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먼저 「보살영락본업경소」 서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중도(二諦中道)는 곧 건너갈 길이 없는 나루며,
현묘하고 현묘한 법문(法門)은 더욱 들어갈 문이 없는 진리이다.
갈만한 길이 없기 때문에 유심(有心)으로 행할 수 없고,
들어갈 만한 문이 없기에 유행(有行)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대해에는 나루가 없지만 노를 저어 능히 건널 수가 있고,
허공에는 사다리가 없지만 날개 치며 높이 나를 수 있다.
이로써 알라.
길이 없는 길은 곧 길 아님이 없고,
문이 없는 문이 곧 문 아님이 없음을.
문 아님이 없기에 일마다 현묘한 곳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고
길 아님이 없기에 곳곳이 모두 근원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근원으로 돌아가는 길은 매우 평탄하나 능히 가는 사람이 없고
현묘한 곳으로 들어가는 문 매우 태연하지만(크지만) 능히 들어가는 사람 없다.
진실로 세간의 학자가 유(有)에 집착하고 무(無)에 막혔기 때문이다.
유상(有相)에 집착하는 자는
기다림이 있는 위태한 몸을 가지고, 한없는 법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끝없이 재촉하여 그침이 없고, 명예를 쫓아 길이 유전(流轉)하며,
공무(空無)에 막힌 사람은,
무지한 어두운 생각을 믿고 깨우쳐 나갈 교문(敎門)을 등지며,
몽롱하게 취하여 깨우침이 없고, 머리를 흔들며 배우지 않는다.
…(하략)
원효는 절실한 인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원효는 인간을 기다림이 있는 위험한 몸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한끼만 안먹어도 위험해지는 몸입니다. 또한 기껏해야 70∼80년밖에 못사는 몸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끝없이 천년만년 살 것처럼 명예를 좇아 끝없이 떠내려가는 것이 유론(有論)에 빠진 사람의 특징입니다.
이 세상에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는 유론에 집착하는 이들이 유독 많습니다. 즉 신이 있다, 아트만이 있다, 계가 있다, 윤리가 있다고 믿으며 있다는데 집착하는 것입니다. 혹은 허무론에 빠져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허무에 빠진 사람들은 몽롱하게 자신의 염세주의에 취해 깨어날줄 몰라 공부하질 않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이야기하면서도 문학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원효의 또하나의 묘미이기도 합니다.
원효의 대승계는 간략하게 삼취중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섭율의계(攝律儀戒), 섭정법계(攝正法戒), 섭중생계(攝衆生戒)가 있습니다.
섭율의계는 쉽게 말하면 여러 가지 하지 말라고 정해진 것을 지키는 것이고, 여기에서 보다 더 적극적으로 좋은 일을 하라는 것이 섭정법계입니다. 소승계는 이것도 하지말고, 저것도 하지말라고 하지만 대승계는 조금 실수하고 약간은 문제가 있더라도 적극적으로 하는 것을 요구합니다.
원효는 이 삼취계를 문(門)으로 설명합니다. 문에는 여러 뜻이 있습니다.
문에는 먼저 출입의 뜻이 있습니다. 섭율의계와 섭정법계는 자리의 계이기 때문에 들어간다는 뜻이 되고, 섭중생계는 이타행이기 때문에 나간다는 뜻이 됩니다. 이는 자리와 이타를 동시에 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하나는 닫고 여는[開閉] 의미입니다. 만약 도적이 집안으로 들어와 집안의 재물을 빼앗아 가고자 할 경우에는 문을 닫아야 하지만, 좋은 친구가 찾아오면 문을 활짝 열고 술통도 활짝 열어야 하는 것이죠. 마음도 닫을 때는 닫고, 열 때는 열어야 합니다.
닫고 여는 원리는 단순히 계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삶에서 응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원효는 모범생이 아닙니다. 작은 규율은 어겨도, 남들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일을 하라며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합니다.
