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똥마을과 인과응보설

쇠똥마을과 인과응보설

‘소승은 지리산의 중으로서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무심코 보리이삭 세 개를 주인의 허락도 없이 꺾어 먹었습니다. 그 과보로 소가 되어 3년 동안 보리밭 주인의 은혜를 갚고 갑니다.

저의 소가죽을 남해 바다에 던져 우뭇가시리가 되게 하십시오. 그것을 거두면 열뇌에 시달리는 중생들이 더위를 식힐 수 있는 좋은 약이 될 것입니다.” 소가죽에 씌어진 이 글을 읽은 마적단 일행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우두머리가 말했다.

“얘들아, 우리도 이젠 손을 씻고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도록 하자. 여기 이 글을 쓴 스님은 보리이삭 세 개를 주인 몰래 꺾어 먹고도 3년 동안 소의 과보를 받았는데, 우리는 일하지 않고 남들이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을 훔치기만 했으니 그 죄가 얼마나 크겠느냐.” 도적들은 모두 우두머리의 말에 찬성했다.

그들은 모두 마음을 고쳐 먹고 가까운 화엄사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여기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조선 성종 3년(1472)에 있었던 일이다. 지리산 쌍계사에 우봉이라는 스님이 머물고 있었다. 그는 결제철인데도 불구하고 여름안거 반살림이 끝나자 걸망을 메고 노고단을 넘었다. 산 정상에 오르니 초여름이건만 서늘했다.

우봉스님은 노고단까지 오른 데 꼬박 이틀을 걸었다. 마침 동굴이 하나 있어 하룻밤을 지내고 화엄사 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갔다. 한참을 걸어가는데 목이 마르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봐도 샘물은커녕 며칠째 가문 탓으로 계곡조차 말라 있었다. 좀더 내려가자 보리밭이 나왔다. 누렇게 익은 보리이삭이 탐스럽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바랑을 걸머지고 비지땀을 흘리며 가던 우봉스님은 뜻하지 않게 보리이삭에 손을 댔다. 그는 보리이삭 하나를 꺾어 손바닥에 놓고 부볐다. 까끄라기가 부서지고 보리알만 남은 것을 입 안에 털어넣고 씹었다. 제법 들큰한 것이 맛이 있었다. 무엇보다 갈증을 쉴 수 있었다.

“허, 그것 참. 맛이 제법인걸.” 우봉스님은 중얼거리며 보리이삭을 다시 두 개나 더 꺾어 질겅질겅 씹으며 길을 걸었다. 한참을 걷던 우봉스님은 깜짝놀랐다. “아니, 내가 주인의 허락도 없이 남의 보리이삭을 꺾어 먹었잖아. 그것도 세 개씩이나! 인과의 도리는 명백하다고 했는데 어쩐다?” 혼자 중얼거리며 걷던 그는 지리산 입구 어느 큰 바위 아래에서 멈춰섰다.

그는 바위 아래에서 승복을 벗어 바랑에 넣고 바랑은 바위 아래 깊숙이 던져 두었다. 그러자 그는 그 순간 소로 변했다. 그것은 내생에 백 배 천 배를 두고 갚는 것보다 금생에 다 갚아 버리겠다는 그의 강한 결단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진정한 뉘우침에서 나온 것이었다. 임자 없는 소가 동네에 나타나자 사람들은 서로 신기하게 여기고 주인을 찾아 주어야 한다고 인간힘을 썼다. 여러 날을 두고 찾아보았지만 허사였다.

주인이 나타나지 않자 사람들은 회의를 했고 결론은 관가에서 해결하도록 맡기자는 것이었다.

고을의 원은 소가 나타난 것을 제일 처음 발견한 사람에게 주라고 판결을 내렸는데 그 사람이 바로 보리밭 주인이었다. 뜻밖에 소가 한 마리 들어오자 밭 주인은 너무나 기뻤다. 농경사회에서는 소 한 마리가 장정 두 몫의 일을 하고도 남는다하여 상당히 부러워들 했다. 주인은 소를 ‘업동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소에 대하여 배려를 했던 것이다. 소는 말도 잘 듣고 일도 잘했으며, 순하기는 양과 같이 아무리 어린아이가 고삐를 잡더라도 말하는 대로 잘 따랐다. 2년이 지나 거의 3년이 다 되어 갈 무렵 초여름이 다가왔다 보리밭 주인집 재산도 생각보다 많이 늘어 넉넉해졌다.

그런데 하루는 소가 여물을 먹지 않고 끙끙대기만 했다. “업동아, 어째 그러니, 응?” 주인은 마음이 아팠다. 한참을 끙끙대던 업동이는 똥을 누었는데 갓 눈 똥에서 이상스런 빛이 새어 나왔다. 자세히 보니 뭐라 씌어 있었다. 주인은 그것을 밝은 곳에 나와 읽었다.

내일 밤 마적들이 떼로 몰려올 것이니 기꺼운 마음으로 영접하고 부디 거스르지 마시오. 주인은 참으로 희한한 일도 다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삿일이 아님을 깨닫고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밤새도록 음식을 장만하고 다음날 아침부터는 부족함이 있을세라 그런 대로 옷까지 준비를 했다.

넉넉한 살림이었기에 그것은 그리 힘든 게 아니었지만 무엇보다도 넉넉하기 때문에 도적이 든다고 생각하니 한편 불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체념해 버렸다. 한밤중이 되자 과연 마적들이 떼로 몰려왔다. 주인은 문을 열고 나가 그들을 영접했다.

“어서 오십시오. 여러분. 오실 줄 알고 미리 준비를 해 놓았으니 안으로 드셔서 우선 요기나 하십시오.” 마적들은 깜짝 놀랐다. 본디 숨어서 일을 하는 부류들은 자기들의 정체가 누군가에게 알려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아니, 어떻게?” “우선 식사나 하시고…차차 말씀드리지요. 어서 드십시오.” “혹시 우리를 죽이려고 약을 넣은 거 아냐?” 한 사람이 말하자 다른 사람들도 주인을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알 수 없는 일이지. 이 보소, 주인장. 주인장이 먼저 골고루 시식을 하시오. 그런 다음에 우리가 먹겠소. 만일 이상이 있을 시에는 죽을 각오나 하시오.” 주인은 태연하게 음식을 골고루 집어먹었다.

아무 이상이 없는 것을 안 도적들은 차려진 많은 음식을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주인은 식사를 하면서 지난 밤에 있었던 얘기를 했다. 도적들은 모두 반신반의하면서 식사가 끝나자 가 보자고 재촉했다. 주인과 함께 마굿간에 가 보니 소는 이미 사라졌고 아직도 쇠똥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날이 밝자 그들은 소 발자국을 따라갔다. 지리산 입구 어느 바위 아래였다. 그 바위 아래에는 소가죽이 남아 있을 뿐 어떤 자취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인과의 법칙에 따라 3년 간 소가 되어 갚았다는 앞의 내용만이 씌어 있었다. 이로 인해 그들은 화엄사에서 중이 되었고 모두 훌륭히 도를 닦아 고승이 되었다고 한다.

또 그 고장은 쇠똥에서 밝은 빛이 나왔다고 하여 방광면이라 하고 소가 똥 눈 마을을 우분리, 즉 쇠똥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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