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는 칭명이 금생에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수행이 아니라, 순리발심하기 어려운 사람 혹은 부처님의 지혜에 대한 믿음이 성취되지 않은 사람이 행하는 염불이므로 믿음을 성취하는 방편이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칭명 염불자는 일심의 바다에 나아가기 위해 우선 부처님이 말씀하신 성소작지(成所作智)를 믿고 명호를 불러야 합니다.
성소작지는 부처님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변화를 성취한 지혜인데, 원효는 <무량수경종요>에서 이와 같이 설했습니다. “이 지혜는 능히 불가사의한 일을 짓습니다. 말하자면 여섯 자도 넘지 않는 몸이지만 정수리를 볼 수 없는 일이며, 털 구멍의 양만큼도 늘이지 않고 시방세계에 두루하신다는 일이며, 일념만 명호를 부르면 다겁으로 쌓인 무거운 죄가 영원히 소멸되고, 십념으로 생각한 공덕은 능히 삼계 밖의 수승한 과보의 국토에 태어나게 하는 일 등입니다. 이런 일은 낮은 지혜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효는 성소작지에 대해 의심하는 일들을 이와 같이 자세히 설명합니다. “첫째는 행할 일을 성취한 지혜로써 짓는 일을 의심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경>에서 ‘십념의 염불로 저 국토에 태어나게 된다’ 하신 말씀을 듣고 이를 분명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의혹을 일으켜서 말하기를 ‘부처님이 경전에서 말씀하신 것 같으면 선업과 악업의 길에서 죄와 복은 없어지지 않으므로 무거운 것이 먼저 이끌려 간다고 하셨으니 이치로는 몇 번이고 어긋나지 않는다. 어찌하여 일생에 악업을 짓지 않을 수 없는데 단지 십념만으로 능히 모든 죄를 소멸하고 문득 저 국토에 태어나며, 정정취에 들어가 영원히 삼악도를 멀리하고 마침내 물러나지 않는다 하는가? 또한, 시작이 없는 때로부터 오면서 온갖 번뇌를 일으켜서 삼계에 묶여 갇혀 있고, 서로 얽혀 제약받고 있는데 어떻게 두 가지 번뇌를 끊지 않고 곧바로 십념만으로 삼계 밖을 벗어난다 하는가?’ 하며 의심한다.
이와 같은 삿된 생각과 의혹을 다스려야 한다. 그러므로 부사의지(不思議智)를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부처님의 지혜는 커다란 힘이 있음을 나타내 보이고자 하기 때문이다. 능히 가까운 것을 멀게 하고 먼 것을 가깝게도 하며, 무거운 것을 가볍게 하고 가벼운 것을 무겁게도 하신다. 비록 실제로 이러한 일이 있지만 범부의 생각으로 헤아릴 경계가 아니다. 바로 응당히 우러러 믿어야 한다(仰信). 왜냐하면 <경>의 말씀은 가히 자신의 얕은 식견으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믿음을 일으키게 하고자 응당 사물의 상황으로 비유하자면, 천년 동안 쌓은 풀이 그 높이가 백리가 되지만 불로 태우기를 콩알만큼만 허락하여도 하루에 모두가 소진되어 버릴 것이다. 이때 ‘천년 동안 쌓은 풀이 어떻게 하루에 모두 소진되겠는가?’라고 가히 말할 수 있을까?”라고 설명하며 부처님의 지혜에 대한 진실한 믿음을 일으키도록 권했습니다. 우리가 수행문을 선택하여 정진할 때는 “무엇을 믿고 행하는가?”라는 물음에 분명히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염불인이 어떤 불보살의 명호를 부르든지, 염불수행이란 모두 자비광명에 의지하는 수행이며, 칭명염불은 부처님이 변화를 성취한 성소작지를 믿고 행하여, 믿음을 성취하고 올바른 발심을 일으키고자 닦는 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양산/정토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