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구원 받는 길

내가 부처가 된 이후로
지내온 많은 세월은
한량없는 백천만억 이승지로다.

이 구절은 “법화경” ‘여래수량품’에 있는 말씀인데 “법화경”의 골자입니다. 쉽게 말하면 ‘내가 성불한 뒤로 얼마만한 세월이 경과했느냐’ 하면 숫자로써 형용할 수 없는 한없이 많은 세월이 경과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보통으로 봐서 이것은 이해가 잘 안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인도에 출현해서 성불하여 열반하신 지 2천5백여 년밖에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부처님 말씀이 자기가 성불한 지가 무량백천만억 아승지 이전이라고 했을까? 어째서 숫자로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옛날부터라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

사실에 있어서 부처님이 2천5백년 전에 출현하여 성불하신 것은 방편이고 실제로는 한량없는 무수한 아승지겁 이전에 벌써 성불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알아야 불교에 대한 기본 자세, 근본자세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성불이다’, 즉 부처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으레 그렇게 말하지만 실제로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실제 내용은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입니다. 깨쳤다는 것은 본래 부처라는 것을 깨쳤다는 말일 뿐 중생이 변하여 부처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전에는 자기가 늘 중생인 줄로 알았는데 깨치고 보니 억천만무량아승지겁 전부터 본래 성불해 있더라는 것입니다.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본래 성불해 있었는데 다시 무슨 성불을 또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도 ‘성불한다, 성불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 중생을 지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하는 말일 뿐입니다.

부처님이 도를 깨쳤다고 하는 것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한 본래 모습, 그것을 바로 알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부처님 한 분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일체 중생, 일체 생명, 심지어는 구르는 돌과 서 있는 바위, 유정, 무정 전체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다 성불했다는 그 소식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사바세계’라 합니다. 모를 때는 사바세계지만 알고 보면 이곳은 사바세계가 아니고 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이대로가 극락세계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목표는 중생이 변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고, 누구든지 바로 깨쳐서 본래 자기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했다는 것, 이것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동시에 온 시방법계가 불국토 아닌 곳, 정토 아닌 나라가 없다는 이것을 깨치는 것이 불교의 근본 목표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구원’이라는 말을 합니다. ‘구원을 받는다’, ‘예수를 믿어 천당 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구원이라는 말이 해당되지 않습니다. 본래 부처인 줄 확실히 알고 온 시방법계가 본래 불국토이며 정토인 줄 알면 그만이지 또 무슨 남에게서 받아야 할 구원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불교에서는 기본적인 의미에서 절대로 구원이란 없습니다.

이것이 어느 종교도 따라 올 수 없는 불교의 독특한 입장입니다. 실제 어느 종교, 어느 철학에서도 이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불, 부처란 것은 불생불멸을 이르는 말입니다.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했다고 하는 것은 본래부터 모든 존재가 불생불멸 아닌 것이 없다는 그 말입니다. 사람은 물론 동물도, 식물도, 광물도, 심지어 저 허공까지도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또한 모든 처소 시방법계 전체가 모두 다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즉 정토이며 불국토인 것입니다.

즉 모든 존재가 전부 다 부처이고, 모든 처소가 전부 다 정토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사바세계가 있고 중생이 있는가?

내가 언제나 하는 소리입니다. 아무리 해가 떠서 온 천하를 비추고 환한 대낮이라도 눈 감은 사람은 광명을 못 봅니다. 앉으나 서나 전체가 캄캄할 뿐 광명을 못 봅니다.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우주법계 전체가 부처 아닌 존재 없고 전체가 불국토 아닌 곳이 없습니다. 마음의 눈만 뜨고 보면! 그러나 이것을 모르고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은 ‘내가 중생이다’, ‘여기가 사바세계다’라고 말할 뿐입니다.

근본 병이 어디 있느냐 하면 눈을 떴나, 눈을 감았나 하는 여기에 있습니다. 눈을 뜨고 보면 전체가 다 광명이고, 눈을 감고 보면 전체가 다 암흑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전체가 다 부처이고 전체가 다 불국토이지만, 마음의 눈을 감고 보면 전체가 다 중생이고 전체가 다 사바세계, 지옥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것저것 말할 것 없습니다. 누가 눈 감고 컴컴한 암흑세계에 살겠다고 하는 사람 있겠습니까? 누구든지 광명세계에 살고 싶고, 누구든지 부처님 세계에 살고 싶고, 누구든지 정토에 살고 싶은 입니다. 그렇다면 한시 바삐 어떻게든 노력하여 마음의 눈만 뜨면 일체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가고 오고 할 것 없습니다. 천당에 가니 극락세계에 가니 하는 것은 모두 헛된 소리입니다. 어떻게든 노력해서 마음의 눈만 뜨면 일체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내가 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했더라, 본래 부처라고 말씀하신 입니다.

