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갑사 창건과 며느리서까래
전남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월출산에 자리한 도갑사는 신라말기의 위대한 고승 선각국사 도선(827–898)이 창건한 절이다. 원래 이곳에는 문수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도선이 어린시절을 보내던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도선의 어머니 최씨가 빨래를 하다가 물 위에 떠내려 오는 참외를 먹고 도선을 잉태하여 낳았으나 불길하다 하여 숲속에 버렸다 한다.
그런데 비둘기들이 날아들어 그를 날개로 감싸고 먹이를 물어다 먹여 길렀다. 나중에 이를 안 최씨가 문수사 주지에게 부탁하여 기르도록 했으며, 장성한 그가 중국을 다녀와서는 문수사를 다시 신축하여 도갑사라 하였다고 한다.
이 도갑사 창건에는 당대의 제일의 국수인 목림 사보라와 그의 며느리 김씨에 대한 일화가 깃들어 있으며, 그로부터 부연, 즉 들연 끝에 덧얻는 짧고 네모진 서까래, 다시 말해서 며느리서까래란 말이 생기게 되었다. 요즈음 우리가 쓰고 있는 말 중에서 부연설명이라 할 때의 부연은 본디 부연과 음이 같은 데에서 유래했으며 나중에는 따로 독립하여 쓰게 되었다. 부연이란 한마다로 덧붙인다는 뜻이다. 신라 말기,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어느 해 가을이었다.
월출산 산마루를 붉은 노을이 아름답게 수놓을 무렵 드넓은 절터 한복판에 흰 수염을 날리며 못 박히듯 망연히 서 있는 한 노인이 있었다.
목림 사보라였다. 그는 서까래를 번쩍 들어 세워서는 이리 보고 저리 보고 하다가 다시 바닥에 눕혀 놓았다. 그리고는 자로 쟀다. 자로 재고 나서는 고개를 갸우뚱하는 동작까지도 서까래마다 몇 차례씩 반복했다. “참 이상한 일도 다 있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맞는 것 같았는데 도대체 뭣 때문에 서까래마다 이렇게 짧아졌지?” 석양은 마지막 남은 불길을 어둠 속에 묻어 버렸다.
노인에게 짧은 가을 해가 못내 아쉬웠다. 땅거미가 진 지 오래였지만, 그는 여전히 서까래를 만져 보고 재 보고, 밝은 데 나와서 자의 눈금을 확인해 보곤 했다. 팔순이 넘은 사보라 노인은 이 불사를 필행의 마지막 작업으로 삼아 온 정성을 다해 나무를 깎고 다듬었다. 젊은 목수들의 도움도 마다하고 5백 개의 서까래를 혼자 준비했다. 그는 밤잠을 설쳐 가면서까지 며칠 동안 일했다. 상량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사보라는 더욱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서까래를 새로 구입할 재원도 문제였지만, 설사 새로 들여왔다 해도 다듬고 어쩌고 할 시간이 없었다. 더욱더 큰 문제는 이미 용기를 잃은 노인 자신이었다. “분명히 설계도면대로 깎았는데, 참 희한한 일도 다 있네.” 사보라는 중얼거리며 재고 또 재보았지만 한번 짧게 잘린 서까래가 다시 길어질 리 없었다.
“낭패로군, 새로 나무를 구입할 수도 없고 제날짜에 법당을 지을 수 없으니 왕명을 어긴 죄를 어이할까.” 도갑사는 왕명에 의해 시작된 불사였다. 왕은 안으로 기울어가는 국운을 걱정하며 부처님의 가피력에 기대 보겠다는 마지막 희망을 안은 채 지금의 전남 영암 월출산 기슭에 아흔아홉칸의 대가람을 세우도록 영을 내렸다.
당시 신라 국법에는 왕궁 이외에는 백 칸을 넘지 못하도록 정해져 있었지만 왕은 더 크게 짓고 싶었다. 그러나 왕도 국법을 어겨서는 안 되었다. 대신들이 가만히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쉬움을 머금고 신라에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하게 아흔 아홉 칸의 대웅보전을 짓도록 했던 것이다. 대웅전 같은 사찰양식의 건물을 아름답고 웅장하게 지으려면 특히 선의 우아함을 잘 살려야만 한다. 용마루의 날씬한 곡선이며, 하늘을 차고 나를 듯한 지붕의 처마는 여인들의 버선코를 본따야 한다.
그러려면 뭐니뭐니 해도 서까래를 잘 다듬어야 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해서 신라 제일의 목수인 사보라 노인이 불사를 맡게 된 것이다. 노인은 생전 처음 맛보는 절망감으로 온몸의 기운이 쭉 빠져 버렸다. “팔십 평생을 나무와 함께 늙어 온 내가 이제 와서 이런 실수를 하게 되다니. 그것도 왕명으로 짓는 대가람에다,
내 필생의 마지막을 건 공사에서 말이다. 그는 서 있는 나무의 겉모습만 보고도 나무의 나이를 알았고 결이 어떠하며 무늬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았다. 나무가 단단한가 무른가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나라에서 제일가는 대목으로 불렸다. 국수의 명예가 공허한 수렁에 빠져 들어감을 느꼈다.
