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가야산의 메아리

불교의 근본원리로서 ‘일체 만법이 하나도 멸하는 것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영혼만이 죽은 후에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도 멸하지 않고 그 형태만 바뀌어 갈 뿐, 영원토록 윤회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양초에 불을 뭍이면 양초는 타서 없어집니다. 이것은 양초를 구성하고 있는 원소가 분산된 것이지 결코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분산된 원소는 인체나 짐승, 나무 등에 모두 흡수되어 자꾸 도는 것입니다. 즉 물질의 원소는 없어지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영혼이 있어 인과에 의해 윤회한다고 하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요즘 세상을 보면 도둑질 하고, 살인도 하고…. 온갖 짓을 다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인과 법칙을 분명히 알면 죄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각자수! 자기가 짖고 자기가 받는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불교의 근본은 바로 이점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영원하여 지은 바 업에 따라 윤회를 하며 영원토록 상주불변인데 불교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하고 묻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불교가 필요한 것입니다. 중생이란 나쁜 일을 많이 해도 착한 일은 많이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업을 짓고, 윤회를 하고, 고통을 받고…. 그러나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 법을 따라서 수도를 하면 결국에는 스스로 깨쳐 생사해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윤회도 인과도 모두 벗어나 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합니다.

“스님, 불교에서는 윤회가 있다고 하는데 윤회가 없으면 좋겠습니다.”

“왜?”

“죽고 남 후에는 아주 그만이라고 하면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우선 편하게 살겠는데, 내생이 있고 인과가 있다고 하니 겁이 나서….”

“글세, 나도 인과가 없고 내생도 없었으면 좋겠어.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잘못한 것이 더 많을 것이고, 내생에 낙보다는 고를 더 많이 받을 터이니 인과가 없으면 좋겠어. 그런데 우리가 없었으면 한다고 해서 없어질까?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 해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안 되지. 이미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자연의 법칙, 인과의 법칙에 의하여 윤회하는 것을 벗어나는 길은 오직 영원한 자유자재한 성불의 길, 해탈의 길로 가는 방법밖에 없어. 그 길로 가는 것이 좋지 않겠어?”

또 한번은 여름에 젊은 학생이 절을 4,00배나 하고 백련암에 올라왔습니다. 자리가 아파서 잘 걷지도 못하고 삼배를 하는데 잘 일어서지도 못했습니다.

“무엇을 묻고 싶어서 왔나?”

“실제로 윤회가 있습니까?”

“있다면 뭘 하게?”

“윤회가 확실히 있다면 대학이고 뭐고 다 버리고 윤회의 문제부터 해결하려고 합니다.”

“윤회의 문제라니?”

“윤회를 벗어나는 해탈의 길을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윤회가 있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윤회가 없다면 걱정이 없으니 마음대로 살려고 합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그러나 윤회는 확실히 있어. 인과도 분명히….”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그 자리에서 딱 결정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아무리 말리더라도 나는 다른 길을 걷지 안겠습니다. 윤회를 벗어나는 길, 해탈의 길을 걷겠습니다.”

그리하여 그 학생은 승려가 되어 지금도 공부를 열심히 잘 하고 있습니다. 경전에도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 되기는 어려운데 이미 되었고
불법을 듣기는 어려운데 이미 듣나니
이내 몸을 금생에 제도 못하면
어느 생을 기다려서 제도하리오.

우리가 도를 닦아 성불하기 이전에는 영혼이 있어 자꾸 자꾸 윤회를 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무한한 고가 따르는 것입니다. 나고 죽고, 나고 죽고…. 이것이 소위 생사고라는 것입니다. 이 무한한 고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천당에 갈 필요도 없고, 극락을 갈 필요도 없고, 오직 사람사람마다 누구나 갖고 있는 초능력, 즉 무한한 능력을 계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활용하면 극락이나 천당은 아무 소용도 없고 이 현실에서 무애자재한 대해탈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우리 불교의 근본 입장입니다.

불교에서는 ‘영원한 생명, 무한한 능력’을 불성, 법성, 진여라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누구나 똑같이 평등하게 갖고 있습니다. 이 능력을 계발하면 곧 부처이니 달리 부처를 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생사해탈의 근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불교의 근본진리, 구경진리를 바로 깨치면 그 깨친 경계는 영겁불망! 영원토록 잊어 버리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보통 일상생활에서 학문을 익힌다든지 기술을 배운다든지 하는 것은 시간이 좀 지나면 희미해져 버리지만, 도를 깨쳐 도를 성취하면 이 깨친 경계는 영원토록 잊어 버리지 않습니다. 금샌, 내생은 물론 여러 억천만생을 내려가더라도 어두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것에 따르는 신비하고 자유자재한 신통묘력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이제 그 실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중국 송나라 때 곽공보라는 시인이자 대문장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람인데, 그의 어머니가 그를 잉태할 때 이태백의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를 이태백의 후신이라고 하였는데, 그는 천재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곽공보의 불교 스승이 귀종 선 선사라는 임제종의 스님입니다. 한번은 선사께서 곽공보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내가 앞으로 6년 동안을 네 집에 가서 지냈으면 좋겠다.”

