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어집] 맺는 말

이제 지금까지의 내용을 총정리하면서 결론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종교의 목표는 상대, 유한의 세계에서 절대, 무한의 세계로 가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일체고(一切苦)에서 벗어나 구경락(究境樂)을 얻는 것이라고 합니다.

대개의 종교는 초월신을 전제로 하고 그것을 현실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이상세계에 둡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우주과학시대에 있어서는 그러한 초월신은 도저히 성립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초월신을 전제로 한 종교는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다만 역사의 한면을 장식하는 데 그치고 맙니다.

불교는 본래부터 초월신을 부정합니다. 상대적이고 유한한 이 현실세계가 그대로 곧 절대의 세계이며, 이 세계를 벗어나 따로 절대의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생각이 불교의 근본 태도입니다. 그것을 <법화경>에서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 하고, <화엄경>에서는 ‘일진법계(一塵法界)’라고 했습니다. 현실 이대로가 불생불멸(不生不滅)이 며, 중도세계(中道世界)인 것입니다. 현대의 정신과학에서나 물질과학 에서도 현실이대로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이 입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생은 현실의 차별만 보고 한계만 보려고 합니다. 한계없는 절대의 세계는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상대와 절대, 유한과 무한에 대한 한계는 그것을 보는 사람의 눈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해가 떠서
온 우주를 감싸고 있다 해도 눈 감은 봉사는 이 광명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우주 전체, 삼천대 천세계, 미진수법계 이대로가 불국토 아님이 없고 부처님 아닌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중생은 번뇌 망상의 구름에 가려서 눈뜬 봉사가 되어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절대와 상대는 때와 장소에 따라서 그 구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가 모두 광병입니다. 눈을 감은 사람이 볼 때는 암흑이고, 눈을 뜬 사람이 볼 때는 광명인 것처럼, 눈만 뜨면 이 처소(處所) 이대로가 모두 절대입니다. 또 동시에 사람 사람이 부처님 아님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중생이 본디 부처임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앉은 자리, 선 자리 이대로가 극락세계, 황금세계, 절대세계입니다. 다만 그것을 알지 못함은 중생이 진리의 눈을 감았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눈만 뜨면 내가 바로 진금체(眞金體)이고, 내가 사는 곳 전체가 진금체이며 극락세계임을 알게 됩니다. 이 사실은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본래 정신 자체가 영원불멸이니 공부를 하지 않아도 불멸은 그대로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공부를 하든 않든 간에 정신의 불멸은 그대로이나 그 쓰는 작용은 다르니, 공부를 않는 사람은 진흙 속에 싸인 옥(玉)과 같아서 그 옥의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고 항상 생전에 지은 선악(善惡)의 업력(業力)
에 따라 생사로상(生死路上)에 돌아다니며 무한한 윤회를 거듭하는 업보를 받게 되어, 조금도 자유가 없는, 고(苦)가 연속하는 생사의 불멸(不滅)입니다.

공부를 성취한 사람은 진흙을 다 씻어 버린 깨끗한 옥과 같아서 업력(業力)에 끄달리지 않아 생사로상(生死路上)에서 헤매이지 아니하고 모든 고(苦)를 벗어나 영원히 자유자재한 대활동을 하게 되는 해탈의 불멸(不滅)입니다. 비유하면 공부를 성취하기 전에는 눈 감은 장님의 생활과 같고 공부를 성취한 후에는 눈 뜬 사람의 생활과 같으니, 사람의 생활은 같으나 눈 뜨고 안 뜬 생활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진리의 눈을 뜰 수 있는가? 생각을 한곳에 집중해서 삼매(三昧)를 얻으면 모든 진리를 바로 볼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이 현실 또한 바로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이 현실 자체가 틀린 것이라면 이 현실을 떠나야겠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을 바로 직시해야 합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사바세계라고 하지만, 현실을 바로 보면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결국 중생을 부처
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사바세계를 극락세계로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원래 사바세계 이대로가 극락세계입니다.

불교에서 ‘현실이 곧 절대’라고 하는 것은 그 근본을 중도(中道)에 두고 있습니다. 양변을 여의고 또 양변이 서로 합해서 원융무애한 원리가 바로 중도입니다. 부처님은 우주 만물의 근본 원리인 중도를 바로
깨쳐서 영원토록 무애자재한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일체 중생에게 ‘각자가 본래 지닌 부처로 돌아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하루 품팔이하고 마는 정신으로는 대법(大法)을 절대 성취할 수 없습니다. 시간적으로는 영원에서 영원으로 지속되고, 공간적으로는 무한에서 무한으로 계속되는 무한한 큰 세계를 바로 보려는 큰 결심을 가지고 생활 방침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 자체가 절대적인 자유세계임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눈을 감고 밖으로 찾아 헤매다닌다면 끝내 이 세계를 바로 보지 못할 것입니다. 밖에서 찾으려 하는 것은 마치 황금 속에 들어앉아 있
으면서 돈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현실 이대로가 눈만 뜨면 영원토록 무한으로 쓸 수 있는 보물입니다. 자기 속이 광산이요, 자기 자신이 순금덩어리요, 자기가 앉은 자리, 선 자리가 전부 순금덩어리입니다. 이 광산을 개발하는 도구가 바로 화두(話頭)입니다.

화두를 부지런히 참구하여 아무리 깊은 잠이 들어도 무심삼매(無心三昧)를 성취해서 화두를 깨쳐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화두를 깨칠 것 같으면 본래의 광산을 내 눈으로 분명히 보고 미래겁이 다하도록 자유자재로 쓸 수 있습니다. 이 절대세계, 진금세계, 제법실상의 세계를 중생에게 소개하려면 여러 억천만 부처님이 출세하시어 미래겁이 다하도록 말해도 터럭만큼도 설명하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도 결국 금덩어리에 똥칠하는 격입니다. 그렇지만 금덩어리를 가진 모든 사람 가운데에 눈 뜬 사람은 적고, 눈 감은 사람은 많습니다. 그래서 눈 뜬 사람이 금덩어리를 던져주면 눈 감은
사람은 흙덩어리라고 하며, 오히려 그 사람을 때리고 주먹질을 합니다.

만일 어느 집에 가서 마당에 금덩어리가 있으니 파서 쓰라고 했을 때 그 말을 믿는다면 아무리 땅이 깊어도 그것을 파서 쓸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래 지닌 무한하고 절대적인 보배는 마당 안의 금덩어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보배입니다. 이 처럼 우리는 보배산에서 살고 있음을 바로 알아 보배를 바로 찾아 써야 하겠습니다.

性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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