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성품(性品) I

참선(參禪)은 증상심학(增上心學)

우리는 지금 참선을 하고 있습니다. 참선(僭禪)은 심학(心學)이라, 마음 배우는 것이 참선입니다.

그런데 마음, 이것이 가장 가깝고도 실은 가장 어려운 문제입니다.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마는 챙길려고 들면 챙기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우리는 안 죽어봐서 알 수 없습니다만, 죽어보면 그야말로 마음,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줄을 느낄 수가 있고, 몸과 마음의 비중(比重)도 역시, 몸은 별것도 아니고 마음이 주인이란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안 죽어봐서 그걸 확실히 모른다고 하지만 성자(聖者)들은 안 죽어본다 하더라도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기 때문에 마음과 몸의 비중을 압니다.

죽는 찰나에 몸은 자기 것이 아닙니다.

다만 마음성(心性)만 가지고 우리가 가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구정(舊正) 문제 가지고 ‘조상의 날이다 민속의 날이다’ 해서 어휘(語彙) 문제 가지고도 말이 많은 모양 같습니다만, 기독교를 믿는 분들은 그냥 “조상의 제사 모시는 것은 옳지 않다. 죽어지면 다 그만인 것인데 영혼을 위할 필요가 없다” 이런 말씀으로써 반대한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마는, 이것은 우리 인간이 죽어서 가는 영혼 세계를 잘 몰라서 그럽니다.

다만 몸은 영혼에 따른, 우리 마음에 따른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가사, 불교에서 말하는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이라, 부모한테서 낳기 전의 우리 본래 생명은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해 본다고 할 때에 한번 따질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현재는 우리가 부모한테서 태어나 이렇게 사람 모양이 되었습니다마는, 부모한테서 낳기 전의 그 생명은 대체로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할 때는 굉장히 깊은 문제입니다.

과연 우리 생(生)이란 것이 어디서 왔는가? 이 문제도 역시 그와 같은 문제 아니겠습니까.

죽어서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문제도 크지마는 우리 생(生)이 어디서 왔는가? 이 문제도 굉장히 큽니다.

그러나, 우리 안목은 제한되어 있어놔서 과거도 못 보고 미래도 못 봅니다.

천안통(天眼通)을 통한 안목으로만이 시간, 공간을 초월하여 비로소 과거도 보고 미래도 본다는 것입니다.

이런 도인들이 밝혀놓은 법문에 의하면, 우리가 부모한테 의지하기 전에는 무엇인고 하면, 이것은 하나의 영혼으로 해서 헤매는 영혼체(靈魂體)라는 것입니다.

사람 모양이 아니라, 사람 눈에는 볼 수 없는 그 무엇인, 요새 심령과학(心靈科學)에서 말하는 유체(幽體)라는 말입니다.

유체, 이것이 영혼과 더불어서 헤매고 있다가 부정 모혈(不精母血)이라, 아버지와 어머니의 연(緣)을 만나서, 그 기운 따라서, 거기에 딱 붙어 온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불교에 있어서는 아주 세밀히 풀이가 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 영혼도 역시 사람으로 살다가 죽었겠지요.

또는 개나 돼지나 그런 것으로 있다가 죽었겠지요.

그런 영혼이 헤매다가 가사, 부모되는 내외간이 만나서 기운이 결합되면은 그 기운 따라서, 영혼체가 멀리서 보고 있다가 거기에 온다는 것입니다.

사람 몸뚱이가 아닌 그윽한 몸인 영혼체는 제아무리 멀리까지도 다 아는 것입니다.

가사, 미국에서 헤매는 영혼이라 하더라도 한국에서 자기 부모 될만한 사람이 딱 결합하면 그때 그것을 보고서 안다는 것입니다.

귀신들은 잘은 못 통해도 천안통(天眼通)을 통하는 것이기에 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모 연(緣) 따라 자기한테 인연이 맞으면 거기에 딱 들어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서, 맨 시초는 인간의 눈에는 볼 수 없는 오직 하나의 점(點)입니다.

