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학대사와 한양

무학대사와 한양

고려 말기와 조선초기의 불교학자로서 무학자초(1327–1405)가 있었다. 그는 쓰러져 가는 고려보다는 새로운 기운으로 일어설 조선을 예견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고려에서 왕사로 봉했으나 사퇴하고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사로 삼기를 원하자 이를 수락했던 것이다. 조선 태조와는 아주 절친한 사이였으며, 특히 태조 이성계의 해몽을 해 준 이로도 유명하다. 이성계는 송도에 있는 도창관에서 등극을 했다. 그는 구시대의 정치마당이었던 송도보다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갈 도읍지를 찾고 싶었다. 그는 조정의 대신들과 천도할 것을 의논 한 후 곧바로 무학스님을 초비하였다.

“대사, 대사께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갈 새 도읍지를 한 번 물색해 주시오. 새 술은 새부대에 담아야 하지 않겠소? 잘 부탁하오.” 무학대사는 사적으로 따지면 태조와 친구 사이였지만, 공적으로는 엄연히 군주와 신하 관계였다. 지엄한 어명을 어길 수는 없었다.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전하.” 송도 대궐을 빠져 나온 무학대사는 예로부터 신령스런 산으로 알려진 계롱산을 목표로 출발했다.

그러나 막상 계룡산 일대를 돌아보니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도읍지로는 그다지 손색이 없었으나 우선은 시기가 도래하지 않았음을 알고 발길을 북쪽으로 돌렸다. 천안과 수원을 돌아보고 과천에 이른 무학대사는 내심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다. 멀리는 청계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그 맞은편에는 관악산이 떡 버티고 있어 그야말로 태평성대를 구가할 만한 도읍지라 생각했다.

그러나 과천에는 도읍지의 젖줄이라고 할 만한 강이 없었다. ‘아니야, 여긴 도읍지로서는 부적당해. 우선 큰강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중소도시로서는 나무랄데가 없구나.’ 그는 발길을 돌려 매봉산 쪽으로 틀었다. 야트막한 산을 넘으니 거기 봉은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미 날이 저물었으므로 봉은사에서 하룻밤을 지낸 무학대사는 이튿날 아침 일찍 절문을 나섰다.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뚝섬 나루에 오니 배가 한척 기다리고 있었다. 한강을 건넌 무학대사는 넓게 펼쳐진 들을 바라보며 ‘여기야말로 새로운 도읍지로구나’하고 생각했다. 흐뭇한 마음으로 좀더 지세를 살펴보고 있는데, 뜻밖에도 한 노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있었다. 그 노인이 소를 몰며 말했다.

“허, 이놈의 소. 미련하기가 무학보다도 심하구나. 어찌하여 곧은 길을 가려 하지 않고 자꾸 돌아서만 가려 하느냐?” 무학대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무학이라고? 그럼 나를 두고 일컫는 말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어. 저 노인이 나를 알턱이 없는데. 하여간 물어나 볼까?’ 무학대사는 노인이 있는 곳으로 잽싸게 발걸음을 옮겼다. 무학대사가 말했다. “실례합니다만, 노인장께서 방금 소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노인이 힐끗 돌아보며 말했다.

“왜 그러슈?” 그의 대답은 무뚝뚝했다. 무 토막 자른 것 같은 그의 반문을 받아 무학대사는 주저주저하면서 말했다. “저… 무학 어쩌고 하신 것 같은데 사실인지요?” 노인이 또 무뚝뚝하게 답했다. “이놈의 소가 미련하기가 무학보다도 더하다고 했소. 왜 더 알고 싶소?” “예, 그게 무슨뜻이온지?” 노인이 말했다. “내가 요즘 듣기로는 무학이라는 작자가 새 도읍지를 찾아다닌다고 하던데 좋은 곳은 다 놓아두고 엉뚱한 데만 찾아다니니 이 어찌 미련하고 한심한 일이 아니겠소.” 무학은 노인이 보통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노인에게 공손히 합장하고 말했다. “소승이 바로 그 미련한 무학입니다. 제 소견으로는 이곳이 새 도읍지로 적격이라고 생각했는데, 노인장께서 소승에게 한수 가르쳐 주십시오.” 노인이 그제서야 밭에서 나와 말했다. “스님이 무학이라고 했소?” “예, 그렇습니다. 소승이 무학입니다.”

“이거 초면에 실례가 많았소.” “아닙니다. 원 천만의 말씀을. 하옵고, 노인장꼐서 천년대계를 위해 새로운 도읍지가 있으면 소승에게 일러 주십시오.” 노인은 채찍을 들어 서북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여기서 10리를 더 가서 지형을 살펴보도록 하시오. 아마 마음에 드실 것입니다. 자, 그럼, 난 이만 실례하겠소.” 무학대사가 정중히 허리를 굽히며 노인에게 인사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그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노인도 소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참으로 알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갸우뚱한 무학대사는 노인이 가르쳐 준 대로 서북쪽으로 10리를 걸었다. 그렇게 해서 당도한 곳이 바로 경복궁 자리였다. 무학대사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주변의 경관도 경관이려니와 지세가 너무나 새롭게 뻗어 나가고 있었다. 삼각산을 주봉으로 하여 남산이 안산으로 알맞게 자리했으며 인왕산이 한 녘에서 기운을 북돋아 주고 있었다. 그는 너무 기뻤다. “으음! 과연 명당이로다”

