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어집] 제4편 1장 오매일여(寤寐一如) 01. 영겁불망(永劫不忘)

우리가 도를 닦아 깨달음을 성취하기 전에는 영혼이 있어 윤회를 거듭합니다. 그와 동시에 무한한 고(苦)가 따릅니다.

미래 겁이 다하도록 나고 죽는 것이 계속되며 무한한 고가 항상 따라 다니는 이것이 이른바 생사고(生死苦)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무한한 고를 어떻게 해야 벗어나며 해결할 수가 있는가? 그러기 위하여서는 굳이 천당에 갈 필요도 없고 극락에 갈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사람마다 누구나 갖고 있는 능력, 곧, 무한한 능력을 개발하여 활용하면 이 현실에서 대해탈의, 대자유의, 무애자재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 원리입니다.

불교에서는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불성(佛性)’이니 ‘법성(法性)’이니 또는 ‘여래장(如來藏)’이니 ‘진여(眞如)’니 등등으로 말하고 있으며, 누구든지 이것을 평등하게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것을 개발하면 곧 부처가 되므로 달리 부처를 구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 생사해탈의 근본은 어디에 있는가? 일찌기 선문(禪門)에서 조사(祖師) 스님들은 말씀하셨습니다.

活句下 薦得(활구하 천득) 산 법문 끝에서 바로 깨치면
永劫不忘(영겁불망) 영겁토록 잊지 않는다.

곧 불교의 근본 질리를 바로 깨치면 그 깨친 경계, 깨친 자체는 영원토록 잊어버리거나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배운 기술이나 지식은 시간이 지나면 잊기도 합니다만, 도를 성취하여 깨친 이 경계는 영원토록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금생에만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아니고, 내생에도, 내내생에도 영원토록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동시에 생활의 모든 것을 조금도 틀림없이 모두 다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영겁불망(永劫不忘)이라는 것입니다.

마조(馬祖)스님께서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一俉永俉 (일오영오) 한번 깨치면 영원히 깨쳐서
不復更迷 (불복경미) 다시는 미혹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깨쳤다가 매(昧)했다 또 깨쳤다 하는 것이 아니고 한번 깨치면 금생, 내생, 여러 억천만 생을 내려가더라도 영원 토록 어둠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원오스님도 그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一得永得(일득영득) 한번 깨치면 영원히 얻어서
億千萬劫 亦只如如(억천만겁 역지여여) 천겁, 만겁을 두고 그와 똑같을 뿐 변동이 없다.

깨친 경계에 조금이라도 변동이 생기면 그것은 바로 깨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에 따르는 그 신비하고 자유자재한 활동력인 신통묘력(神通妙力)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으니, 참으로 불가설
불가설(不可說 不可說)입니다.

대자유에이르는 길, 곧 영겁불망(永劫不忘)인 생사 해탈의 경계를 성취함에 있어서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빠른 것이 참선입니다. 참선은 화두(話頭)가 근본이며, 화두를 부지런히 참구
하여 바로 깨치면 영겁불망이 안 될래야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영겁불망은 죽은 뒤에나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그렇지 않습니다. 생전에도 얼마든지 알수 있습니다. 숙면일연(熟眠一如)하면, 곧 잠이 아무리 깊이 들어도 절대 매(昧)하지 않고 여여불변(如如不變)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영겁불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숙면일여가 여래(如來)의 숙면일여가 되면 진여일여(眞如一如)가 되지만, 보살의 숙면일여는 8지 보살의 아라야(阿梨耶 ; Alaya) 위(位)에서입니다. 제8아라야 위에서의 숙면일여는 보통 우리가 말하는 나고 죽음에서, 곧 분단생사(分段生死)에서 자유자재합니다. 그러나 미세한 무의식이 생멸하는 변역생사(變易生死)가 남아 있어서 여래와 같은 진여위(眞如位)의 자재(自在)함은 못 됩니다. 그러므로 아라야 위에서의 숙면일여는 바로 깨친 것이 아니며, 여래위, 진여위에서의 숙면일여가 되어야만 참다운 영겁불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8지 이상의 아라야 위에서의 숙면일여만 되어도 결코 죽음으로 인하여 다시 매하지는 않습니다. 영원토록 퇴진(退進)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아라야 위에서의 불망(不忘)과 진여위에서의 불망은, 차이는 있지만, 다시 매하지 않는 불퇴전(不退轉)은 같습니다. 오매일여도 여래 위에서의 오매일여와 아라야 위에서의 오매일여가 다르면서 또한 같은 것과 흡사합니다. 숙면일여라고 하여 잠이 깊이 들어도 여여한 것이라고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로부터 대종사, 대조사치고 실제로 수면일여한 데에서 깨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나 깨치기 전에는 모든 것이 식심분별(識心分別)이므로 앞 못 보는 영혼에 불과합니다. 봉사 영혼이 되어서 수업수생(隨業受生)하니 곧 업따라 다시 몸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유는 하나도 없습니
다. 김 가가 되고 싶어도 마음대로 안되고, 박 가가 되고 싶어도 마음대로 안 됩니다. 중처변추(重處便墜)로서 곧 자기가 업을 많이 지은 곳으로 떨어집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이치입니다. 자기의 자유가 조
금도 없는 것을 수업수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유자재한 경계가 되면 수의왕생(隨意往生)하니 곧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습니다. 동으로 가든 서로 가든, 김 가가 되든 박 가가 되든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의왕생으로, 불교의
이상이며 부처님 경전이나 옛 조사스님들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수의왕생이 되려면 숙면일여가 된 데에서 자유자재한 경계를 성취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아무리 아는 것이 많고, 부처님 이상가는 것같아도 그것으로 그치고 맙니다. 몸을 바꾸면 다시 캄캄하여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송나라 철종(哲宗) 원우(元祐) 7년(1092)이었습니다. 소동파(蘇東坡)의 동생이 고안(高安)에 있을 때 동 산문(洞山文)선사와 수성 총(壽聖 聰)선사와 같이 지냈습니다. 그 동생이 하루 밤에 두 스님과 함께 성
밖에 나가서 오조 계(五祖戒) 선사를 영접하는 꿈을 꾸었는데, 그 이튿날에 형인 동파가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동파의 나이가 마흔아홉이었는데 계(戒) 선사가 돌아가신 지 꼭 오십 년이 되던 때였습니다. 오
십 년전 그의 어머니가 동파를 잉태하였을 때 꿈에 한쪽 눈이 멀고 몸이 여윈 중이 찾아와서 자고 가자고 하였더라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계선사였습니다. 계선사는 살아서 한쪽 눈이 멀고 몸이 여위었더랬습니다. 동파 자신도 어려서 꿈을 꾸면 스님이 되어서 협우에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계 선사가 바로 협우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실들로써 동파가 계 선사의 후신인 줄 천하가 다 잘 알게 되어서 동파도 자신을 계 화산(戒和尙)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동파는 자주 동산(洞山)에게 편지를 해서 ‘어떻게 하든지 전생과 같이 불법(佛
法)을 깨닫게 하여 달라’ 하였으나 전생과 같이는 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오조 계(五祖 戒) 선사는 운문종의 유명한 선지식이었는데, 지혜는 많았지만 실지로 깊이 깨치지 못한 까닭에 이렇게 어두워져 버린 것입니다.

실제로 옛날의 고불고조(古佛古祖)는 오매일여가 기본이 되고, 영겁불망이 표준이 되어서 수도하고 법을 전했습니다. 여기에 실례를 들어 이야기하겠습니다.

性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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