“이상하다. 스님께서는 연세도 많은데 어째서 우리 집에 와서 6년을 지내시려고 할까?”

그날 밤이었습니다. 안방에서 잠을 자는데, 문득 자기 부인이 크게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아이쿠, 여기는 스님께서 들어오실 곳이 아닙니다.”

“자다가 왜 이러시오”

그는 부인을 깨워 물어보았습니다.

“이상합니다. 꿈에 큰스님께서 우리가 자는 이 방에 들어오시지 않겠습니까?”

“그래? 불을 켜요. 내가 보여줄 게 있어.”

그리고서 낮에 온 편지를 부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이튿날 개벽 절에 가 보니 어젯밤에 스님께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입적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열 달이 지나 부인이 사내 아이를 낳았습니다. 모든 것으로 볼 때 귀종 선 선사가 곽공보의 집에 온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아들의 이름을 선로라고 지었습니다. ‘선 노스님’이라는 뜻입니다. 생후 일년이 지나 아이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을 하면서 누구에게나 ‘너’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제자 취급입니다. 그리고 법문을 하는데 귀종 선 선사의 생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어머니, 아버지도 큰절을 하고 큰스님 대접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소문이 났습니다. 그 당시 유명한 임제종의 백운 단 선사가 이 소문을 듣고 한번 찾아왔습니다. 백운 단 선사를 보고 세 살 된 아이가 “아하, 우리 조케 오네” 하였습니다. 전생의 항렬을 치면 백운 단 선사는 귀종 선 선사의 조카 상좌가 되는 셈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사숙님’ 하고 어린애에게 절을 안 할 수가 있겠습니까? 백운 단 선사 같은 큰스님이 넙적 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스님과 헤어진지 몇 해가 되었습니까?”

“한 4년 되지. 이 집에 와서 3년, 이 집에 오기 전에 1년 전에 서운암에서 만나 이야기 하지 않았던가?”

조금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 장소도 틀림없습니다. 백운 단 선사가 보통 이론적인 것이 아닌 아주 깊은 법담을 걸어 보았습니다.

세 살 먹은 아이가 척척 받아넘기는데, 생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 법담은 장황하여 다 이야기 못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전등록” 등의 불교 역사에 자세히 나옵니다. 이것이 유명한 귀종 선 선사의 재생입니다. 그 후 약속대로 한 6년이 지나자 식구들을 불러 놀고 말했습니다.

“본시 네 집에 6년 동안 지낸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제 난 간다.”

그리고는 그대로 죽어버렸습니다. 이것이 격생불멸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생을 바꾸어 태어나도 전생의 일을 잊어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체의 고통의 벗어나서
영원한 구경락을 얻는다.

이것은 “기신론”에 있는 말인데 불교의 근본 목표입니다. 본래 불교에서는 현실의 세계가 불타는 집이요, 괴로움의 바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속에서 그냥 고생만 하고 말 것입니까? 아닙니다. 부처님 말씀 따라 도를 닦아서 무상도를 성취할 것 같으면 일체 고통을 완전히 벗어 버리고 절대적인 낙과 영원한 자유를 성취합니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 목표이며, 동시에 부처님께서 출가하시어 생, 노, 병, 사의 일체고를 벗어나서 구경락, 열반을 얻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왕궁에서 천하없는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하여도 죽으면 그만이고 영원하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부처님께서는 일시적인 행복을 버리고 수도를 하시어 영원한 열반락을 얻었으니 이것이 불교의 해탈입니다.

우리나라 신라시대 때 혜공 스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신라 원효대사’하면 최고 아닙니까? 그 당시 원효대사의 선생 되는 스님이 바로 혜공스님이십니다. 원효 스님이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혜공스님께 물었습니다. 두 스님이 함께 생활하며 나누신 말씀이 “삼국유사”라든지 다른 여러 기록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 혜공스님은 어떤 분인가? 혜공스님은 선덕여왕 때 재상 천진공 집의 종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평생 누구에게 글자 하나 배운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생이지지였습니다. 불교를 모릅니까? 유교를 모릅니까? 무소불통,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화랑 구감공이 사냥을 나가다가 보니 혜공스님이 들판에서 죽어 있는데 몸에는 구더기가 들끓고 있었습니다.

‘혜공스님이 큰 도인인 줄 알았는데 아무 소리도 없이 저렇게 돌아가시다니. 묻어 주는 사람도 없고 화장해 주는 사람도 없이 이렇게 썩어 가고 있는가. 내가 화장이라도 해드려야겠다.’

