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할소냐, 이 죽음을

만물의 연고성쇠와 인간의 생로병사는 만고의 철칙이요, 대자연의 무상법칙일진대, 어찌 무엇으로든 가로막을 수 있으며, 누구인들 능히 탈피할 수 있으리오.

사람은 나면서 그 시간부터 죽음의 적에 쫓기고 있다. 사람은 개구리이고 죽음은 구렁이다. 낮이면 낮, 밤이면 밤마다 찰나도 쉬지 못하고 죽음이란 구렁이에게 쫓긴다. 자는 시간까지도 죽음의 구렁이에 쫓기는 개구리의 생활을 하는 것이 우리 중생들의 생활이다. 그것도 한번 죽고 그치는 죽음이 아니고 천당 지옥 축생으로 내생에도 무량 겁을 쫓기고 죽는다. 마음을 깨쳐서 육신이 내것 아닌 것을 확인해야 죽음의 쫓김을 면한다.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그러나 죽기 전에 우리는 먼저 살기부터 해야한다.

산다는 것. 이것은 우리 인생이 태어날 때부터 걸머지고 있는 명예요 권리다. 그리고 이 삶을 위해 우리는 평생토록 일을 하고 싸우고 또는 휴식을 하곤 하는 것이다.

가령 새까만 연탄을 지고 산꼭대기까지 오르내리는 짐꾼의 경우를 들어보자. 밝기 전에 일어나 어둡도록 일을 하는 농사꾼을 생각해 보자. 기타 교단에서 강의를 하는 이, 정치를 하는사람, 노동자, 인텔리 어느 경우를 보든지 그들은 모두 살기 위해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활동이 모두 진정한 삶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볼 수가 없다. 그것은 그저 몸뚱이를 살찌게 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것일 뿐 시시각각으로 달라져가는, 그리하여 언젠가는 죽고 말 이 육신을 편안케 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활동에 불과한 것이다.

아무 때든지 죽어 없어질 이 육신만을 위해 사는 것이 과연 진정한 의미의 삶이라 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를 생각할 때 나는 불가불 싯달다 태자를 연상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싯달다 타자는 실로 이렇게 죽어 없어지는 몸뚱이 이외에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삶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분이다.

또 하나의 삶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불성이라 해도 좋고 하느님이라 해도 좋다. 어쨌든 영원히 살아 있는 나, 다시 말해서 진여라 여래라 하는 것이 바로 이 또 하나의 삶이다. 이것은 온갖 움직임과 생각과의 주체가 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죽어가는 길이다. 가령 어는 사람이 백년의 명을 타고 났다면 오늘 하루 살았다 하는 것은 24시간 목숨을 잘라버렸다는 뜻이다.

산삼 하나을 달여서 쭉 들어마시는 그 시간도 자꾸 죽어가는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누워서 자는 것도 죽어가는 것이고 오면서도 죽어가고 가면서도 죽어가고 사는 것이 다 죽어가는 것뿐이다. 아무 사정도 없이 만분의 일초도 정지함이 없이 자꾸 가는 것이다. 그러니 살아간다는 소리는 죽어 간다는 소리다.

결코 죽고야 마는 인생이 왜 생겨났을까? 아렇다 할 목적도 없이 왔다가 까닭도 모르게 가버린다. 맨손으로 왔다가 맨손으로 가니 뜬구름 같은 이 세상의 삶을 남을 위해 바쳤는가, 나를 위해 살았는가? 아무리 따져보아도 나는 모를 일이다. 나는 이 순간에도 홀로 죽어 들어간다.

그것으로 그치고 말 것이다. 이렇다면 무엇을 가리켜 산다고 하며, 무엇이 나고, 무엇이 살고, 무엇이 죽는 것이냐? 과연 이것뿐인지 아닌지 진실로 알고자 하는 뜻에서 세상살이에 깊이 무상을 깨달아야 한다. 생사거래을 자유로 하는 일이다. 정력의 힘이다. 일평생에 공부를 다해 마치고 대원을 세워 빈틈없이 날뛰어 오히려 어긋날까 걱정이 되는 것인데. 하물며 수도를 게을리 하는 사람으로서야 무슨 힘으로 다생다겁을 육신본위며 자기본위로만 저질러놓은 죄악의 업력을 막을 수 있으랴. 설사 지견을 얻은 바 있어서 불법대의는 알았다 하더라도 선정력이 없는 사람은 생로병사에 자유가 없으므로, 병에 끌리며 죽음에 끌려 속절없이 눈만 감았으니. 일생의 노릇이 헛걸음만 하고 죽어가서 가없는 저 고해의 생사파도에 표류하리니 이 누구을 원망할 것인가?

너는 진짜 열반이 아니다. 진짜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열반도 아니고 생사도 아니고 부주열반 부주생사하는 것이다. 오늘날 인간의 수명은 1백년을 넘기지 못하느 것이 고금의 통례이며 무상계위 숙명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죽는것과 산다는 것,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고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유물론적 사고와 내생을 설정하여 사후연생을 믿는 인생관의 분기점에서 우리들은 실로 엄청난 숙제에 부딪치게 됨을 본다. 이것은 가장 중대한 인생의 명제인 동시에 인류의 역사와 동서고금의 철학사와 더불어 오늘에 이르러 우리 앞에 가로놓여져 있다.