무학은 자신도 모르게 냅다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는 아주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가는 여운을 남기면서 되돌아왔다. 무학의 발길은 가벼웠다. 그는 삼각산 인수봉에 올랐다. 거기는 한 노승이 5백나한에게 예배하는 형국을 띤 자리였다. ‘그래, 이 인수봉을 안으로 넣고 성을 쌓으면 불교도 오랫동안 민중들 속에서 제 구실을 다할 것이로다’ 무학은 그 다음 인왕산에 올랐다.

그 산에 올라 삼각산 자락을 내려다보니, 참으로 명당 중에 명당은 자신이 처음 당도했던 그곳이었다. 그는 남산으로 올랐다. 북쪽으로는 아늑한 지세가 자리하고 있었고 남쪽으로 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는데, 한강이남으로 넓은 들판이 한눈에 보아도 도읍지의 백성들을 먹여 살리고도 남을 듯 싶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 자신이 지나온 청게산이 아련히 보였고, 과천 쪽으로는 관악산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관악산을 보면서 일말의 불안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관악산은 화산으로서 그 산을 잘 달래지 않으면 아무리 남산이 중간에서 기후 조절을 잘 해 준다 하더라도 궁궐에 불이 자주 일어날 형국이었다. 그러나 방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미리 예방을 하면 괜찮을 듯했다. 무학은 한양을 도읍지로 선택한 데 대한 무한한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송도로 향했다.

‘어서 가서 태조에게 이 소식을 알려 드려야 한다.’ 그의 걸음은 유달리 가벼웠고 또 빨랐다. 어느새 서대문자리를 지나 고갯마루에 올라섰다. 그는 잠시 지나온 곳을 되돌아 볼 겸 고개에 바랑을 벗어 놓고 쉬다가 또 하나의 명당을 발견했다.

‘여기다 절을 지으면 불교가 오랫동안 지속되리라.’ 이 재가 무학대사가 사찰 명당자리로 잡았던 곳이라 하여 무학재로 불리다가 무악재로 변형된 곳이다. 송도에 도착한 무학대사는 태조에게 그 동안 보고 듣고 느낀 점들을 상세히 보고했다. 태조도 크게 기뻐하여 천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궁궐을 짓고 도성을 쌓으면서 새로운 역사는 시작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도성을 어디에다 쌓느냐는 것이었다. 무학대사는 인수봉 안으로 쌓아야 한다고 했고 조정의 개국공신들은 인수봉 안으로 쌓아야 한다고 했다.

수에 밀린 무학대사는 홀로 탄식하기를 마지 않았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무학대사가 불교인이었고 또 인수봉밖으로 쌓아야 천년대계를 이어 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인수봉 안으로 도성을 쌓을 경우 불교의 억압이 심해지고 천년 도읍지가 5백년 밖에 갈수 없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개국공신들은 모두가 유생들이었다.

그들은 내심으로는 한양의 지기가 천년에서 5백 년으로 줄어드는게 아쉬웠지만 유교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인수봉 안으로 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불교와 유교의 세 다툼을 드러내놓고 표현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유생들이나 무학대사나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논쟁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마침내는 무학대사가 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반드시 수적으로 미약해서가 아니라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즉, 입장이 난처해진 태조는 천제를 지내어 결정키로 했다. 날을 잡아 제사를 지낸 다음날이었다.

이른 봄이라 밤새 눈이 내렸건만 모두 다 녹아 버리고 축성의 시비가 되가 있는 인수봉 부근에만 선을 그어 놓은 듯 눈이 녹지 않았다. 선은 분명히 인수봉 안으로 나 있었다. 정도전 등 개국공신들은 그것을 빌미로 인수봉 안으로 성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것이 통과되었던 것이다. 무학은 너무나 서럽고 울적하여 홀로 앉아 엉엉 울었다. 불교의 혜명이 끊긴다는 데 대한 불제자로서의 서러운 감정은 감내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 후로 무학대사가 서러워 울었다하여 한양을 ‘서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한가지 설은 성을 쌓을 당시 눈이 선을 긋듯 인수봉을 둘러쌌다는 데서 눈’설’자와 울타리의’울’자를 따서 ‘설울’이라 부르다 나중에 ‘서울’로 변형되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무학은 자신이 도읍지를 정한 데 대한 뿌듯한 자부심 못지않게 불교의 명맥을 단절시키게 했다는 자책감으로 너무나 서럽고 서러워 오랜 세월을 울먹이며 지냈다고 하는데는 이의가 없다.

그리고 노인이 무학대사에게 10리를 더 가라고 가르쳐 준곳을 왕십리라 부리게 되었다. 한편 일선에는 그 노인이 풍수지리에 능했다고 하는 도선국사의 후신이라고 하여 왕십리 일부 지역이 도선동으로 불리기도 했다.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에서>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