그리고는 신라 서울인 경주에 돌아와 보니 어느 스님 한 분이 곤드레만드레 술에 취해서 노래를 부르며 오는데, 유심히 보니 혜공스님이었습니다. 한 혜공스님은 산에 엎어져 죽어 있고, 한 혜공스님은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혜공스님이 승조(383__414, 중국스님, 구마라습 문하에서 역경사업에 종사)법사가 지은 “조론”을 보고 자기가 지은 것이라고 하며 전생에 자기가 승조법사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혜공스님은 한번도 배운 적이 없었어도 모르는 것이 없어 원효 스님이 물어볼 정도였으며, 신통력이 자제하여 신라시대 10대 성인으로 추앙 받는 분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우리 불교 역사에 많이 있습니다. 그 좋은 실례를 달마대사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사의 일화 가운데 ‘총령도중 수휴척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총령 고개로 신발 하나만을 메고 서천으로 가 버렸다는 말입니다.

달마스님이 혜가에게 법을 전하고 돌아가시자 웅이산에서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 몇 해 후 송운이라는 사신이 인도에 갔다가 돌아오는 총령이라는 고갯마루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스님 한 분이 신발 한을 메고 고개를 올라오는데 가까이 와서 보니 바로 달마스님이었습니다.

“스님 어디로 가십니까?”

“너희 나라와는 인연이 다하여 본국으로 간다. 그런데 네가 인도로 떠날 때의 임금은 죽었어. 가 보면 새 임금이 계실 테니 안부나 전하게.”

과연 돌아와 보니 먼저 임금은 죽고 새 임금이 천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도중 달마스님을 만난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니, 달마스님 돌아가신 지 벌써 3년이 지났는데 총령에서 달마스님을 만나다니?”

“아닙니다. 저 혼자만이 본 것이 아니고 수십 명이 함께 그분을 보았습니다. 절대로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달마스님 묘를 파 보자.”

무덤을 파 보니 과연 빈 관이었습니다. 관은 비어 있고 신이 한 짝밖에 없었습니다. 달마대사의 ‘수휴척리’라는 말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해탈이라고 하여 그저 그런 것이 아니고 거기에는 사후에도 그런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신비한 어떤 경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근본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본래 갖고 있는 영원한 생명 속에 든 무한한 능력을 계발하면 귀종 선 선사도 될 수 있고, 혜공스님도 될 수 있고, 달마대사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공부만 부지런히 하면 자유자재한 해탈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근본 골자는 도를 깨쳐 영겁불망을 성취하면 영원토록 어두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소개한 스티븐슨 씨가 조사한 2,000명 이상의 전생기억은 아이들의 장난하는 물거품과 흡사한 것이지만 영겁불망, 이것은 허공이 무너질지라도 조금도 변함없는 대해탈경계입니다.

그러면 그 ‘영겁불망’이라는 관문은 어떻게 해야 돌파할 수 있는가? 자고로 영겁불망의 생사해탈을 성취하려면 가장 빠른 해탈의 길이 참선입니다. 참선을 하는 데 있어서는 화두가 근본입니다. 화두를 부지런히 부지런히 하여 바로 깨치면 영겁불망이 안 될래야 안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영겁불망은 죽은 후에나 알 수 있는 것이지 생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숙면일여, 즉 잠이 아무리 깊이 들어도 절대 매하지 않고 여여불변할 때, 그대부터 영겁불망이 되는 것입니다. 숙면일여라고 하여 깊은 잠이 들어서도 여여한 것이라고 하면 혹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옛날의 조사스님 치고 숙면일여한 데에서 깨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깨치기 전에는 모든 것이 식심분별로서 봉사영혼 아닙니까? 봉사영혼이 되어서 업 따라 몸을 받는 것입니다. 자기 자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가 지은 업대로 떨어져 버립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자기 자유가 조금도 없고 업 따라 가는 것을 ‘수업수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유로운 경계가 되면 내 마음대로 입니다. 김씨가 되든, 박씨가 되든, 여자가 되든 남자가 되든 마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의왕생’ 입니다.

‘수의왕생’ 이것이 불교의 이상입니다. 그래서 “보살은 원력에 의해 태어나고 중생은 업력에 의해 태어난다”고 말했습니다. 수의왕생이 되려면 숙면일여가 된 데에서 자유자제한 그런 경계를 성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제 아무리 아는 것이 많고 부처님 이상 가는 법문을 하고 큰소리를 쳐도 몸 한번 바뀌면 다시 캄캄해져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항상 강조하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아무리 크게 깨치고 아무리 큰 도를 성취했다고 해도 그 깨친 경계가 동정에 일여 하느냐, 몽중에 일여 하느냐, 숙면에 일여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실제 깨친 경계가 이러하여야 비로소 바로 깨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동정일여도 안 되고 몽중일여도 안 되는 그런 깨우침은 깨친 것도 아니고, 실제 생사에도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참선은 실제로 참선을 해보아야 하고 깨침은 실제로 깨우쳐 봐야 합니다. 생사에 자재한 능력을 가질 수 있는 깨침이어야지 생각으로만 깨쳤다고 하는 것은 생사에 아무 이익도 없고 생사에 자유롭지도 못하며, 그것은 깨침이 아니고 불교의 병이요, 외도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공부가 실제로 오매일여가 되어 영겁불망이 되도록 죽자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신명을 아끼지 말고 정진하여 부사의 해탈경계를 성취하고 해탈도인이 되어 미래겁이 다하도록 중생을 제도해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