원효는 작은 규율을 지킨다고 다른 이들과 더불어 좋은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오직 자리행만 있을 뿐 이타행이 없는 까닭에 무상보리(無上菩提)의 풍부한 열매를 얻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계의 의미는 악업을 방지하는 구실과 함께 선행의 적극적인 실천까지를 포함합니다. 단순히 금계(禁戒)를 뛰어넘어 참고 노력하며, 나쁜 짓 하지 않는 것 못지않게 좋은 일을 하는 것이 더욱 소중합니다.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 살면서 세속에 물들지 않고 세파에 휘말리지 않기란 어렵습니다. 어떻게 하면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옳고 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요? 이를 넘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나쁘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원효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삿됨과 바름, 죄와 복을 가늠하기란 어렵다. 내심은 바르지 못한데도 겉모습은 바른 듯이 보이는 경우가 있고, 드러난 짓은 물든 것 같지만 속마음은 깨끗한 경우도 있다. 어떤 행위는 작은 복에 맞아도 오히려 큰 우환을 초래하는 수 있고, 생각과 행동이 깊고 원대한 듯하면서도, 천박하고 근시안적인 것에도 어긋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우리는 무엇이 복된 행위이며 무엇이 바르지 못한 것인가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하며 행동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성품이 곧고 바르지 못한 사람들은 흔히 옳지 않은 계를 유별나게 지킵니다. 또 이들은 거짓이 많아서 사람들을 속이고 현혹합니다. 그리하여 안으로 자신의 양심을 해칠 뿐아니라 밖으로는 여러 사람들을 혼란케 합니다. 성품이 소박하고 바르지 않아서 사되게 총명하고 아만으로 道心이 엷은 사람은 언제나 의심하고 진리를 비방할 뿐,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 한마디로 콩인지 보리인지도 구분하지 못하는 숙맥들은 착한 것이 왜 착한 것인지, 나쁜 것이 왜 나쁜 것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말을 새겨서 들을줄 모르고 말귀에만 집착하는 교조주의자들 역시 천박한 무리에 속합니다. 이들은 자신을 낮추고 남을 칭찬하면 반드시 복이되고, 스스로 찬양하고 남을 비방하면 반드시 죄가 된다고 믿어 오직 말귀만 따라서 고지식하게 이해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의 죄를 버리려다가 도리어 세가지 복을 한꺼번에 버리는 꼴입니다.
보살계는 사람들을 저쪽 언덕으로 실어다 줄 배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계는 고정불변의 모습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계는 스스로 생기거나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많은 인연을 의탁해서 생겨납니다. 이 때문에 계 스스로의 모습이란 없습니다. 계에는 자상(自相)이 없어서 다른 인연에 의지하기 때문에 인연이 있다고 합니다. 계상(戒相)의 있고 없음에 집착하면 진실로 계를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뭇인연에 의탁해서 생겨나는 계를 어떤 고정불변의 계상이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해서, 만약 어떤 사람이 계란 도무지 없는 법이라고 허무적으로 부정해 버린다면, 이 사람은 영원히 계를 잃는 결과를 빚게 됩니다. 원효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뭇인연과 어울려 이름 빌려 업이라고 한다. 방일하여 부끄러워 하지도 않고 업의 실상을 생각할 수도 없는 이는, 비록 죄의 성품이 없더라도 장차 지옥에 빠질 것이다. 마치 마법의 호랑이가 마법사를 삼키듯이. 이러기에 모든 부처님께 깊이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내어서 참회하라.
이와 반대로 계가 있다고 집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계가 없지 아니함에 의지하여 계나 죄의 어떤 틀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사람은 능히 계를 지키지만, 지키는 것이 범하는 꼴이 됩니다. 그래서 원효는 “계상(戒相)에 머무르지 않기에 계바라밀을 갖춘다”고 강조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지켜야할 윤리와 도덕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윤리 도덕은 여러 상황이나 조건에 의해서 생겨납니다. 그러기에 그 어떤 윤리도 집착하거나 매달려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바로 원효가 말한 부주계상(不住戒相)의 의미입니다.
원효는 자신의 삶에서 어떻게 계상에 머물지 않음으로서 계바라밀을 갖추고자 노력했을까요.
원효 자신이 실제로 재가와 출가의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환속해서 세속에 살되, 세속에만 물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무책임하게 가족들을 돌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원효가 마지막에 혈사에서 입적했을 때 그곳이 바로 설총의 바로 옆집이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원효는 절에서 마지막까지 남아있었습니다.
「금강삼매경론」에는 출가와 재가의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대목은 원효의 출가와 환속을 이해하는데 많은 참고가 됩니다.
원효는 “경전에서 비록 출가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재가에 머무르지 않는다[雖不出家 不住在家故]고 한 것은 도속이변(道俗二邊)의 상에 떨어지지 않기에 변을 떠나는 훌륭한 이익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그는 “비록 법안(法眼)은 없더라도 성과(聖果)를 얻는다”고 한 경전을 구절을 교문(敎門)에서 제정한 계율에 구애를 받지 않고 능히 제 마음으로 도리를 판단하고 소연히 하는 일 없는 것 같지만, 하지 않음이 없기에 자재의 훌륭한 이익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출가와 재가, 혹은 도속(道俗) 두 가지 모습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원효 자신의 말은 논란이 많은 그의 환속에 대해 그 자신의 생각의 일단을 엿보게 해줍니다.
원효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범행장자, 이 사람의 모습은 비록 속인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그 마음은 일미에 머무르고 이는 때문이니, 이 일미로서 일체의 맛을 포섭하고 있으며, 그가 비록 모든 맛, 즉 세속의 더러움에 관계하고 있더라도 일미의 범정행(梵淨行)을 잃지 않는 자다 「금강삼매경론, 여래장품」)”
어쩌면 원효는 범행장자를 닮아가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상현/동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