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오후수(先俉後修)
참선이란 선오후수(先梧後修)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이것을 잘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선오후수라, 먼저 개념적으로 깨달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실상관(實相觀)이 우리 마음에 확연히 박혀야 합니다.
‘다만 내가 업장에 가리워서 모를뿐, 내 본바탕, 천지우주 바탕은 실상묘유(實相妙有)요 진공묘유(眞空妙有)다. 이것은 색즉공(色卽空)이다. 변증적인 표현으로는 공, 가, 중(空假中)이다. 인격적인 표현은 법, 보, 화(法寶化) 삼신(三身) 아미타불이다. 또는 이러한 생명의 활력이 관세음보살이다’ 이와 같이 파악을 해버려야 합니다.
그래가지고 공부를 해야 만이 백천만겁구습결업이, 백천만겁 동안 쌓이고 쌓인 그런 업장이라 하더라도 즉시 다 소멸한다는 말입니다.
보조(普照知訥) 1158-1210)국사의 보조법어(普照法語)에도 있는 말씀이고 규봉 종밀(圭峰宗密 780-841) 스님의 저서나 육조단경(六祖壇經)에도 있는 말씀입니다마는 ‘일상삼매, 일행삼매(一相三昧, 一行三昧)’라, 삼매(三昧)라는 것은 우리 마음을 정심에다가 안주(安住)시키는 것이 삼매인데 일상삼매(一相三昧)는 무엇인고 하면, 천지우주가 오직 하나의 상, 오직 절대의 상, 이것이 일상삼매입니다.
천지우주는 오직 하나의 상 뿐이요 둘이지 않습니다.
법성게(法性偈)에서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이라’ 법성(法性)과 똑같은 뜻입니다.
법성은 다 원융해서 두 상이 없다는 뜻입니다.
천지우주는 오직 진리의 한 덩어리입니다.
다만 중생은 이것을 둘로 보고 셋으로 보고 구분할 뿐입니다.
이러한 법성(法性), 불성(佛性)에다 마음을 안주해 두어야 만이 우리 마음이 불성과 계합(契合)됩니다.
천지우주의 본바탕인 불성이 오직 하나이거니, 우리가 둘이나 셋으로 자꾸만 분별해서 보고, 다만 공(空)도 아니고 의심하는 것만도 아닌데, 공만 들이 보아 쌓고 의심만 들이하면 그때는, 우리 마음이 모든 진리를 다 원만하고 조화롭게 갖추고 있는 불성과 계합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일상삼매란 천지우주를 오로지 하나의 덩어리로 본다는 말입니다.
실상관(實相觀)은 천지우주를 하나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로 보거니 어떻게 내가 있고 네가 있겠습니까, 둘로 볼 때에 벌써 거기에서 죄가 발생합니다.
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천지우주가 하나의 부처인데 둘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분열(分裂)입니다.
제아무리 좋은 제도가 생기고, 제아무리 철학적인 어떠한 교설(敎說)이 생긴다 하더라도 진리의 본체를 둘로 보는 한(限)에는, 이런 인류 문화는 참다운 평화를 구가(謳歌)할 수가 없습니다.
본래 하나의 진리인데 둘로 보고 셋으로 보면 어떻게 우리 인류가 평화스럽게 되겠습니까, 일상삼매는 말씀마따나, 모든 존재의 뿌리를, 모든 존재를 하나로 보는 삼매라는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진공묘유(眞空妙有)로 본다는 말입니다.
또는 무량광명(無量光明)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아미타불의 풀이는 무량광불(無量光佛)이고 무량수불(無量壽佛)이고 또는 청정광불(淸淨光佛)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로 보는 견해, 천지우주를 하나의 덩어리로 보는 그런 견해를 안 끊히고 사뭇 이어가는 것이 일행삼매(一行三昧)입니다.
천지우주를 한 덩어리로 보는 견해인 일상삼매(一相三昧)를 안 끊히고 사뭇 이어가는 것이 일행삼매(一行三昧)입니다.
천지우주를 한 덩어리로 보는 그 견해는 일상삼매이고, 이러한 것을 간단(間斷)이 없이 계속하는 염념상속(念念相續)이라, 앞생각 뒷생각에 딴 잡된 생각이 안 끼이도록까지 사뭇 이어가는 것이 일행삼매입니다.
일상삼매, 일행삼매를 해야 만이 참다운 선(禪)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좀 어렵지만 꼭 일상삼매를 우리 생명과 같이 중요시해서 마음에다가 심어두셔야 합니다.
부처님 법문에 ‘심불상속고 부득결정신(心不相續故 不得決定信)이라’ 우리가 딱 믿어서 후퇴없는 믿음이 필요한데, 그것에 결정신(決定信)인데, 우리가 어째서 결정코 변하지 않는 믿음인 결정신을 못 두는가 하면, 우리 마음이 자꾸만 간단(間斷)하기 때문입니다.
끊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심불상속고라, 마음이 상속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일상삼매를 관하는 즉, 천지우주를 하나의 부처로 보는 견해를 계속시키지 못하니까 우리한테 결정신앙심이 안 생긴다는 말입니다.
淸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