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종(臨濟宗)

임제종(臨濟宗) 불교의 한 종파. 조동(曹洞)과 황벽(黃檗)의 두 종파가 합쳐 선종(禪宗)이라고 총칭한다. 당(唐)나라 말기의 임제의현(臨濟義玄)을 개조(開祖)로 하여, 참선문답(參禪問答)에 의한 자기규명을 종지(宗旨)로 삼았다.

선종 5가(家)중 두 번째로 성립된 종파가 임제종이다. 남악회양(南嶽懷讓)의 계보인 임제의현(臨濟義玄)이 창종했다. 임제종은 조동종과 더불어 선종의 2대법맥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사실상 중국 선종의 주봉(主峰)이라 할수 있다. 임제라는 종명(宗名)은 그가 하북성 진주(鎭州) 호타하기슭에서 임제원(臨濟院)을 짓고 학인을 지도하였기 때문에 유래한 것이다. 임제종의 가풍은 일체의 전통과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언제나 현실생활에서 자기가 주체가 되어 불법을 구현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임제 자신이 강인한 무골기질을 갖고 있고 하북의 풍토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임제종의 정신은 임제가 말한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여덟자에 압축되어 있다.

〔역사〕 <중국> 임제의현과 제자들의 활동은 당나라 말기 오대(五代) 때의 전화(戰禍)로 인해서 명확하지 않지만, 7대조 자명초원(慈明楚圓)은 후난〔湖南〕에서 도량(道場)을 일으켰고 제자 황룡혜남(黃龍慧南)․양기방회(楊岐方會) 등이 널리 사대부의 귀의를 얻었으며 장시〔江西〕에서 종지를 재편하였다. 혜남(慧南)은 당나라 중기 마조도일(馬祖道一)이 시작한 홍주종(洪州宗)의 정통으로, 임제의 선(禪)을 역사화하였고, 《사가록(四家錄)》을 편집해서 마조의 도량이었던 장시 북부에 교세를 폈는데, 특히 명공(名公)의 참선을 얻는 것과 문자선(文字禪)의 선양에 힘썼다. 양기방회와 그 제자들은 창장강〔長江〕 북쪽 기슭의 사조산(四祖山)․오조산(五祖山) 등 마조 이전의 옛 도량을 재건하였고, 달마(達磨) 이래의 고칙공안(古則公案)의 종합에 힘썼으며 조주무자(趙州無字)의 공안에 의한 견성체험(見性體驗)의 체계화에 성공하였다. 양기 이후 환오극근은 《벽암록(碧巖錄)》의 제창으로 알려졌고 약간의 문자선의 경향이 있지만, 그의 제자 대혜종고는 《벽암록》의 판목(版木)을 소각해 버릴정도로 문자선을 혐오하였고, 동시에 좌선(坐禪)과 묵조(黙照)에 기우는 조동종(曹洞宗)의 선을 비판하면서 철저하게 견성대오(見性大悟)를 주장하였다. 마침 북송시대(北宋時代) 말부터 남송(南宋)의 천도(遷都) 때까지 급진적 국수주의의 움직임이 강화되었는데, 수도 임안(臨安)을 중심으로 하는 5산10찰제(五山十刹制)의 확립은 대혜의 제자들의 입내설법(入內說法)과 관계하여 국운장구(國運長久)를 기원하는 선승의 자주적 규제가 되었다. 황룡파(黃龍派)가 일찍이 법계(法系)를 잃은 뒤에 송나라 임제선(臨濟禪)의 대표가 된 양기파(楊岐派)는 이와 같은 공안선(公案禪)의 체계와 5산l0찰 제도를 이룩하였다.<한국> 고려 초기 의천(義天)에 의하여 창립된 천태종이 후대로 오면서 개경(開京) 중심의 귀족불교로 변질되어 가자, 이에 대한 반발로 지눌(知訥)을 중심으로 한 선종이 교종(敎宗)인 천태종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선종의 중심세력은 선문9산파(禪門九山派) 중 가지산파(迦智山派)였는데 이 파의 보우(普愚)와 혜근(慧勤)이 중국에 가서 선종의 한 파인 임제종의 선법(禪法)을 받고 돌아오면서 한국에서 임제종이 시작되었다. 보우는 선의 지적 이해를 철저히 배격하는 사교입선(捨敎入禪)의 경향을 보임으로써 고려불교의 전통에서 단절되는 일면을 보였으며, 아울러 새로운 사상인 성리학의 경제개혁을 통한 체제변혁 주장에 상응하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고려시대의 선종과 교종은 쇠퇴하게 되었다. 또한 조선시대에 들어와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불교는 사상계의 주도적인 위치에서마저 밀려나게 되었다. 그러나 임제종의 법맥은 혼수(混修)에 의하여 조선에 전해져 무학(無學)․기화(己和)․만우(卍雨)․영관(靈觀)․휴정(休靜) 등으로 법맥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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