라, 법을 관찰한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이 제시한 실상관(實相觀)이나 법계관(法界觀)이나 여러 가지 법문에 따라 관법(觀法)을 제시합니다. 그런 관법으로써 집착하는 그 다음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관법을 하다 보면, 관법을 무슨 대상적(對象的)으로 법(法)이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내나야 모두가 바로 보면 ‘그 자체가 없는 하나의 법상’ 인 것인데, ‘내가 있고 법이 있다’ 고 생각합니다.

가사, 부처님 법문으로써 하나의 심월관(心月觀)이라,
‘내 눈 앞에 이렇게 심월(心月)이 있다’ 이렇게 관찰하라고 하면 실은, 심월 그것도 역시 내 마음과 둘이 아닌 것인데, 하다 보면 심월이란 그런 달이 밖에 따로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나와 너를 구분해서 본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곤란스럽습니다. 때문에,

다음은 환문(還門)이라,
그때는 회광반조(廻光返照)라,
다시 관찰하는 대상을 떠나서 돌이켜 자기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내 나야 그런 법도 내 자성(自性)의 한 가지 광명이구나’ 이렇게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정문(淨門)이라,
우리 중생은 아직 도를 못 깨달으면은 또 자타(自他)가 없다는 데에, 너도 없고 나도 없다는 그런 것에 또 집착하는 것입니다. 원래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해서 그야말로 어떻게 말로 할 수 없는 것인데, 어느 문자(文字)나 어느 법(法)에 집착합니다. ‘내가 없다. 너일리가 없다’ 하는 ‘없다는 것’ 에 말입니다.

대상도 없고 나도 없다는 그런 ‘없다는 것’ 에 착(着)하는 그런 마음을 없애고, 즉 말하자면 무능소(無能所)라, 능소가 없는 아주 그야말로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자리를 얻기 위해서 이제, 환문(還門)지나서 정문(淨門)에 온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성불로 간다는 것이 육묘문(六妙門)의 법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처음엔 호흡을 헤아리는 데서(數息門), 그 다음엔 호흡을 헤아리지 않고서 숨 쉬는데로 내버려 두고 거기에다 의식만 붙이는 수문(隨門), 그 다음은 호흡을 딱 정지하는 지문(止門), 다음은 어느 법을 관찰하는 관문(觀門), 그 다음은 다시 마음을 되비쳐서 관찰하는 환문(還門), 그 다음은 이것도 저것도 다 떠나서, 그야말로 조금도 차별도 없고, 능소도 없고, 분별시비를 떠나버린 그런 문이 이제 정문(淨門)인 셈이지요.

그러나, 이같이 복잡한 것을 많이 나열시켰습니다마는, 정통 대승(大乘)공부는, 저번에 말씀한 바와 같이 최상승선(最上乘禪)이라, 본래시불(本來是佛) 곧, 본래 부처요, 본래 우리 자성(自性)에는 번뇌가 없고 무량공덕을 갖추고 있는 그 자리, 한도 끝도 없는 신비(神秘) 부사의(不思義)한 공덕이 갖추어 있는 그 자리를 우리가 바로 보고 바로 깨달아야 할 것인데, 그렇게 못할 적에, 그런 공부가 안될 때에 잠시간 이와 같이 하는 것이지, 이것으로서 항시(恒時)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호흡(呼吸)을 심, 장, 세, 균(深, 長, 細, 均)케 하여 즉, 호흡을 깊게하고, 짧지않고 길게, 거칠지 않고 세밀하게 그리고 고르게 하여서 지식(止息)에 도인(導引)하여 이끌고 번뇌를 멸진(滅盡)하는데 호흡법이 필요한 것이요, 다만 우리가 항시 할 것은 무엇인고 하면, ‘내자성(自性)이 원래 부처요, 천지우주가 이대로 일체 공덕을 다 갖춘 부처뿐이구나!’ 이렇게 느껴서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화두나 염불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만 잘 안 될 때는 ‘아, 내가 아마 너무나 나한테, 나라는 것에 대해서 집착이 많구나’ 이런 때는 부정관에서와 같이 나를 좋아하는 생각, 너를 좋아하는 생각, 이것을 끝을 내야 하는 것입니다. 내나야 나를 좋아하는 생각, 이것을 끝을 내야 하는 것입니다. 내나야 나를 좋아하고 너를 좋아하고 너를 싫어하고 미워하고 그런 것 때문에 망상(妄想)이 생기니까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것은 임시 방편(方便)으로 제시한 것이지 참다운 행법(行法)은 최상승선(最上乘禪)자리입니다.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본래 번뇌가 없고 천지우주가 일체 공덕을 다 갖춘 부처뿐이구나!’ 이와 같이우리가 깨달은 셈치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 수행법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오늘 내일까지 용맹정진을 합니다.

달마(達磨)스님 말씀에 ‘초범증성(超凡證聖)이 목격비요(目擊非遙)라’ 범부를 넘어서 성자(聖者)가 되는 것이, 눈 깜짝할 동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도인(道人)을 어디서 꾸어가지고 오는 것도 아닌 것이고 우리가 볼래 성자(聖者)가 아닌 것도 아닙니다. 볼래 부처고 본래 성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한 생각 돌이켜서 그 생각 사무치면 벌써 그 자리가 깨달은 자리입니다.

‘초범증성이 목격비요라, 우리가 범부를 넘어서 성인되는것이 눈 깜짝 할 동안에 있거니, 어찌 애써서 우리가 이제 흰머리 날 때까지 수고로이 할 것인고’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생활 환경이 바뀌어져서 앉으시기도 괴로울 것입니다마는 아무튼, 오늘 내일 사이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하신 내일까지 눈 깜짝할 동안이 몇천번 있습니다. 하기 때문에 이제 그 동안에 꼭 대각(大覺)을 성취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만 마칩니다.

淸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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