덴마크 총각 처녀들은 자살까지 한다고 한다. 도의적인 구속도 없고 성도 개방했고 음식도 마음대로 먹고 그야말로 지상의 극락세계이고 천당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많은 청년들이 자살을 한다. 먹고 배설하고 죽는 것보다는 좀 통쾌하게 죽자 해서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수십길되는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고, 택시를 타고 가다 강이나 바다에 떨어져 물이나 꼴딱꼴딱 먹다 죽자, 그래봤자 하나도 억울한 게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유물사상으로는 아무리 고도로 진보해 봤자 먹고 똥싸는 것밖엔 인간을 만족시킬 만한 이상이 없다. 결국 자살할 길밖에 없다. 영혼을 부정하는 인간의 말로는 결국 비참하게 끝난다. 자살이 부쩍 늘어난다면 정말 이것은 생의 애착도 없어진 상태다. 백년 다 살아봐도 아무것도 아니다. 금방 죽어도 아깝지도 않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 인간이 여기까지 가면 다 끝난 것이다.

물론 이것이 소수에 한한 일이고 전부는 아니지만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거짓말을 잘하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남이 그 사람 말은 곧이듣지 않는다. 술 먹는 사람은 정신이 흐려져서 어리벙벙해지는 것을 좋아했으니 내생에는 바보가 되어 나오는 것이다.

인간은 나서 죽는다. 그렇다면 그냥 생사의 궤도마냥 무한대의 평행선을 따라 어쩔 수 없이 망각된 채로 죽어야 하느냐, 아니야! 인생은 공수래 공수거, 오고가는 것은 분명할 게 아닌가. 난 이렇게 내 면목도 타의에 의해 송두리째 빼앗겨 던져진 채 영영 시들어져야만 하는가.

아니다. 시들어져야만 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오늘의 조그만 인정에 치우친다면 내일 영원히 살고 죽는 대법리를 잊어야 한다. 아니야 오늘날 숱한 인간들의 조롱과 멸시와 모욕과 증오와 버림의 슬픈 몰골이 된다 하더라도 난 분명히 대법리를 찾아야 한다. 찾지 못하여 버리고 온 아내와 그리고 버려져야만 될 자식에겐 무한의 증오와 저주의 시선이 언제까지나 지속이 되더라도 난 각오가 있어야 한다.

실달다 태자께서는 3 천년 전에 이런 걱정을 했다.

“사람은 죽는다. 나도 죽을 것이다 어느 누가 나를 죽게 만들었으며 왜 그렇게 된 것인가. 그 깊은 비밀을 낱낱이 파헤치고 쳐부수고 싶다. 우주는 상대적인 원리로 되어 있다. 높은 것이 있으면 낮은 것이 있고 더운 것이 있으면 찬 것이 있고.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고 전부 이렇게 대조적인 원리로 되어 있으니 죽는 것의 대조는 안 죽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죽지 않는 원리가 있을 것이다. 내가 안 죽는 원리를 발견하고야 말겠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밤새도록 잠도 못잤다.

마침내 싯달다 태자는 궁전과 미녀를 버리고 산으로 도망가서 인도천지에 있는 도인들을 다 만나 물어봤지만 몇 백년 몇 천년 살수 있는 방법은 없지 않으나 아주 안 죽는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조금 오래 사는 것이 원이 아니고 영원히 안 죽는 방법, 허공이 없어진다 해도 안 죽는 원리를 발견 하자는 것이 나의 원이다.”

이렇게 생각한 싯달다 태자는 개소리 닭소리 안 나는 산에 들어가 가만히 앉아서 그 해결을 위해 참선을 했다.

“내가 영원히 안 죽는다. 뭐가 그리 영원히 안 죽는냐.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나다. 그러면 내가 무엇인데 영원히 안 죽나.”
가만히 자꾸 따진다.

“이제까지 나라고 하는 것은 육체였는데, 만일 육체가 나라면 영원히 안 죽을 수 없다. 그러면 정신이 나인가. 그러나 이 생각 저 생각 변화무쌍하니 그 가운데 어느 생각을 나라고 할 수도 없다.”

싯달다 태자는 선정삼매에 들어서 모든 생각이 어디서 나오나 살펴보았다. 싯달다 태자의 생각은 아버지 생각도 어머니 생각도 아우 자식의 생각도 아니고 확실한 자기 생각이었다.

“그런데 생사를 면해야 하겠다. 영원히 죽지 않은 원리를 찾아보자. 이 생각은 분명히 내 생각이다. 그러나 내 생각을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생각을 내는 나는 무엇인가. 생각을 내는 것이 나지 생각이 나일 수는 없다. 그러니 생각을 나게 하는 이 주체가 무엇인가”

이것이 의문이었다.

淸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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