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양(興陽)의 청양(淸讓)스님께 여쭈었다. “대통지승불은 십겁(十劫)이라는 오랜 세월을 도량에서 좌선했지만 불법(佛法)이 나타나지 않아 불도(佛道)를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도대체 무슨 의미입니까?”
그러자 청양스님이 대답하셨다.
“그 질문이 제법 이치에 맞구나.”
그 스님은 거듭 여쭈었다.
“이미 그렇게 도량에서 좌선을 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불도를 이루지 못했는지요?”
청양스님이 대답하셨다.
“그가 성불하지 않았으니까 그렇지.”
다만 늙은 부처가 지혜로써 아는 것은 인정하지만, 알음알이로써 이해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범부도 지혜를 얻으면 바로 성인이라 하고, 성인이라도 분별심을 내면 바로 범부인 것이다.
대통지승불의 이야기는 <법화경> 화성유품(化城喩品)에 근거한다. 참선은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이지 몸을 훈련시키는 공부가 아니다.
수레를 끄는 소가 잘 끌지 못하면 ‘소를 때려야 하느냐 수레를 때려야 하느냐’ 하는 말이 있다. 수레에 매질해서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외형의 좌선을 고집하다보면 평생을 해도 깨치지 못한다.
끽반운작(喫飯運作) 중에서도 선(禪)이 되어야 하며 마음공부가 순숙(順熟)해지면 직심시도량(直心是道場)이요, 운시급수(運柴汲水)가 모두 선(禪)이 되었을 때 활선(活禪)이라 할 수 있다.
대통이란 바로 자기자신이니, 어디서나 만법의 무성(無性)과 무상(無相)을 통달하는 것을 말한다. 지승이란 일체의 모든 곳에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음을 의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부처란 청정하고 밝은 마음이 시방법계를 사무쳐 비추는 것을 이름한다. ‘10겁 동안’ 하는 것은 10바라밀을 닦은 것이다. ‘나타나지 않았다’ 하는 것은 부처는 본래 나지 않고(佛本不生), 법은 본래 없어지지 않는 것(法本不滅)을 뜻한다.
‘이루지 못했다’ 하는 것은 부처가 다시 부처가 되지는 않는다(佛不能更作佛)는 뜻이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이르기를 ‘부처는 항상 세간에 계시면서도 세간법에 물들지 않는다’ 하셨다.
수증일여(修證一如)라! 불도를 이루려는 마음 또한 번뇌임을 자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