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중국의 스님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나라 선문 가운데에 태고(太古)스님이 계십니다.
태고스님은 공부한 지 20여년 만인, 나이 마흔에 오매일여가 되고 그 뒤 확철히 깨쳤습니다. 깨치고 보니 당시 고려의 큰스님네들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인가해 줄 스님도 없고, 자기 공부를 알 스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으로 가서 그곳에서 임제정맥을 바로 이어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 스님은 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점점 오매일여한 때에 이르렀어도 다만 화두하는 마음을 여의지 않음이 중요하다 (漸到寤寐一如詩 只要話頭心不離).”
이 한 마디에 스님의 공부가 다 들어 있습니다.
공부를 하여 오매일여한 경계, 잠이 아무리 들어도 일여한 8지 이상의 보살 경계, 거기에서도 화두를 알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몽중일여도 안 된 거기에서 화두를 다 알았다고 하
고 내 말 한번 들어보라 하는, 잘못된 견해를 갖는다면 이것이 가장 큰 병입니다. 이 병은 스스로 열심히 공부해서 고치려 하지 않으면 고쳐지지 않습니다. 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좋은 약을 가지고 와서, ‘이 약만 먹으면 산다’ 하며 아무리 먹으라 해도 안 먹고 죽는다면 억지로 먹여서 살려낼 재주 없습니다. 배가 고파 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만반진수(滿盤珍羞)를 차려와서 ‘이것만 잡수시면 삽니다’ 해도 안 먹고 죽으니 부처님도 어찌 해볼 재주가 없습니다. 아난이 부처님을 30여년이나 모셨지만 아난이 자기 공부 안 하는 것은 부처님도 어쩌지 못했습니다.
내가 항상 말하는 것입니다만 누구든지 아무리 크게 깨치고 아무리 도를 성취했다고 해도 그 깨친 경계가 동정일여(動靜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 숙면일여(熟眠一如)하여야만 실제로 바로 깨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정일여도 안 되고, 몽중일여도 안 된 그런 깨침은 깨친 것도 아니고 실제 생사에는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참선은 실제로 참선해야 하고 깨침은 실제로 깨쳐야 합니다. 그래야 생사에 자재한 능력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단지 생각으로만 깨쳤다고 하는 것은 생사에 자유롭지 못한 것으로, 깨침이 아니라 불교의 병
이요, 외도(外道)입니다. 참선의 근본요령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공부는 실제로 오매일여가 되어 영겁불망이 되도록 목숨을 던져 놓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명을 아끼지 않고, 목숨도 돌보지 않고 부지런히 노력해야 합니다.
부지런히 노력해야 한다고 하니까 어떤 사람은 “스님, 저는 화두를 배운 지 십년이 지났습니다만 공부가 안됩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공부를 해도 안 된다는 것은 결국 공부를 안했다는 말입니다. 마치 서울에 꼭 가고 싶으면 자꾸 걸어가야 끝내는 서울에 도착하게 되듯이, 십년 이십년을 걸어가도 서울이 안 보인다는 말은 서울로 안 가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性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