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의 업

세조의 업

1455년에 등극한 세조는 1468년에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14년 동안인과응보의 원리를 몸소 깨달았다.

그는 어린 조카 단종과 그 측근들을몰아내고 왕위에 올라 숱한 굴곡의 역사를 감내하면서 흔들리던 나라를 바로잡았다. 그가 일으킨 쿠데타는 어느 모로 보나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변 강대국들과 함께 어깨를 겯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강력한 조정이 필요했던 게 사실이다.

세종의 태평성대를 거치고 난 왕족과 고급관료들은 썩을 대로 썩어 있었다. 여남은 살의 어린 나이로 임금에 오른 단종은 허수아비였고 그의 어머니 현덕 왕후와 측근들에 의해 나라는 제멋대로 요리되고 있었다. 아무리 왕족을 중심으로 왕권사회를 유지해 간다 하더라도 이제 여남은 살밖에 안 된 왕이 어떻게 한 나라를 이끌어 갈 수 있으며 그 사회가 어떻게 유지되겠는가.

세조는 처음부터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를 뜻이 있었던 게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대세요, 역사가 처한 운명이라면 그 사건은 오히려 잘된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의든 아니든 간에 자신이 지은 업은 반드시 받아야만 한다.

그것이 인과응보의 원리다. 하루는 세조가 침전에 들었을 때 꿈속에 단종의 어머니 현덕 왕후가 나타났다. 세조의 친형수였다. 현덕 왕후는 단종의 시해사건과 맞물려 세조의 세력이 무참히 짓밟히고 시해당한 여인이었다. “당신은 우리 단종의 숙부면서 조카인 단종을 죽였소. 그리고 형수인 내게도 죽음을 안겨 주었소.

천하에 당신 같은 불한당은 없을 것이오. 에잇 퇘퇘.” 세조는 꼼짝없이 현덕 왕후가 뱉는 침을 맞았다. 그녀의 침에는 역한 냄새가 났다. 너무나 참기 어려워 코를 쥐고 끙끙거리는데 옆에서 누가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중전이었다. “마마, 악몽을 꾸셨나 보군요.” 세조는 땀을 비오듯 흘렸다. 중전이 손을 들어 세조의 이마를 짚어 보니 열이 상당히 높았다. 온몸이 그대로 불덩어리였다.

“마마, 신열이 높습니다. 이 어인 일입니까? 어의를 부르겠습니다.” “업보인가 보오. 이는 업보가 분명하오. 그러지 않고서야.” “업보라니, 무슨 말씀이신지요?” 세조가 신음소리를 안으로 삭이며 간신히 말했다. “내가 조카를 몰아내어 죽게 만들었잖소. 그리고 형수인 현덕 왕후마저도. 그런데 꿈에 현덕 왕후가 나타나 나를 꾸짖으며 내게 침을 뱉었소이다.” “원, 저런!” 세조는 다시 잠을 청했다.

그러나 눈은 더욱 말똥말똥해질 뿐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았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며 끙끙대는 세조의 눈 앞에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펼쳐졌다. 어린 단종을 안고 귀여워하던 일이며 단종이 왕위에 올랐을때, 어떻게든 그를 위해 일하겠다고 마음 먹었던 일이 스쳐 지나갔다. 뒤이어 자신의 측근들이 거사를 해야 한다고 종용하던 일과 그렇게 할 수 없다던 자신의 모습도 어른거렸다.

마침내 측근의 종용에 못 이겨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었던 짓을 자행한 자신의 모습이 나타났고 그 위에 현덕 왕후와 귀여운 단종의 모습이 겹쳐졌다. 이튿날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난 세조는 깜짝 놀랐다. 지난밤 꿈에 현덕 왕후가 나타나 침을 뱉은 자리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종기가 돋기 시작한 것이다.

그 종기는 온몸으로 퍼졌다. 온몸이 가렵기 시작하더니 종기가 난 곳마다 살이 물러 터지고 악취가 코를 찔렀다. 세조는 어의를 불러들였다. 진맥을 마친 어의가 말했다. “상감마마, 황공하옵게도 마마의 병은 세간의 약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하옵니다.”

세조가 근심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이냐?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어의가 대답했다. “소신이 알기로는 업보의 병이라 업을 녹이는 것이 우선 급선무일 것 같사옵니다. 마마, 황공하오나 명산대찰을 찾아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옵소서.” 세조가 말했다. “그것은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것, 짐이 먼저 국법을 어길 수는 없는 게 아니겠는가.” “하오나 마마, 상감이 계시고 나서 국법이 있는 것이옵니다.

아무리 국법이라 해도 일단은 상감마마께서 병을 치료하기 위함이니 방편이라 하겠나이다.” “방편이라?” “그러하옵니다. 따라서 마마의 행차를 비밀리에 하오시면 되오리라 봅니다.” 그렇게 해서 세조는 시종 한 사람만을 대동하고 명산대찰을 찾았다.

오대산 월정사로 갔다. 월정사에서 기도를 드리고 난 세조는 상원사로 향했다. 길 옆으로 흐르는 계곡물이 너무나도 맑았다. 세조는 어린시절 시녀들 틈에 끼어 멱감던 일이 생각나 혼자 빙그레 웃었다. ‘참, 천진난만한 시절이었지. 그때가 좋았어. 어른이 되고 나니 세상살이가 너무 복잡하구나. 다시 어린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 세조는 문득 멱을 감고 싶어졌다.

