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인간이냐

무엇이 사람이냐? 어디서 왔으며 잠깐 허덕이다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누가 이렇게 만들 수 있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저절로 생긴 것인가? 인생 문제는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점점 몰라만 간다. 이 산승이 30년 전 충북 속리산 법주사의 작은 암자에 있을 때 일이다.

점심을 끝내자 왔다가 학계에 종사하는 명함을 내어놓은 40여 명 탐방객들은 점심을 끝내자 한시간쯤 틈이 있으니 불교를 들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되묻기를 사람이면 (내용이 빠진 듯합니다.)

찌를 듯하는 분들이 차츰 한 분 두 분 머리를 숙이기 시작함으로 아마 깊이 생각하나 보다 하였더니 한참이나 고요가 흐르다가 복판에 앉은 분이 일어나서 하는 말이 못죽어서 산다는 것이었다. 모두들 그 해답을 찬동하는 눈치이며 부정하는 이는 한 분도 없었다.

영웅호걸과 거지 천민 누구나를 막론하고 인생의 길에 있어서는 다른 바가 없다. 예수나 공자나 석가나 다 마찬가지다. 어쩌다가 태어나 자기도 이렇게 고해에서 방황하다가 곧 죽어야 하니…… 이런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항상 마음이 편치 않다. 세계의 권리를 다 거머쥐어 보아도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기어코 살아야만 할 어떠한 이유를 발견할 도리는 없다. 어떤 과학자나 철학자 또는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등 꼭 살아야 할 조건을 내세울 도리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인생이 이렇게 허무맹랑할 수야 있을까 무슨 뜻이 있겠지. 조물주가 이런 얄궂은 인간을 만들어 좋았다면 조물주를 끌어내려야 할 것이요, 저절로 생겼다 해도 답답하기만 하고, 어찌 하다가 생겼다 해도 맞지 않는다.

이렇게 딱한 실정, 맹랑한 현실에 놓인 것이 우리 인생이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자연 안에서 사회적으로 얽혀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참으로 인간답게 살려면 먼저 자연에 있으면서도 자연을 초월하고 자기 안에 있으면서도 자기를 초월하는 본성을 발견해야 한다. 즉, 우리가 종단, 민족, 인류 등 거대한 공동체를 말하지만 인간의 실존은 역시 각 개인의 인격성에 있기 때문에 상구보리 하와중생을 모토로 하는 우리 불자들은 우선 그 생활태도에 있어서 근면검소하고 창의와 진취에 용감한 생활적 인간이 되어야 하며 인간관계에 있어서 겸손 친절하며 협동 봉사하는 도덕적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

나라는 말은 첫째 네가 아니다라는 뜻이다. 객관이 없으면 나라는 생각 안난다. 상대가 있으니까, 나라는 생각을 내고 나라는 행동을 한다. 자아완성이란 물질인 육체를 위해 산삼 한 뿌리씩 먹는 것인가, 대통령되면 완성인가, 세계 대통령이 된다 해도 그것은 인격완성일 수 없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 사람은 자꾸 죽어간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것이 나인데, 자아도 쓸데 없고 지식도 신앙도 필요없다. 내가 부처이니 나만 잘 다스리면 된다. 석가여래만 천만 번 믿어봐야 석가여래 믿는 인간이고 중생일 뿐 별 수 없다. 내가 내 마음을 단속해 나아가서 번뇌망상 자꾸 없애버리는 그것이 자아완성이다. 그래서 순수한 본래의 자기 마음, 청정한 나를 깨달아 놓으면 온 우주가 그대로 먹을 것도 마음대로 무엇이든 안되는 것이 없이 전지전능해진다. 이것이 비로소 해방이고 인격 완성이다.

마음은 모든 생각의 주체가 되어서 모든 행동이나 생각의 주체는 될 수 있어도 미리 이것의 생각은 없다. 그때 그때 그 사건에 따라 오관에 미치는 바에 의하여 그때 마음대로 부정도 긍정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부정이나 긍정 이것은 내가 아니다. 한 개의 생각에 불과한 것이다.
행동이나 생각의 주체가 나인 것이다. 주체 그것을 우리는 마음이라 표현 하고 있다.

마음이 수양이 돼서 맑아지면 소탈해지고 번뇌가 없어져서 남의 사정을 잘 알게 된다. 마누라를 대할 때도 그렇고 영감을 대할 때도 그렇고 제 감정으로 대하면 영감 말이 제대로 안 들린다. 그래서 마음이 상했을 때 미운 생각으로 대하면 좋게 말해도 밉게 나쁘게 말해도 미웁다. 아무 생각없이 대하면 영감이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하는지 그것을 척 알게 되니까 마음을 맞추어 나갈 수 있고 해결할 도리가 나온다.

그렇지만 감정이 앞선 중생이 되어놓으니까 마누라가 무슨 소리를 해도 귀에 안 들어오고 팔월 추석이 되면 아이들 고무신 하나 사주고 옷가지나 사주자고 이렇게 말하는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해서 그렇겠다고 얼른 주고 돈이 없으면 어디가 빚을 내오든지 해보자고 하고 빚도 못낼 형편이면 (거 참 마음이야 아프겠지만 돈이 없어 참 안됐다)고 (아이들도 불쌍하지만 당신 말을 못 들어주니 참 안됐다)고 말이라도 고맙게 해 주면 서로 섭섭한 눈물을 흘리며 목을 안고 울 수도 있는 거고 아무 시비가 없는 세상인데, 꼭 막혀 있으니까 큰 방에 가면 시어머니가 말이 옳고 부엌에 가면 며느리 말이 옳고 그러니 시어머니 사정 모르고 며느리 사정 모른다.

