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옹스님의 천도기도
이천군 이천면 관고리 북악에 자리한 영월암, 이 절의 본래 이름은 북악사였다. 이 영월암에는 유명한 마애지장보살상이 모셔져 있는데 84년 12월 보물 제 822호로 지정되었다. 영월암은 고려 때 고승이었던 나옹혜근스님(1320–1376)과 인연이 깊다.
나옹스님은 왕명을 받고 밀양의 영원사로 가는 길이었다. 한양을 거쳐 이천에 당도했을 때 그는 북악에 있는 영월암을 한번 참배하고 가기로 마음 먹었다. 그때 그의 세수는 57세, 법랍은 37세였다. 아직 환갑도 안 된 초로의 스님이었지만 웬지 겉늙어 보이는 모습에서 무엇인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는 듯이 보였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 때문이었다. 그가 선정에 들어 어머니를 뵈오니 어머니는 천도가 되지 못한 채 중음신으로 구천을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비록 출가하여 대도인이 되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애욕과 집착에 의한 죄업으로 말미암아 새 몸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에게는 어머니를 천도해야 할 커다란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의 이름은 원혜였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동네 사람들의 온갖 귀여움을 독차지했었다. 일곱 살에 한문서당에서 천자문을 시작으로 학문은 시작되었다. 첫 해에 ‘천자문’과 ‘동몽선습’, ‘계몽편’, ‘효경’, ‘명심보감’을 읽었고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이해할 정도여서 가끔씩 동학들이나 훈장을 놀라게 만들었다. 여덟 살 되던 해에는 ‘소학’여섯 편에 ‘오언당음’, ‘칠언당음’, ‘고문진보’, ‘맹자’, ‘중용’, ‘대학’을 모두 암기했으며 또한 이해했다. 학문의 성과는 뚜렷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는 그 나이에 한시를 지어 주위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기도 했다. 아홉 살 되던 해에 ‘논어’와 ‘서경’과 ‘시경’, ‘춘추좌씨전’, ‘예기’를 떼었으며, 열 살 때에는 ‘주역’과 역사를 새롭게 공부하기 위해 ‘자치통감’을 읽었다. 4년간 그가 배운 것은 보통 사람은 10년 동안에도 다 이수하지 못하는 엄청난 양의 학문이었다. 그는 그 어린 나이에 이미 더 배울 것이 없었다.
그는 유교의 한계성을 느끼며 열한살 때부터는 제자백가의 학설을 섭렵하기 시작했고 음악과 미술, 조각 분야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가 특히 재미를 붙였던 분야는 무술이었다. 원혜는 그의 절친한 친구 서정과 늘 함께 있었다. 학문을 익힐 때도, 무술을 연마하고 거문고를 뜯을 때도 그들 두 사람은 떨어질 줄 몰랐다. 너무나 다정한 두 젊은이를 두고 그의 고향인 영해에서는 오히려 어떤 의심을 품기도 했다. 원혜는 어느새 열일곱 살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그의 성을 따서 ‘이 도령’이라 불렀다.
그의 속성이 ‘이’씨였기 때문이다. 이웃 사람들은 그의 영민하고 천진한 성품을 높이 평가하여 이 도령이라면 더없이 좋은 사윗감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미 정혼한 여인이 있었다. 원혜는 그녀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언제인가는 자신의 아내가 될 것이라는 데 있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둘은 마음이 잘 맞았다. 그녀의 이름은 애선이었다.
원혜는 애선의 집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애선의 집에서도 오히려 그것을 편안하게 여겼고 지극히 내성적인 원혜도 부담감을 주지 않는 애선 낭자와 그녀의 부모들이 좋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커다란 고민 한 가지를 그의 어머니로부터 선물 받았다. “내가 아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애선이같이 집안도 없는 애를 며느리로 맞는단 말이냐. 아무리 옛날에는 정혼한 사이였다 하더라도 이젠 안 된다.
