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공(惠空)은 신라(新羅) 선덕여왕(善德女王 ; 632~646) 때 사람인 천진공(天眞公)의 집 종의 아들로서, 아명(兒名)은 우조(憂助)였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남이 생각만 하고 말은 하지 않아도 그것을 다 알아 맞추는 등의 신기한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천진공은 그에게 예배하며 “지극한 성인이 내 집에 계신다”고 크게 존경하였습니다.
그가 자라서 스님이 되어서는 항상 술을 많이 먹고 거리에서 노래 부르고 춤추며 미친 사람 같이 돌아다녔습니다. 또 번번이 깊은 우물 속에 들어가서 여러 달 동안 나오지 않곤 하였습니다. 만년에는 항사
사(恒沙寺)에 있었는데, 그 때에 원효(元曉)대사가 경전의 주해(註解)를 지으며 어렵고 의심이 나는 것은 혜공에게 물었습니다.
하루는 원효와 같이 강에 가서 고기를 잡아 먹고 똥을 누는데 산 고기가 그대로 나왔습니다. 그러자 혜공이 원효를 보고 희롱하여 말하기를 “너는 똥을 누고 나는 고기를 눈다[汝屎吾魚]”라고 하니, 그 뒤로
절 이름을 오어사(吾魚寺)로 고쳐 불렀다고 합니다.
하루는 구담 공이 많은 사람들과 산에 놀러 갔다가 길에 혜공스님이 죽어서 그 시체가 썩어 있는 것을 보고 크게 슬퍼하였습니다. 그런데 성중(城中)에 돌아와 보니 혜공스님은 여전히 술에 취해서 노래 부르고 춤추며 돌아 다니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그 무렵 진언밀종(眞言密宗)의 고승 명랑(明朗)이 금강사(金剛寺)를 새로 짓고 낙성을 하는데, 당대의 유명한 승려가 다 왔으나 오직 혜공스님만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명랑이 향을 꽂고 마음으로 청하자, 혜공스님이 그것을 알고 “그렇게 간절히 청하므로 할 수 없이 온다” 하며 그 곳에 왔습니다. 그 때에 비가 몹시 왔으나 옷이 조금도 젖지 않았을 뿐더러 발에 흙도 묻지 않았습니다.
혜공스님은 승조(僧肇) 법사가 지은 <조론(肇論)>을 보고 자기가 전생에 지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은 자신이 전생에 승조 법사였다는 말입니다. 승조 법사도 깨달음을 얻어 자유자재한 분이었습니다. 혜공스님이 배운 바 없어도 이처럼 원효스님이 모르는 것을 물어볼 정도이며 또 신통이 자재하여 분신까지 하는 것을 보면, 스님의 말을 거짓말이라 하여 믿지 못할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혜공스님은 죽을 때에 공중에 높이 떠서 죽었는데, 나중에 화장을 하니 사리(舍利)가 수없이 많이 나왔습니다.
性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