그 동안 남 앞에서 몸을 보일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맘대로 옷을 벗지도 못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시종 한사람만 있을 뿐이었다. 세조가 시종을 돌아보며 물었다. “너 멱감고 싶지 않느냐?” 시종이 손을 모으며 말했다. “황공하옵니다. 전하. 전하 앞에서 어떻게 감히…” “그럴 것 없느니라. 우리 함께 들어가 멱을 감는 것이다.”

그리고는 세조가 먼저 옷을 벗고 맑은 물에 몸을 담갔다. 시종도 조금 떨어진 개울 아래쪽에서 멱을 감았다. 그때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사미승이 세조의 멱감는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서 있었다. 세조의 몸은 온갖 추한 종기로 덮여 있었다. 세조가 사미를 보고 말했다.

“이리 와서 내 등을 좀 밀어 주련?” 사미가 옷을 벗고 곁으로 뛰어 들었다. 그리고는 세조의 등을 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사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세조의 몸에 났던 종기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조는 잘 모르고 있었다. 다만 시원하다는 느낌만을 가졌을 뿐이다. 사미가 등을 다 밀고 나자 세조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당부의 말을 남겼다.

“고맙다. 그런데 어디 가거든 임금의 옥체를 씻어 드렸다는 말은 하지 말아라.” 사미승도 웃으며 말했다. “대왕께서도 어디 가거든 문수동자를 친견했다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문수동자라고?” 그러나 이미 그때는 사미가 사라진 뒤였다. 자기 몸을 들여다보니 종기가 말끔히 사라졌다. 세조는 너무나 감격했다. 또한 부처님의 신력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앞으로는 누가 뭐라고 하든 나는 왕의 직권으로 부처님을 옹호하는 쪽으로 정치를 펴리라. 그렇게 해서 부처님의 은혜도 갚고 업보도 소멸하고…’ 왕은 한양으로 돌아왔다. 그는 조선에서 제일가는 화공을 불러들였다. 그에게 세조는 자신이 본 문수동자의 상을 그리도록 명하였다. 몇 번의 수정을 거쳐 마침내 문수동자상은 완성되었다.

세조는 그 그림을 상원사에 봉안하도록 했다. 지금은 나무로 조각한 문수동자상이 있지만, 그때 그렸던 그림은 역사의 어느 갈피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세조가 의관을 벗어 걸고 목욕하던 곳을 “갓걸이” 또는 “관대걸이”라고 불려 오고 있다. 하여간 병을 고친 세조는 이듬해 봄 상원사를 찾았다. 세조는 법당으로 들어갔다.

법당에는 여전히 문수동자상이 탱화로 모셔져 있었다. 세조의 반가운 마음은 이를 데가 없었다. 그가 막 예불을 올리려고 할 때였다. 누군가 뒤에서 자꾸만 어의자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세조가 뒤를 돌아보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고양이 한 마리가 곤룡포 자락을 물고 있었다. 세조는 뭔가 이상한 조짐을 느꼈다. 신하를 시켜 법당 안팎을 살피도록 어명을 내렸다. 아니나 다를까.

부처님을 모신 탁자 밑에 구세대 측근에서 보낸 자객이 칼을 들고 숨어 있었다. 세조의 문초에 따라 그들의 정체는 드러났다. 고양이는 이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세조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고양이에게 어떻게든 보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강릉 땅에서 가장 기름지다고 알려진 논 5백 섬지기를 상원사에 바쳤고 해마다 고양이를 위해 축제를 베풀도록 명했다.

그때부터 절에는 묘답이니 묘전이니 하는 말이 생겼고 절에서 고양이를 기르게 되었다. 고양이를 죽이는 자에게는 엄청난 형벌이 내려져 고양이 보호에도 한몫을 했다. 고양이 사건이 있고 나서 세조는 다시 상원사를 찾았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도량 상원사를 중창하기 위해서 였다. 그리고 성지로서 오래도록 기리기 위해서였다.

상원사 대중들과 자리를 함께한 세조는 상원사 중수에 대한 의논을 하고 있었다. 그때 공양시간을 알리는 목탁이 크게 두 번 내리 울렸다. 세조는 스님들과 함께 공양에 참석하였다. 대중들은 세조와 함께 공양을 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황송하였다. “전하, 자리를 따로 마련했사오니 옮기시옵소서.” 세조가 웃으며 말했다.

“괜찮느니라. 내 스님들과 함께 공양하겠으니 스님들은 괘념치 말라.” 그래도 스님들은 자리를 옮기기를 권했고 세조 또한 소탈하게 거듭 웃으면서 같이하자고 했다. 그때 말석에 앉았던 어린 사미가 공양발우를 쳐들고는 세조를 향해 말했다.

“이처사님, 어서 공양을 하시지요.” 대중들은 이 느닷없는 사미의 행동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며 몸둘 바를 몰라 하였다. 대왕을 보고 “이처사”라니 얼마나 당돌한 호칭인가. 물론 스님들도 “처사”라는 호칭이 그다지 나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세간 사람들을 부를 때는 나이의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남자신도는 처사라고 불렀다. 처사란 “세간에 처한 보살”이란 뜻이었다. 하지만 왕을 보고 처사라 하니 잘못하면 목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국이었다.

그때 세조는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과연 도인될 자격이 충분하구나.” 세조는 그 사미에게 종삼품의 직을 내렸다. 아울러 붉은 천을 감은 허리띠, 즉 전홍대를 하사하였다. 세조는 전날 상원사 계곡에서 문수동자를 만나 자신의 병을 고친 것을 연상시켰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 후부터 어린 아이들에게는 귀하게 되라는 표시로 붉은 허리띠를 매어 주는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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