인간의 근본 존재는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하여 무량아승지겁이 다하도록 무량불사를 하는 그런 큰 존재입니다. 다만 병이 어느 곳에 있느냐? 눈을 뜨지 못하여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눈을 뜨겠느냐 이것입니다.

“스님도 딱하시네. 내 눈은 멀쩡한데 내가 기둥이라도 들이받았는가? 왜 우리보고 자꾸만 눈 감았다 하시는고?”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껍데기 눈 가지고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한밤중에 바늘귀를 볼 수 있다고 해도 그런 눈 가지고는 소용없습니다.

그런 눈은 안 통합니다. 속의 눈, 마음의 눈, 마음 눈을 떠야 하는 것입니다. 명경에 낀 때를 벗겨야 합니다. 명경의 때를 다 닦아 내어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해가 대명중천하며 시방세계를 고루 비추고 있는 것이, 맑고 맑은 거울에 고요하게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거울의 대를 벗기고 우리가 마음의 눈을 뜰 수 있는가? 가장 쉬운 방법이며 제일 빠른 방법이 참선하는 것입니다. 화두를 배워서 부지런히 부지런히 참구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화두를 바로 깨칠 것 같으면 마음의 눈을 안 뜰래야 안 뜰 수 없습니다. 마음의 눈이 번쩍 뜨이고 맙니다. 일초직입여래지, 한번 뛰어 부처 지위에 들어간다고, 한번 훌쩍 뛰면 눈 다 떠 버린단 말입니다. 그래서 제일 쉬운 방법이 참선하는 방법입니다.

그 외에도 방법이 또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눈을 무엇이 가리고 있어서 캄캄하게 되었는가? 그 원인, 마음 눈이 어두워지는 원인이 있으니 그것을 제거하면 될 것 아닙니까? 불교에서는 그것을 탐, 진, 치 삼독이라고 합니다. 욕심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이 삼독이 마음의 눈을 가려서 본래 부처이고, 불국토인 여기에서 중생이니, 사바세계니, 지옥을 가느니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의 눈을 가린 삼독, 삼독만 완전히 제거해 버리면 마음의 눈은 저절로 안 밝아질 수 없습니다. 그 삼독 중에서도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이 탐욕입니다. 탐욕! 탐내는 마음이 근본이 되어서 성내는 마음도 생기고 어리석은 마음도 생기는 것입니다. 탐욕만 근본적으로 제거해 버리면 마음의 눈은 자연적으로 떠지게 되는 것입니다.

탐욕은 어떻게 하여 생겼는가? ‘나’라는 것 때문에 생겼습니다. 나! 남이야 죽든가 말든가 알 턱이 있나, 어떻게든 나만 좀 잘살자 나만! 하는 데에서 모든 욕심이 다 생기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중심이 되어서 자꾸 남을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의 눈은 영영 어두워집니다. 캄캄하게 자꾸만 더 어두워집니다. 그런 욕심을 버리고 마음 눈을 밝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라는 것, 나라는 욕심을 버리고 ‘남’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나 무엇을 생각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자나깨나 나뿐 아닙니까? 그 생각을 완전히 거꾸로 해서 자나깨나 남의 생각, 남의 걱정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행동의 기준을 둔단 말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삼독이 녹는 동시에 마음의 눈이 자꾸자꾸 밝아집니다. 그리하여 탐, 진, 치 삼독이 완전히 다 녹아 버리면 눈을 가리고 있던 것이 다 없어져 버리는데 눈이 안 보일 리 있겠습니까? 탐, 진, 치 삼독이 다 녹아 버리는 데에 가서는 눈이 완전히 뜨여서 저 밝은 광명을 환히 볼 수 있고, 과거 무량아승지겁부터 내가 부처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동시에, 시방세계가 전부 불국토 아닌 곳이 없음을 알 수 있는 동시에, 시방세계가 전부 불국토 아닌 곳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미래겁이 다하도록 자유자재한 대해탈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 “어떤 것이 불교입니까?” 하고 물으면 이렇게 답합니다. “세상과 거꾸로 사는 것이 불교다.”