그것도 너의 아버지와 걔 아비가 술김에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농담삼아 한 말이었는데,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원혜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식을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로 인정치 않고 어른들 마음대로 혼인을 정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도 사실이다. 당사자들끼리는 서로 얼굴도 모르는채 부모의 뜻에 따라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어야 하는 사회제도가 불만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는 하면서도 너무나 이해타산을 따지고 이익과 손실에 대해 민감한 어머니가 싫었다. 어쨌든 그는 애선과의 결혼을 성립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혼인이 결국은 당사자끼리의 결합이면서도 두 집안의 결합이라는 점을 그도 이해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어머니의 경우는 달랐다. 애선의 집안이 옛날과는 달리 실세에서 밀려났다는 것과 가난하다는 것이 큰 장애였다. 한때는 애선이네 집안이 원혜의 집안보다 사회적 관료적 위치라든가 경제적인 면에서 몇 단계 위였었다.
그때는 그의 어머니가 그의 아버지보다 더 애선이네와의 혼인을 적극적으로 찬성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여름이 막바지 기승를 부리는 어느 날이었다. 애선의 부모는 원혜와 그의 절친한 친구 서정을 함께 자신의 집에 초대하고 그가 느끼고 생각하고 결정한 일들을 털어 놓았다.
“여보게 원혜, 자네에게는 미안하게 되었네만 어쩔 수 없네. 자네의 어머니가 우리 애선이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계신 줄 이미 우린 알고 있었네. 그리고 우리 집안이 몰락한 것에 대한 자네 어머니의 태도를 좀더 이해하려고 노력했네. 하지만 우리로서는 역부족이더군. 그래서 우리는 서정을 사위로 맞기로 했다네.” 원혜로서는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애선은 원혜와 그의 친구 서정을 동시에 만나 주고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방황하기 시작했다. 한편 생각하면 어머니가 반대하던 결혼이니까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하기도 했다. 그는 망설였다. 사랑을 택할 것인가 우정을 택할 것인가. 그는 우정을 택하기로 마음 먹었다. 애선은 그렇게 하여 서정의 아내가 되었다. 아름다운 애선을 빼앗긴다는 것이 무엇보다 마음이 아팠지만 원혜는 둘의 행복을 빌어 주기로 했다. 그것이 그동안 정 주고 사랑했던 애선에게 취해야 할 자세라 생각했고, 가장 절친한 친구라 느껴왔던 서정에게 가져야 할 마음이라고 원혜는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정이 이름 모를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소식을 접한 원혜는 눈앞이 캄캄했다. 그토록 멀쩡하던 친구가 갑자기 세상을 버리다니. 원혜는 동네 사람들을 만나면 서정이 어디로 갔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누구도 명쾌한 대답을 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서정의 문제는 서정의 문제로만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곧 원혜 자신의 문제였다. 아니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문제였다. 사람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원혜는 답답한 마음을 주체할 길 없었다.
그는 다시 서적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익혀왔던 서적을 온통 다시 읽었다. 제자백가서를 모조리 열람했다. 그러나 죽음이 무엇이며 죽으면 어디로 가는 것인가를 명쾌하게 설명한 대목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원혜는 자신을 향해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이 나인가. 육신인가 마음인가. 육신이라면 육신은 무엇으로 구성되었는가. 그것은 영원히 생멸하지 않는 것인가. 그러나 아무래도 육신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었다. 원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육신은 아니다. 육신이 나일 수는 없다. 만일 육신이 나라고 한다면 내가 목숨이 끊어지고 나서도 시체로 남아 있는 내 육신이 사물을 볼 줄 알고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냄새도 맡을 줄 알아야 하고 맛도 볼 줄 알아야 한다. 부드러운 손길이 내 시신에 닿았을 때 나는, 내 시신은 그 부드러운 촉감을 느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육신은 정녕코 내가 아니다.’ 그는 다시 정신 쪽으로 생각을 돌렸다. 육신이 내가 아니라면 나는 분명코 정신이다. 정신을 나라고 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정신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인가. 육체를 떠나 가는 곳은 어디인가. 아니, 가는 곳이 없다고 치자. 그럼, 이디에 머문단 말인가. 그는 옛날 얘기를 떠올렸다. ‘옛날 어떤 사람은 죽어서 염라국에 갔더니 아는 사람이 거기 있었다고 한다. 얼굴이며 목소리며 걸음걸이며 모든 행동거지가 아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사람은 정신만 가는 것이 아니다. 육신도 함께 가야 한다.
