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천변의 미륵부처님
청주시 사직동 무림천변에는 용화사라는 절이 있다. 그 절에는 일곱 분의미륵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용화사라는 절 이름도 미륵부처님을 모시면서붙여졌다.
용화사의 ‘용화’란 미륵부처님이 오셔서 건설할 불국토를 말한다. 56억7천만 년 뒤, 이 땅에 오셔서 비로소 용화세계를 건설하고 세 차례에 걸쳐 약 3백억 중생을 교화한다고 하는 미 부처님에 의해 생긴 이름이다. 여기 모셔진 일곱 분의 미륵부처님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있다. 조선 고종 광무 5년(1901)의 일이다.
내당에서 잠을 자던 엄비가 불가사의한 꿈을 꾸었다. 엄비는 본디 불심이 돈독한 여인이었다. 마음은 티없이 고왔고 입에서는 염불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날 밤도 잠들기 전에 향 한 자루를 피우고 단정히 앉아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다 잠이 들었다.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며 문풍지가 울었다. 엄비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장지문을 열었다. 그녀는 한달음에 밖으로 나와 하늘을 바라보았다. 먼 하늘에서 오색이 영롱한 안개가 사위를 뒤덮고 있었다.
그 가운데 빛깔도 선명한 한 줄기 무지개가 엄비의 처소인 내당을 향해 비추고 있었다. 엄비는 그러한 상황을 바라보며 깜짝 놀랐다. “아니, 웬 무지개가 저리도 아름다울까? 참으로 희한한 일도 다 있지.” 엄비는 옷매무새를 고쳤다. 하늘은 안개를 제외하고는 맑았다. 무수한 별들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엄비는 방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창밖에 고정되어 있었다. 문득 먼 곳으로부터 아름다운 풍악소리가 들려 왔다. “이 밤중에 어인 풍악소리 일까.” 엄비는 장지문을 열어 놓고 밖을 바라보았다. 거기에 일곱 분의 미륵부처님이 일곱 선녀의 부축을 받으며 다가오고 계셨다. 일곱 빛깔의 무지개를 타고서. 엄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위에서는 아름다운 새들의 지저귐이 들려 왔다. 나뭇잎들도 춤을 추었고 밤 이슬을 머금은 불두화가 하얗게 웃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무수한 꽃송이가 눈발 날리듯 떨어졌다. 부처님 일행이 내당에 도착하자 엄비는 자기도 모르게 합장을 하고 삼배의 예를 올렸다. 그중 가장 가운데 계시는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그대가 바로 불심이 돈독하다는 엄비요?” 엄비가 대답했다.
“그러하옵니다. 제가 엄비입니다.” 엄비는 부처님께서 자기를 알아봄에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사실은 엄비 그대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 이렇게 왔소. 우리는 지금 매우 위태롭고 난처한 지경에 놓여 있소. 어서 우리를 절에 안치해 주오.” 엄비가 물었다. “난처한 지경이라뇨? 무슨 일이 있으시온지요? 제가 힘닿는 데까지 해 보겠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어서 말씀하소서.” 부처님의 눈가에 물빛이 어렸다. 엄비는 생각했다.
‘부처님에게 뭔가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는 게 틀림없어. 그러지 않고서야 부처님이 눈물을 보이실 리 없지. 암, 그렇구말구.’ 엄비가 물었다. “어느 곳에 계시오며 무슨 사연인지 말씀하옵소서.” “엄비께서 직접 청주 군수에게 알아보오. 부탁하오, 엄비. 우리는 가겠소.” 미륵부처님은 무지개를 타고 홀연히 사라졌다.
엄비는 생각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빨리 구해 드려야겠는걸. 나무미륵보살마하살.’ 엄비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잠을 깼다. 꿈이었다. 너무나도 역력한 꿈이었다. 엄비의 시종 삼월이가 문을 두드린 것이었다. 엄비는 꿈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밖으로 나와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안개도 오색찬란한 일곱 빛깔의 무지개도 없었고 부처님의 모습은 더군다나 없었다.
