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생명이 곧 나다. 반면에 나는 곧 우주 생명이다라고 우리가 인정을 할 수도 있다.
이것은 다행히도 3천년 전 인도에 싯달다라고 하는 분이 그 진리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였다. 그리고 깨달으셨다.
그는 인생의 죽음과 병들음과 늙음과 탄생함을 원통하고 슬프게 생각하였고 왜 내가 영원토록 행복하게 살 수 없느냐 하고 발버둥친 것이다. 싯달다 태자는 인생이 무상함에 순응할 수 없다고 반기를 들었다. 인생이 병들고 늙어 죽는 법이 있다면 반대로 영원히 병들지 않고 늙지도 않으며 살 수 있는 법도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인류 5천년 역사에 어느 누구도 감히 생각하여 보지 못 한 위대한 생각이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가장 슬프고 무서운 것은 무엇보다도 죽음인 것이다. 싯달다는 이렇게도 두려운 죽음의 원리가 있는 것과 같이 영원하고 불멸하는 삶의 원리도 반드시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싯달다 태자만의 냉철한 판단력 이요, 그야말로 무서운 고집인 것이다. 과거 수많은 성인들이 있었으나 싯달다 태자와 같이 위대한 뜻을 가져본 일도 없었거니와 해결한 분도 없었다.
모든 사람에게 가장 귀중한 것이 뭐냐고 물으면 누구나 다 서슴지 않고 생명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이 우주를 다 준다해도 자기 생명과는 바꿔주지 않을 것은 물론이며 생명은 손톱만큼도 안 떼어 준다.
그렇게 소중한 것이 이 생명이지만 그러면 그 생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이 없다. 요새 무슨 가치, 가치하고 떠들지만 우리의 생명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사람의 참다운 가치를 논하는가.
속담에 (살기 위해 먹느냐 먹기 위해 사느냐)하지만 만일 먹으면 죽인다고 총을 갖다 대면 아무리 먹고 싶은 진수성찬이 있어도 먹을 마음을 내지 못한다.
먹는 것은 오직 살기 위한 수단이다. 농사를 하든가 장사를 하든가 정치를, 철학을, 과학을 하는 것은 다 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아무리 농사짓기가 싫다 하더라도 부득이 농사를 지어야 하겠고, 부득이 장사를 해야겠고, 부득이 정치인이 되고 경제인이 되고하는 것은 삶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그런데 이 산다는 말은 누가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살려고 하느냐가 문제다. 내가 살아야 한다. 내가 사는 것으로 살아야 만족한 것이다. 현대인은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 내가 무어냐? 제일 중요한 이 두 가지를 확실히 모르고 산다. 그러니 아무 것도 아닌 셈이다.
다른 것은 다 몰라도 좋지만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 이 생명을 어떻게 어디에 바쳐야 할 것인가가 있어야 하고, 확실히 내가 있는데 나는 무엇인가. 이것이 제일 큰 선결 문제이다.
우리가 아는 우주는 커다란 한 개의 송장이다. 따라서 우주에서는 어디에서고 생각이 나올 데가 없다. 생각의 주체는 이 우주에는 없다.
나는 허공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기 때문이다. 살아 있다는 말은 그것이 일체가 아니지만 일체가 아니기 때문에 이것이 분명히 살아 있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참 피눈믈 나게 서러운 말이다. 유물 사상으로 찾아봐도 자기가 없으니까 나라는 생각 이것이 나가 아닌가 해서 한 말이다. 이것이 소위 동서의 철학을 대표했다 하니 참 불쌍한 일이다.
그것은 죽도 살도 못해서 자살하기는 무언가 아깝고 그러니 그런 소리를 해서 위안하고 있을 뿐인 것이니, 마치 한강 건너에서 사람이 많이 빠져 죽는데 잠깐만 하고 외쳐서 우선 위급을 구하는 격이다.
일본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을 어떻게 구제할 수 있으냐고 현상을 걸었는데, (죠또맛데)가 당선이 됐다. 잠깐만 기다리라는 뜻이다. 요사이 실존철학이란 바로 이(잠깐만)철학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이것 가지고 안심입명하는 철학이 될 수는 없다.
다행히 부처님이 3천년 전에 이미 생각조차도 아닌 나, 이것이 실재임을 밝혀주셨다. 물질도 아니고 허공도 아니다. 그것들은 생명이 없기 때문에 무엇을 생각할 줄 모른다.
허공이 바위로 될 수 없고 진공이 바윗돌로 될 수는 영원히 없을 것이다. 바윗돌은 고사하고 모래도 안될 것이다. 모래뿐 아니라 산소나 수소도 안될 것이고 전자도 에너지로도 안될 것이다. 그러니 허공은 태초부터 없는 것으로 영원토록 없을 것이다. 없는 것까지도 될 수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에너지 자체가 생명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생명이 없는 물질 그것은 어떠한 상태에 놓인다 해도 생명으로 변할 수도 없고 거기서 생명이 생겨날 수도 없다.
무엇을 배우는 것이 아니고 배운 것을 자꾸 버리자. 이렇게 자꾸 들어가서 마음이 뚜렷이 드러나면 나중에는 우주에 모를 일이 하나도 없이 모두가 내 목전이다. 마음을 깨쳐놓으면 내 눈이 하나가 아니라 오관이 다 눈이 되고 귀가 된다.
