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오직 하나뿐

진리가 즉 마음이요, 마음이 부처요, 불이 즉 신이요, 신이 즉 마음이요, 마음이 즉 우주요, 우주가 즉 심이요, 심이 즉 진리로 돌고 돌아가는 것이다.

진리는 하나지 둘일 수 없다. 우주의 핵심이 하나지 둘일 수 없으니 따라서 그것은 허공일 수도, 진공일 수도 없고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물질도 허공도 만들어낼 것이다.
그런데 이 하나인 한 핵심을 어디로부터 어디로 찾아가느냐. 허공으로 아무리 끝까지 간다 해도 찾을 수 없다. 또 물질을 아무리 살펴봐도 거기서 생명은 안 나온다. 그러면 어디서 찾느냐. 지금 말하고 말 듣고 앉아 있는 이 생명, 나에게서 찾아야 한다.

이 말이 이론에 맞나 안 맞나 생각하는 그 생각의 주체, 그 주체를 찾아 캐어들어가 보면 거기에 너도 나도 아니고 남편도 선악도 아닌 것이 살아서 분명히 주고받고 얘기할 줄 알고 일체의 주체가 되어 있는 나를 발견한다.

부처님, 하나님, 공자님, 여기 가면 다 만난다. 길은 이 길 하나뿐이다. 객관 세계에서는 아무리 찾아봐도 진리는 찾을 수 없고 진리가 될 수 있는 사건이 하나도 없다.

옛날부터 진리는 아주 높고 높은 데 있는 줄만 아는 분이 많은데 그러나 요새 와서는 평범 가운데 진리가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깨치고 있다. 그러나 더욱더 깨쳐야 할 일은 진리 가운데 참 진리는 평범 가운데 있다는 사실이다. 평범 이하의 평범은 꿈 밖에 없다.
진리! 생명! 곧 이 마음인 나는 신비다. 영원히 불가사의한 미궁의 것이다. 그러나 가장 신비한 것은 또한 가장 평범한 데 있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깨치면 신비는 없어지고 해방의 세계, 자유의 세계, 영원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세계의 거의 모든 종교 사상이 수용되어져 있고 세계의 상극하는 세력들이 우겨 우리 겨레 안에서 여러모로 작용하고 있어 수많은 문제들이 우리에게 안겨져 있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 문제는 우리 모두에게의 과제이기에 경제인이, 문화인이, 또는 종교인이, 정치인이 이것을 회피하려고 할 때에는 역사는 그들에게 철출을 내리게 될 것이며 가장 죄의 값인 사멸이 올 것이다. 인간을 올바르게 깨닫고 올바로 관리하여 인간을 바르게 세우는 데는 30여 억인의 인간 가족이 하나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지표가 세워져야 할 것이라 여긴다.
나를 찾자! 나를 알자! 내가 살자! 인류의 지난 역사는 인간의 자기 관리와 경영을 위한 예비과정이었다. 인간의 자기 관리와 경영이 무엇을 뜻하기에 그 많은 시련과 희생을 제공하여야만 했었는가?

인간의 자기 완성은 우주의 완성이며 인간의 자기 관리와 경영이란 인간에 의한 우주의 관리권과 경영권을 설정함을 말하는 것이다. 우주의 관리 및 경영권자로서의 인간은 어떠한 인간을 정립하여야 하는 것이기에 지나간 인류사를 그 예비과정이라 해야만 하는 것인가?

우주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내 품안에 계시고 내가 하느님 품안에서 영육이 쌍전한 완전한 생명을 비로소 인간이라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느님도 내 품에 계시므로 해서 전지전능의 하느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늘에 올라가면 무상지존의 하느님이 되는 것이며 인간 세상에 내려오면 관리권장인 절대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과 나와는 일체라는 것이다.

일체이면서 또한 엄연히 이체로도 될 수 있음은 곧 나의 절대자유권한의 행세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불이일체인 나는 유시호에는 우주를 창조하고 만유를 섭리하기도 하며, 유시호에 단 하나의 인간으로서 인류사를 이끌기도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나와 우주는 삼위일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과 진리와 신과 불과 우주 만유와 그리고 인간은 자유한 것이며 평등한 것이다. 누구든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일인 줄로 믿는다. 생각이란 생각을 다 떼어내고 객관을 세우지 않으면 고스란히 마음 자리만 남는데 그 자리에만 앉아 있으면 어떤 귀신도 날 잡아가지 못하고 하느님이 와도 안되고 부처님이 와도 안된다.

모든 생각이 떨어지고 나면 나를 볼 사람도 없다. 부처님도 날 못본다.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신통으로도 안 보인다. 그래서 부처님끼리는 서로 못 본다는 말도 그런 뜻으로 하는 말이다.
이렇게 못보는 곳까지 가면 완전히 자리를 알게 된다. 정말 큰 건 크다는 소리를 못한다. 전체가 다 내가 되어놓으면 무엇에다 비교해 많다고 할 수 없다.

그러니 많다는 소리가 작다는 소리다. 따라서 모든 착 한 일해서 복을 짓는데 그런 인과로 큰 복을 많이 지었다고 하더라도 그건 우주의 어느 부분을 그 복이 다할 동안 잠시 차지한 것이며, 이 우주를 다 차지했다 해도 그건 많은게 아니라 물질을 두고 한 소리니 많다고 할 것이 못된다.
꿈에도 바위는 무겁고 모래는 가볍고 그렇지만 이것은 전부 거짓말이다. 꿈속의 세계 에서는 중량이 없는 것인데 바위는 무겁다는 생각 그것이 무거웠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 그것만 끊어지면 현실세계를 그대로 초월한다. 중생들이 스스로 우주의 주재신이 있다고 믿고 자연과학의 원리에 의해 우리는 지배된다고 믿는 마음에 의해 지배되는 것뿐이다.

양은 본시 우리 겨레의 개성을 상징하듯 온유 순량하고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회의없이 순종하며, 이지적이 아니어서 개별행동을 취함이 없이 항상 집단으로 움직인다. 수령의 거동에 따라 행동통일을 긴밀히 할 줄 아뿐 아니라, 단결력과 희생정신이 투철함은 비록 야수계의 생리지만 우리로서도 배울 바 있게 한다.

가령 수급양이 어떤 원인에서건 절벽이나 물속으로 뛰어들게 되면 남김없이 차례대로 좋아서 뛰어드는 예라든가, 아프리카 들소의 경우, 두령 소를 먼저 사살하면 마지막 한 마리까지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맞아 죽는 예는 우리로하여금 생각게 하는 바 있다.

한때 아프리카 지방에 밀생하던 들소떼는 이 규율을 준수하는 순성을 역이용한 교활한 백인 포수들에의해 몰살, 절종 되었고 통조림으로 화해서 이 도살자들을 치부케 한 예도 있다.

양은 살아서 인류에게 젖과 털을 바치고 죽어서 고기와 뼈와 가죽까지 송두리째 바친다.
淸潭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