세상은 전부 내가 중심이 되어서 나를 위해 남을 해치려고 하는 것이지만, 불교는 ‘나’라는 것을 완전히 내버리고 남을 위해서만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과는 거꾸로 사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장에는 남을 위하다가 내가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지만, 설사 남을 위하다가 배가 고파 죽는다고 해도 남을 위해서 노력한 그것이 근본이 되어서 내 마음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밝아지는 동시에 무슨 큰 이득이 오느냐 하면 내가 본래 부처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라는 것을!

자기가 굶어 죽더라도 남을 도와주라고 하면 “스님도 참 답답하시네. 자신부터 한번 굶어 보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70 평생을 산다고 해도, 80살을 산다고 해도 잠깐 동안입니다. 가령 100 살을 살면서 지구 땅덩어리의 온 재산을 전부 내 살림살이로 만든다고 해봅시다. 부처님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해서 또 무량아승지겁이 다하도록 온 시방법계를 내 집으로 삼고 내 살림살이로 삼았는데 그 많은 살림살이를 어떻게 계산하겠습니까?

인생 100년 생활이라는 것이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리고 잘 산다고 해도, 미래겁이 다하도록 시방법계, 시방불토에서 무애자재한 그런 대생활을 한 그것에 비교한다면 이것은 티끌 하나도 안 됩니다. 조그마한 먼지 하나도 안됩니다. 내용을 보면 10원짜리도 안 됩니다.

그러나 10원짜리도 안 되는 이 인생을 완전히 포기해서 남을 위해서만 살고 어떻게든 남을 위해서만 노력합니다. 그러면 저 무량아승지겁, 억천만겁 전부터 성불해 있는 그 나라에 들어가고 그 나를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10원짜리 나를 희생하여 여러 억천만원이 넘는 참 나를 되찾는 것입니다. 그러면 괜찮은 장사가 아닙니까? 장사를 하려면 큼직한 장사를 해야 합니다. 내가 중심이 되어 사는 것은 공연히 10원, 20원 가지고 죽니, 사니 칼부림을 하는 그런 식이 아닙니까?

아주 먼 옛날 부처님께서는 배고픈 호랑이에게 몸을 잡아먹히셨습니다.

몸뚱이까지 잡아먹히셨으니 말할 것도 없을 정도입니다. 이것은 배고픈 호랑이를 위한 것도 있었지만 그 내용에는 큰 욕심, 큰 욕심이 있는 것입니다. 물거품 같은 몸뚱이를 하나를 턱 버리면 그와 동시에 시방법계 큰 불국토에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자유자재한 대해탈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것도 그런 것입니다. 나중에 크면 임금이 될 것이지만 이것도 가져 봐야 별 것 아닙니다. 서푼어치의 값도 안 되는 줄 알고 왕위도 헌신짝같이 차버리고 큰 돈벌이를 한 것 아닙니까?

근대의 순치황제 같은 분은 만주로 나와서 1년 동안 전쟁을 하여 대청제국을 건설한 분입니다. 이것은 중국 역사상 가장 큰 나라입니다. 중국 본토 이외에도 남북만주, 내외몽고, 티베트, 인도지나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것입니다. 그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참으로 눈을 떠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해탈도를 성취하는 것에 비하면, 이것은 아이들 장난도 아니고 10원짜리 가치도 안 되는 것임을 알고 대청제국을 헌신짝처럼 팽개쳐 버리고 그만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금산사라는 절에 가서 다른 것도 아니고 나무하고 아궁이에 불이나 때는 부목이 되었습니다. 대청제국을 건설한 망고의 대영웅 순치황제 같은 사람이 절에 가서 공부하기 위해 나무해 주고 스님네 방에 불이나 때주고,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공부를 성취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습니다.

순치황제가 출가할 때, “나는 본시 걸식하며 수도하는 서방의 수도승이었는데, 어찌하여 만승천자로 타락하였는고?” 하고 탄식하였습니다. 만승전차의 부귀영화를 가장 큰 타락으로 보고 만승전차의 보위를 헌신짝 같이 차버린 것입니다.