엄비는 꿈의 내용을 고종에게 고했다. 고종은 엄비의 이야기를 듣더니 고개를 갸웃하고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녀자의 꿈 이야기를 두고 아무렇게나 처신하기가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엄비가 말했다. “마마, 제발 부탁이오니 일단 사람을 청주로 보내 보심이 어떠할지요?” 고심 끝에 마침내 고종은 허락을 했다. “그대의 생각이 정 그렇가면 과인이 사람을 보내 보겠소. 하회를 기다려 보구려.” 엄비는 그날부터 목욕재계하고 염불정진하기 시작했다. 한편 청주 군수 이희복은 엄비의 꿈 이야기와 함께 상세한 내용을 알아 보고하라는 어명을 받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엄비님 께서도 그런 꿈을 꾸셨다니 믿기지 않는군. 내가 사흘전에 꾼 꿈과 너무나도 똑같단 말이야.” 이희복은 사흘전에 꿈을 꾸었다. 바로 엄비가 꿈을 꾸던 그 날 밤이었다. 방문이 스스로 열리더니 웬 스님이 나타났다. 그 스님의 장삼이 젖어 있었다. 흙탕물이었다. 이마에서는 피가 흘렀고 목에는 푸른 물이끼가 끼여 있었다.
“스님, 스님은 뉘시며 어디서 오셨습니까?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스님이 말했다. “군수 영감님, 놀라지 마십시오. 소승은 서쪽이 있는 큰 늪에 빠져있어 헤어날 수가 없습니다. 나와 같이 수행하는 다른 스님들도 함께 빠져 있습니다. 공사간에 매우 바쁘시겠지만, 속히 가셔서 저희들을 구해 주십시오. 그럼 이만.” 말을 마친 스님은 홀연히 서쪽 하늘로 사라졌다. 이희복은 스님이 사라진 쪽을 향해 합장을 하며 절을 하다가 그만 잠에서 깨어났다. 꿈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심상치 않게 여겼는데 엄비의 꿈 이야기와 함께 어명을 받은 이희복은 그날로 사람을 풀어 서쪽에 있는 한 늪을 조사토록 하였다. 그날 오후 조사를 나갔던 나졸들이 돌아와 신이 나서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서쪽으로 가 보니 내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꽤나 넓은 내였는데 그 냇가 늪지대에서 많은 사람들이 낚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찾아보니 돌부처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머리만 나와 있을 뿐 온몸은 흙과 잡초에 덮여 있었습니다.” “그래,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이의복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냥 놔 두고 왔습니다. 우선 보고부터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나졸은 머리를 긁적이며 계면쩍어 했다.
청주 군수 이희복은 많은 사람들은 이끌고 곧 그 불상이 묻혀 있다는 냇가 늪지대로 달려갔다. 과연 거기에는 사람들이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낚시꾼의 엉덩이 밑에 틀림없이 돌미륵으로 보이는 게 있는 것 같았다. “여봐라,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도록 해라.” 군수의 호령에 놀라 낚시꾼들은 일제히 일어났다.
그런데 그들이 깔고 앉았던 돌들이 모두 돌미륵 돌부처였다. 이희복이 추상같이 고함을 질렀다. “이런 무례한 놈들이 있나. 그대들이 깔고 앉았던 돌들이 모두 돌부처인 줄 모르고 있었더냐?” 그제서야 사람들은 지금까지 돌부처 머리를 깔고 앉아 낚시질을 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죽을 죄를 지은 사람처럼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했다. “황공하옵니다. 저희들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오나 저희들 모두는 이들이 돌부처인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희복이 말했다. “되었느니라. 모르고 저지른 거야 어찌하겠느냐. 참으로 무심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자, 그러지들 말고 어서 그 돌부처를 꺼내 드리도록 하라.” 이희복은 불상을 파내기 시작했다. 이미 머리부분은 많이 마멸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이레 동안 사람을 시켜 늪지대의 물을 퍼냈다. 거기서 일곱 분의 미륵부처님이 나왔다.
모두 돌미륵이었다. 이희복은 보고서를 작성하여 나라에 올렸다. 이 사실이 고종과 엄비에게 전해지자 고종은 엄비의 불심을 칭찬하는 한편, 청주 군수 이희복에게도 포상을 하고 절을 지어 그 일곱 돌미륵 불상을 모시도록 하교하였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절이 바로 용화사다. 본디 이 불상들은 신라 선덕여왕(632 646재위)때 조성되어 봉안되다가 대홍수로 인해 휩쓸려 청주 무심천변에 묻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1,300여 년이 흐른 뒤 엄비의 불심에 의해 다시 발견되어 용화사에 모셔졌다. 용화사를 복원한 이후 청주 지역에 자주 일었던 홍수피해도 없어졌다.
그리고천 몇 백년 동안 무심히 버려 두었던 불상을 다시 모시게 되었다 해서 그 내를 ‘무심천’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 일곱 분의 돌미륵 불상은 지방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