눈이 예쁘네 코가 예쁘네 지금은 하지마는, 맨 처음에 부모한테 붙어올 때는 하나의 점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어머니 태중(胎中)에서 여러 가지로 영양을 섭취해서 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되어서 자라났다가 죽어지면 또 무엇이 남습니까.

죽어지면 몸 그것은 실은,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제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도 죽어진 송장은 싫어합니다.

썩은 송장이 있는 방에 누가 잘 들어가려고 합니까.

오직 남는 것은 그 마음, 영혼만 남습니다.

영혼만 남아도, 그 놈이 또 역시 헤매다가 자기한테 알맞는 인연이 있으면 또 그리로 붙어가는 것입니다.

금생에 쓰는 마음씨가 개같은 마음을 써놓으면 개의 태중에 들어가서 개가 되고 또 소같은 마음을 써놓으면 소의 태중에 들어가서 소로 태생하는 것입니다.

이런 윤회(輪廻)는 사실인 것입니다.

불교에서 ‘악(惡)을 행하면 안 된다 좋은 일을 많이 해라’ 하고 권선징악(勸善懲惡)하는 것은 하나의 방편설(方便說)이 아니라 사실인 것입니다.

몇 천번, 몇 만번 그와 같이 서로 사람도 되었다가 이렇게 뱅뱅 윤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가 마음 따라서 그럽니다.

마음 잘못 쓰기에 차근차근 윤락(淪落)되었다가 또 조금 잘 쓰면 초승(超昇) 했다가, 그런단 말 입니다.

이렇게 마음은 중요한 것입니다.

마음 잘못 쓰면 마음같이 더러운 것이 없습니다.

굉장히 비겁합니다.

또 마음 잘 쓰면 마음같이 고결(高潔)하고 고상(高尙) 한것이 없습니다.

어떻게 마음 쓰는가? 그 마음을 가장 잘 쓰는 법, 이것이 참선입니다.

마음을 가장 잘 써서, 마음의 가장 본질, 본바탕이 되는 마음에 딱 들어가면 그것이 성불입니다.

우리같은 사람도 스님네가 될 때에 맨 시초부터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또는 ‘마음이 곧 부처다’ 이런 말을 항시 들었지요.

그러나 몇 년간 세월이 흘러도 당초(當初)에 그것이 납득이 안 가는 것입니다.

아, 분명히 이렇게 물질뿐인 것인데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일체 만물은 마음으로 되었다는 그것이 납득이 갈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물리학도 배우고 무엇도 배우고 해놓으니까, 그런 것이 머리에 들어가지고서 당초에 일체유심조라는, ‘모두가 마음뿐이라’ 는 생각이 우리 마음에, 우리 머리에 안 들어옵니다.

물질만 사실 같고 마음은 그냥 물질에 따르는 한 가지 반영체나 그림자나 같단 말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서 ‘마음이 무엇인가’ 를 조금씩 음미해 보니까 차근차근 그때는 일체유심조라, 일체가 마음 뿐이라는 그 말씀이 조금씩 납득이 오는 것입니다.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씀에도 ‘부처란 것은 소중한 것인데, 천지 우주의 절대적인 것이 부처인 것인데, 나 같은 이런 마음이 어떻게 부처가 되랴’ ‘남을 미워도 하고 사랑도 하는 이런 아니꼬운 마음, 이것이 무슨 부처가 되랴’ 이렇게 생각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마음이 바로 부처입니다.

이러한 것을 여실(如實)히 아는 것이 불교인 동시에, 이러한 것에 가장 가까운 길, 가장 가깝고도 군더더기나 찌꺼기를 다 버려버린 가장 정수(精髓)가 참선이라 하는 심학(心學)입니다.

참선(參禪), 이것은 증상심학(增上心學)입니다.

淸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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