귀라면 귀고 코라면 코고 거리가 없어진다. 거리가 없다는 말은 둘이 아니라는 말이고 주관 객관이 통일됐다는 뜻이다. 육체를 나라고 하다 보니 주관 객관의 거리를 인정하게 되고 둘로 생각하지만 마음도 아닌 이 마음이 나인 줄 어느 정도 깨달으면 이 우주와 나는 둘이 아니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때 비로소 사람이 살 기분이 생긴다. (나는 영원히 죽을 방법이 없구나. 물질도 허공도 아니니 불에 탈 수도 없다. 내 몸뚱이는 두들기면 깨지지만 이건 자살도 못한다. 자살할래야 방법이 없다. 세계의 수소탄이 다 내 몸에 맞는다 해도 육체는 죽을지 모르고 지구는 다 녹아 없어질지 모르지만 나는 죽을 수 없구나)하는 진리를 환하게 보게 된다.
지구 같은 물질이나 허공은 말도 못하고 자유나 구속을 느끼지 못한다. 물질이나 허공은 생명이 아니므로 무엇을 아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역시 송장이 아닌 살아있는 생명이기 때문에 물질과 다르고 허공과 다른 것이다. 이것이 생명과 생명 아닌 것과 차이다.
아는 마음이 없는 물질이나 허공이라면, 구속이니 자유니 하는 문제가 애초에 논의될 수가 없다. 요새 우리가 말하는 자유는 대인관계에 있어서 내가 남에게 기본인권을 유린당하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마,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체객관으로부터 완전하게 해탈된 절대자유를 말하고, 상대세계를 초월하여 천상천하에서 훌쩍 벗어난 대자유를 말한다.
현대학문전체가 총결하여 생명이 무엇인지를 연구하교 있으나 아직 그 생명의 본질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간단하며 평벙하게 그 생명의 실질을 표현하는 말은 우리말로 마음이라고 하는 것으로 전부 표현되어있다.
그래서 나는 처음 불교룰 우연한 기회에 듣고 대강 불교를 안 뒤부터 팔만대장경 전부가 이 마음 두글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 마음 두 글자로써 남에게 불교를 이해시킬 수 있고 가르쳐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근50년 가까이 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좀 바꾸어 말하면 살아있다는 소리다. 즉 생명이 있는 것을 마음이라 한다.
한문 경전에도 심죽시불 즉 (마음이 곧 부처)이며 서종도 그러하고 팔만대장경도 중요 고자각심즉시불을 말한다. 생명이란 영원한 것이며 절대자유인 것이며 그리고 남녀 노소 똑같이 평등하고 완전한 것이다. 이 마음을 내놓고는 상대가 다 있고 대조가 있으면 완전한 게 없다.
가령 막대기는 짧은 것도 긴 것도 아닌데 긴 것이 나타나면 짧아지고 짧은 것이 나타나면 길어진다. 이 세상에 불이 뜨겁고 태양이 뜨겁다고 하지만 우리가 만약 태양 가운데 살고 전 우주가 태양으로 돼 있다 하면 뜨러운 게 없다. 뜨겁지 않은 게 있기 때문에 불이 뜨겁지 불 그놈 자신은 뜨거운 걸 모르고 태양도 제가 뜨거운 걸 모른다.
이것이 상대성 원리고 불교의 원리이다. 나는 너 때문에 있고 여자 때문에 남자가 있고 나쁜 놈 때문에 착한 놈이 있다. 모두 악한 사람이라면 악한 사람 없고 모두 착하면 착한 것이 없다.
인간은 영혼과 육신의 합일이기에 영혼만의 구원이나 구제만으로는 인간의 완성이 안되는 것이다. 인류의 조사인 1남 1녀는 영육의 완성체였기에 우리의 완성도 영육합일의 겸전한 구제하여야 하는 것이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볼 때 인간이 영육을 온전히 한 오원경에서 벗어난 후 오랫동안을 우리는 영성에만 일변도 되었던 신명주권시대에 살아왔고, 그에 이따라 내성에 이 영을 치는 인간의 부조리가 세기의 소용돌이쳐 지배하는 한마당 가운데, 우리들이 오늘날을 살게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겠는가?
혼으로 도니 이 나인 이 마음은 곧 전우주의 핵심적인 진리이며 대자연의 성립이면 천지개벽과 음양조화의 원동력인 것이다. 이렇듯 영원한 실재인 이 생명이 마음을 떠나서 어느 곳에 인생이 있을 수 있으며 또한 그 무엇이나 있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인생이며 5천년의 과거를 다시 깨끗이 정리한 다음에 한번 고요히 생각해 보자꾸나. 과연 그 무엇을 남겨둘 것이 있는가. 또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이 그 무엇인가?
공무에서 생겨났다가 도로 공무로 돌아가곤 하는 것들뿐이 아닌가. 바로 말하자면 그것들은 오직 이 자기자신의 환간으로 환생환멸하는 것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이 생명은 곧 진리며 신이며 불타이며 무정이며 선이며 악이며 남성이며 여성인 것이다. 따라서 온 우주인 것이다. 5천년의 인류문화를 자랑하지마는, 아직까지도 과학, 철학, 종교가들 할 것 없이 다방면으로 연구했지마는 이렇다 할 이 생명의 근본문제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 더구나 영혼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죽어보지 않는 한 사후의 영혼에 대하여 누가 분명히 알겠는가?
영혼이 있다하는 사람도 미친 사람이요, 영혼이 없다하는 사람도 미친 사람이다. 거짓말을 한다면 모르지만 참말이라면 영혼이 있다 없다는 말은 입을 떼지 못할 것이다.
淸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