육신은 남고 정신만 간다면 어떻게 그가 아는 사람을 알아 볼 수 있겠는가.’ 원혜는 서정의 죽음으로 인해 생긴 자기 자신에 대한 물음 부호를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부모님 몰래 집을 나왔다. 원혜는 그 길로 공덕산에 주석하던 요연선사를 찾았다. 원혜가 인사를 드리자 요연선사가 물었다. “여기 온 것은 무슨 물건인가?” 원혜가 대답했다. “말하고 듣고 하는 것이 왔습니다만 보려 해도 볼 수 없고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나이다. 큰스님,어떻게 닦아야 하겠습니까?”
요연선사는 원혜를 받아들여 머리를 깎아 주고 계를 주었다. 법명을 혜근이라 했다. 혜근은 사미 시절을 요연선사 밑에서 지냈다. 그는 시간이 나면 요연선사에게 나고 죽음의 큰 문제에 대하여 묻곤 했다. 그럴 때마다 요연은 물끄러미 혜근을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요연선사가 혜근에게 말했다. “네가 풀고자 하는 생사대사에 관한 문제는 눈 밝은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눈 밝은 사람을 찾아야 할 게다.” 혜근이 물었다.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사옵니까?” “나로서는 알 수가 없구나. 네 스스로 찾아나서야 할 것이다.” “스님께서 직접 일러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너를 깨우칠 만한 그릇이 못 된다. 자, 어서 떠나거라.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 법이다.”
말이 끝나자 요연선사는 아예 돌아앉아 다시는 혜근을 돌아 보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요연선사 문하를 나온 혜근은 전국을 누볐다. 그러나 그를 깨우쳐 줄 선지식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양주 화암사에 이르렀다. 그때가 1344년이었다. 그는 거기서 4년 동안 밤을 낮삼아 용맹정진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나고 죽음의 문제를 풀었다. 그는 깨달음의 기쁨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혜근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은 경지를 체험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1347년, 그의 나이 스물여덟 살 때였다. 연길 법원사에서 지공선사를 모시고 공부하기 2년, 그의 나이 서른 살 되던 해에 지공선사로부터 ‘나옹’이라는 호를 받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평산처림선사에게서 법의와 불자를 받았다.
그후 그는 귀국하여 고려 전역을 두루 돌아다니며 후학을 제접하고 중생 교화에 힘썼다. 이날 영월암에 도착한 나옹스님은 지장보살상 앞에서 문득 어머니를 천도해야겠다는 생각을 내었다. ‘옛날 부처님 당시 부처님의 제자 중 양대 산맥의 하나였던 목련존자는 그의 어머니를 천도하기 위해 천승재를 베풀었다고 하는데, 나는 천승재를 베풀 만큼 넉넉하지는 못하다.
그러나 내가 나의 어머니를 천도하고자 하는 마음이야 목련존자에게 뒤지지 않으리라. 나는 기도하리라. 지장보살에게 기도하리라. 지금은 말세이니 불보살에게 기도함보다 나은 가피력은 없으리라.’ 그는 혼자 중얼거리고는 목탁을 들고 지장마애보살상 앞에 섰다. “나무 남방화주 대원본존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그의 기도는 철저하였다. 그는 잠자는 것도 잊어버리고 공양하는 것도 초월하였다.
그는 그렇게 49일간을 계속하였다. 회향을 하루 남겨 둔 전날 밤도 그는 철야정진을 하고 있었다. 자정이 지나고 새벽이 가까워 올 무렵이었다. 지장보살상 전신에서 금빛 광채가 환하게 비쳐나오고 있었다. 그는 혹시 햇빛을 받아 석조마애지장보살상이 금빛으로 빛나는 것은 아닌가 하고 하늘을 쳐다보았지만 하늘에는 아직 별들이 소근대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이제 우리 어머님이 천도가 잘 되셨는가 보다. 이것은 지장보살님의 가피임에 틀림없다.’
나옹스님은 지장보살님에 대한 기도가 성취되자 후학들에게도 지장 신앙에 관하여 많은 가르침을 폈다. 지금도 이천 영월암에 가면 그때 나옹스님이 지장보살상 앞에서 기도하던 목탁소리와 염불소리가 남아 있다가 귓전에 울려온다.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