응무소주로 아무 생각 없이 대하면 시어머니가 무엇 때문에 잔소리를 저렇게 하시는가 하는 걸 환히 알기 때문에 거기에 맞추어 줄 지혜가 나온다.

인간의 가치체계가 무너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겠는가! 완전한 신을 가능하게 하는 가치를 찾아 세워야겠다는 데에 우리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여기 새로운 인간 문화권을 형성해야 하는 일대 전환기에 서서 모든 종교는 화해일치해야 할 것이며, 또한 정신계와 물질계를 담당했던 종교인과 경제인이 일체의 양면으로서 상부상조하는 협화를 이룩하는 것은 대세가 요구하는 당연한 것이다.

인간 스스로를 관리하고, 스스로를 경영할 줄 아는 인간 주권시대에 이제 당도한 것이다. 생산을 관리하고 경영할 줄 알고, 우주를 관리하고 경영하려는 듯한 기술 과학이 발달되어 새 시대를 준비하고 있지마는 인간의 자기 관리를 못하는 데서 새 차원의 세계는 그 문을 열어젖히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의 관리권을 신명에게 위탁하는 한, 또는 물질에게 의뢰하는 한, 신의 노예로서 천진의 인권을 스스로 행사하지 못하고 또는 물질의 노예로서 제약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하느님의 완전함 같이 완전하라 심즉불이니라, 인내천이니라, 물각구태극이니라 루호이니라, 범시아이니라는 모든 성인들의 가르침에 대하여도 정면서 위배하고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소위 세상을 산다. 현실을 산다는 말은, 따지고 보면 어느 시간 어느 장소를 산다는 말로 된다. 따라서 우리는 현실에 대해서 공간적인 면과 시간적인 면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그러나 이것은 현실의 객관에만 치중한 생각이다. 그보다도 현실을 인식하는 주관인 나의 인내활동에 대해서 올바른 판단을 하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

중생들은 모든 것을 인정해서 온갖 인정해서 온갖 것에 걸려 있고 구속돼 있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며, 모든 망상에 젖어 있기 때문에 참 나를 발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만일 산을 인정하면 산에 구속되고, 돈을 인정할 때엔 돈에 구속되고, 사랑을 인정하면 나를 사랑에 빼앗긴다. 술을 좋아하면 술에 미친 만큼 자유가 없어진다.

세상 사람들은 아이나 어른이나 유식한 이나 무식한 이나 모두 제 잘난 맛에 살지만 네가 무엇이냐? 어떤 것이 너냐? 이렇게 따지면, 이것이다 하고 분명하게 내세우는 이가 없다. 이것은 나라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해서 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주인공이 누구인지 내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삶이라면 그 얼마나 서글픈 삶이 되겠는가? 이것이 잘못되면 인생에는 나면서부터 눈물이 있고 괴로움이 따르게 마련이다.

농사짓고 장사하느라고 자기를 돌아볼 여가조차 없어서 자기가 무엇이냐 하는 해답을 못 얻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에 모르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해 놓고, 그러면서 제 잘난 멋으로 사는 것이 인생이다. 따라서 나라는 말의 뜻도 침착하게 생각해 보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천지와 만물은 그 자체가 생겨난 그 순간부터 그것이 없어질 때까진 우리가 인내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쉴 새 없이 변화하면서 흘러가고만 있다. 저 물건이 그렇고 또한 이 마음도 그렇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어떠한 사물을 막론하고 그대로는 다 천변만화로 변하면서 토막토막 측정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흐르고 있는 연속선이 가상의 환영이다. 무엇인지 알 수도 없는 그러한 그것들이 또한 그렇게 흘러서 가는 이 인생의 눈앞으로 번갯불만이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보았다고 하여야 할 것인가?

그것들을 산이다, 물이다. 너다, 나다하고 이름을 지어 부르고 있다. 나를 이름이 무엇인가? 지을 수 있거든 불러보라. 그러므로 그가 인내하고 있는 기둥이나 기둥 모양은 이 우주간에 실로 없는 존재다. 만약 무엇을 인내한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다만 그가 그의 인내를 다시 인내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역사는 강한 정신력과 도덕성을 행사하는 능동적인 인간집단에 의하여 조성될 뿐만 아니라 자연 또는 사회 등 환경의 도전에 대한 역사의 기능적 중심은 바로 개인의 창조적 인격활동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지금 우리나라와 세계의 환경은 어떠한가? 세계는 지금 양대진영의 대립이 심각한 대로 있다. 군축을 운위하면서도 군확은 치열하게 경합되고 있다. 세계 도처에서는 화염이 오르고 있다. 핵전쟁을 경계하면서도 인류는 한 찰나에 전멸될 수 있다는 위험신호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환경의 도전에 인류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이런 도전에 대한 외면은 바로 역사의 사멸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 불자들은 결코 무관심할 수 없다.

나를 찾아내야 한다. 나란 무엇인가? 나는 나다. 나는 유무를 초월하여 산 것이며 힘이며 광명이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깨끗한 것이어서 오직 나일 뿐이다. 나는 만법과 더불어 있지 않고 독립, 독존, 독권하며 유일무이한 실상진아의 실존을 지칭함이 곧 나다.

이 참 나는 발견채득함으로써 우주의 주인공이 되며 생사의 인과를 초탈해서 자재할 수 있다. 이 진아의 발견이 있은 연후에야 확고부동한 인생관, 세계관 내지 우주관의 확립을 보게 되어 비로소 신념에 찬 생의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것이다.

참 삶의 역사는 여기서부터 비롯될진저-

淸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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