이것도 생각해 보면 욕심이 커서 그렇습니다. 대청제국이란 그것은 10원짜리도 못 되고, 참으로 눈을 바로 뜨고 보면 시방법계에서 자유자재하게 생활할 터인데 이보다 더 큰 재산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나간 이야기를 한 가지 하겠습니다.

6, 25사변 때 서울에서 대학 교수를 하던 문 박사라고 하는 이가 나를 찾아와서 하는 말입니다.

“스님네는 어째서 개인주의만 합니까? 부모 형제 다 버리고 사회와 국가도 다 버리고 산중에서 참선한다고 가만히 앉아 있으니 혼자만 좋으려고 하는 그것이 개인주의가 아니고 당신이 바로 개인주의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데 내가 볼 때는 스님네가 개인주의가 아니고 당신이 바로 개인주의야!”

“어째서 그렇습니까? 저는 사회에 살면서 부모 형제를 돌보고 있는데, 어째서 제가 개인주의입니까?”

“한 가지 물어보겠는데, 단신 여태 50 평생을 살아오면서 내 부모 내 처자 이외에 한번이라도 남을 생각해 본 적 있는지 양심대로 말해 보시오.”

“참으로 순수하게 남을 위해 일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스님네가 부모 형제 버리고 떠난 것은, 작은 가족을 버리고 큰 가족을 위해 살기 위란 것이야. 내 부모 내 형제 이것은 작은 가족이야. 이것을 버리고 떠나는 그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보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내 손발을 묶는, 처자권속이라고 하는 쇠사슬을 끊어 버리고 오직 큰 가족인 일체 중생을 위해서 사는 것이 불교의 근본이야! 내 부모 내 처자 이외에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당신이야말로 철두철미한 개인주의자 아닌가?”

“스님 해석이 퍽 보편적이십니다.”

“아니야, 이것은 내가 만들어 낸 말이 아니고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에 모두 그렇게 씌어 있어. ‘남을 위해 살아라’ 하고. 보살의 육도만행 6바라밀의 처음이 베푸는 것이야.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남을 돕는 것. 그것이 바로 보시야! 팔만대장경 전체가 남을 위해서 살아라 하는 것이야”

“….”

“그러니 승려가 출가하는 것은 나 혼자 편안하게 좋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고 더 크고 귀중한 것을 위해 작은 것을 버리는 것뿐이야. 그래서 결국에는 무소유가 되어 마음의 눈을 뜨고 일체 중생을 품안에 안을 수 있게 되는 것이야. 우리가 마음의 눈을 뜨고 일체 중생을 품안에 안을 수 있게 되는 것이야. 우리가 마음의 눈을 뜨려면 반드시 탐내는 마음 이것을 버려야 하는데, 탐욕을 버리면 ‘나만을 위해서, 나만을 위해서’하는 생각을 먼저 버려야 하지.”

전에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부처님 앞에 갔다 놓고 절하고 복 비는 것이 불공이 아니고 순수한 마음으로 남을 돕는 것이 불공이라고.

부처님께서 ‘보현행원품’에 아주 간곡하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당신 앞에 갖다 놓는 것보다도 중생을 잠깐 동안이라도 도와주게 되면 그것이 자기 앞에 갖다 놓는 것보다도 여러 억천만배 비교할 수 없는 공적이라고.

이것이 결국 마음의 눈을 떠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영원한 튼 살림살이를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을 도와주는 것이 부처님에게 갖다 놓은 것보다 비유할 수 없을 만큼 큰 공덕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일본 천리교의 교주 되는 사람이 ‘나카야마 미키’라는 여자분입니다. 그 당시 일본에서도 굉장히 부자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공부를 해서 자기 딴에는 마음의 눈을 떠버렸습니다. 눈을 뜨고 보니 자기 살림살이는 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큰 살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이제까지는 내가 당신 마누라였는데 오늘부터는 내가 당신 스승이야! 내가 깨쳤어! 내가 하느님이니까 내 말을 들으시오.”

“미쳤나? 왜 이러지? 그래 어떻게 하라는 거요?”

“우리 살림살이를 전부 다 팝시다. 이것 다 해봐야 얼마나 되나요? 모두 다 남에게 나누어 줍시다. 그러면 결국에는 참으로 큰 돈벌이를 할 수 있습니다. 아주 큰 돈벌이가 됩니다.”

그리하여 재산을 다 팔아서 모두 남에게 줘 버렸습니다. 이제 내외는 빈손이 되었습니다. 밥은 얻어 먹으면서 무엇이든지 남에게 이익이 되는 것, 남에게 좋은 것, 남 돕는 것을 찾아다니면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의 몸으로 일본 역사상 유명한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돈벌이를 크게 한 것입니다. 우선 조그만 살림살이를 나눠 주고서는.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나도 큰 살림살이를 한번 해봐야겠다’ 이렇게 작정하고 집도 팔고 밭도 팔고 다 팔 사람 있습니까?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자기 재산 온통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 나누어 준다면! 그렇게만 되면 내가 목탁 가지고 따라다니면서 그 사람을 위해 아침저녁으로 예불하며 모실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설사 그렇게 까지 극단적으로는 못 하더라도 우리의 생활방침은 어떻게 해서든지 남을 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남을 위하는 이것이 참으로 나를 위하는 것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남을 위하는 것이 참으로 나를 위한 것이고 나를 위해 욕심부리는 것은 결국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자꾸 노력하면, 참으로 남을 돕는 생활을 할 것 같으면 결국에는 마음의 눈을 떠서 청천백일을 환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려운 것을 많이 할 것 없이 한가지라도 남을 돕는 생활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작년 겨울에 불공에 대한 법문을 했더니 신문기자들이 정리해서 ‘불공 대상은 법당에 앉아 있는 부처님이 아니고 일체 중생’이라고 해서 한창 시끄러웠던 모양입니다. 보통 사회 사람들이 볼 때는 참 좋은데 스님네들이 볼 때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불공한다고 부처님께 갖다 놓고 절하지 말고 자꾸 ‘남 돕자 남 돕자’ 해 놓으면 우리는 다 굶어 죽으라고? 하면서 한때 소동이 났다고 합니다.

“만약 그렇다고 하면 내가 설사 천번 만번 시궁창에 처박힌다고 할지라도 자꾸 말할 참이야. 남을 돕는 것, 부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참으로 불공이라고.”

우리 불교가 앞으로 나른 길에 서려면 승려나 신도 모두 생활방향이 남을 돕는 데로 완전히 돌려져야 합니다.

승려가 예전처럼 산중에 앉아서 됫쌀이나 돈푼이나 가지고 와서 불공해 달라고 하면 그걸 놓고 뚝딱거리면서 복 주라고 빌고 하는 그런 생활을 그대로 계속하다가는 불교는 앞으로 영원히 없어지고 맙니다.

절에 다니는 신도도 또한 그렇습니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내 자식 머리만 아파도 쌀되나 가지고 절에 와서 “아이고 부처님, 우리 자식 얼른 낮게 해주십시오”하는 이런 식의 사고 방식으로는 참된 부처님 제자가 아닙니다. 승려도 신도도 부처님 제자가 아닙니다. 이렇게 해서는 아무 발전이 없습니다. 산중에 갇혀서 결국에는 아주 망해 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불교 승단에는 승려 전문대학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을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마을 사람들은 논을 팔아서라도 자식 공부시키려고 합니다. 자식 공부시키는 것이 가장 큰 재산인 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불교에서도 승려를 자꾸 교육시켜야 합니다. 자기도 모르는데 어떻게 남을 지도하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든, 나중에는 법당의 기왓장을 벗겨 팔아서라도 ‘승려들을 교육시키자’ 하는 것이 내 근본 생각입니다. 이것이 앞으로 종단적인 차원에서 꼭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생명이 억천만겁 전부터 본래 부처이고 본래 불국토에 살고 있는데 왜 지금은 캄캄 밤중에서 갈팡질팡하는가?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눈을 뜨는 방법은? 화두를 부지런히 참구해서 깨치든지 아니면 남을 돕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떡장사를 하든, 술장사를 하든, 고기장사를 하든 무엇을 하는 사람이든지 화두를 배워서 마음속으로 화두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속으로 화두를 하고 남을 돕는 일을 꾸준히 하면 어느 날엔 가는 마음 눈이 번갯불같이 번쩍 뜨여서 그때에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본래 부처이고 본래 불국토에 살고 있다는 그 말씀을 확실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는 참으로 인간 세상과 천상의 스승이 되어서 무량대불사를 미래겁이 다하도록 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춤뿐이겠습니까? 큰 잔치가 절어질 텐데, 그렇게 되도록 우리 함께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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