그는 집 짓는 일에서 보람을 찾았다. 보수가 많고 적음을 떠나 나무를 다루는 일이야말로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우릴는 천직으로 알았다. 그것은 그대로 삶의 예술이었고 목수일을 떠나서는 자신의 인생관을 말할 수 없었다. 맨 처음 스승의 허락을 받고 끌을 쥐었을 때 얼마나 신났던가. 노인은 절망의 밑바닥에서 인간힘을 썼다.
생명의 불꽃이 순간에 사그라짐을 느꼈다.
온 생애가 마치 땅속으로 잦아드는 것만 같았다. 몸은 물먹은 솜이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노인의 눈에는 절망만이 감돌았다. 그는 그만 자리에 누워 침식을 잊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맞지 않았다. 노인은 자리에 누워 평생 동안 지은 집들을 떠올려 보았다. 왕궁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찰, 그리고 명문 귀족들의 집이며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지만, 어느 하나 실수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지.” 사보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않았다. 며느리 김씨가 갖다놓은 약그릇에 손을 대었다. 약그릇에 담긴 자신의 초췌하고 파리한 그림자를 보는 순가, 그는 자신이 없었다. 다시 자리에 눕고 말았다. 밥상을 들고 들어온 며느리가 조심스럽게 누워 있는 시아버지 사보라 곁에 않았다.
며느리가 말했다. “약도 드시지 않고, 아버님 저녁 진지 드시지요.” “생각이 없구나. 상을 물리렴.”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신지요? 며칠째 누워만 계시고 약도 진지도 드시지 않으니 걱정이 되옵니다.” “아무 일도 아니다. 내가 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또 네가 알 바도 아니구나.” “하오나 아버님, 제가 시집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만약 우환이 있으면, 모두 제 탓이다 싶어 송구스러워서요.” “아가, 네 탓도 아니고, 누구의 탓도 아니다,
모두 내가 잘못해서 생긴 일이니, 너무 염려하지 말아라.” 며느리 김씨는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아버님, 옛말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습니다. 행여 저의 미욱한 생각이나마 도움이 될지 모르잖습니까. 부디 말씀해 주세요.” “네 간청이 하도 지극하니 내 말하마. 허나 큰 도움은 되지 않을 듯싶구나.” 사보라는 노인은 사실대로 얘기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며느리 김씨는 눈앞이 아득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며느리 김씨는 눈앞이 아득했다. 누가 뭐래도 시아버지인 사보라만큼 뛰어난 목수는 없었다.
그 시아버지조차 해결할 수 없는 목수 일을 전혀 문외한인 며느리가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며느리 김씨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고 조용히 시아버지 곁을 물러났다. 마당에 나와 심호흡을 했지만 답답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시어머니도 신랑도 모두 침울한 근심 속에서 지냈다.
상량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지만 사보라 노인은 아직도 자리에 누워 있었다. 공사를 감독하는 관료들은 사보라가 왜 병이 났는 줄도 모르고 병문안을 왔다. “사보라 영감님, 이제 사흘 뒷면 상량을 합니다. 상량을 하고 서까래만 얹으면 목수 일은 거의 끝난 셈이나 다름이 없으니 부처님의 가호로 속히 쾌차하시길 빕니다.”
노인은 눈으로 인사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관료들, 문병객을 전송하고 돌아서는 며느리 김씨의 눈에 이상한 것이 비쳤다. 한 줄로 가지런한 서까래가 두 줄로 보였다. 김씨는 처마 밑으로 바싹 다가섰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서까래는 분명 한 줄이었다.
김씨는 깨달았다. 집 안의 불빛과 집 밖의 불빛이 마주치면서 일어나는 그림자의 착시현상이었다. 더욱이 며느리 김씨의 눈에는 눈물까지 맺혀 있었던 것이다. “아, 그래 바로 저기야.” 며느리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시아버지 처소에 뛰어들어갔다.
며느리 김씨가 말했다. “아버님, 서까래가 짧게 다듬어졌다고 하셨지요?” “그래, 아가. 그렇지만 네가 웬일로 그리 밝게 웃느냐?” “아버님, 짧게 다듬어진 서까래에 다른 서까래를 겹쳐 대면 더 장엄하고 튼튼하지 않겠습니까?” 노인은 비록 여든 고개에 올라선 이였지만, 목수로 일생을 살아왔다. 처음에는 며느리의 말에 어리둥절했지만 마침내 그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구나, 그래.” “그렇지요, 아버님?” “그렇다마다, 정말 네가 나를 일깨워 주었구나. 원 이렇게 고마울 데가.” 노인의 눈앞에 날아갈 듯한 대웅전의 자엄한 모습이 나타났다. 노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렇구나, 아가. 부연하면 된다.
서까래를 달아 이어 놓으면 육중하면서도 날렵한 모습이 되겠구나. 부연한 그 지붕의 멋을 누가 감히 흉내낼 수 있겠느냐. 어서 채비를 해 다오.” 며느리 김씨는 적이 걱정되었다. “아버님, 아직 건강이 회복되시지 않았는데. 더욱이 지금은 야심한 밤이옵니다.”
“아니다. 우선 가서 부연목을 재 봐야겠구나.” 노인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활기가 넘쳤다. 온몸에 달빛을 받으며 바쁘게 움직이는 사보라 노인의 모습은 한마디로 아름다움이였다. 기둥과 기둥 사이를 재고, 대들보에서 처마 끝을 재는 사보라 노인의 흰 수염이 더욱 멋지게 보였다. 그는 신들린 사람처럼 부연목을 켜기 시작했다. 노인의 표정은 엄숙하면서도 진지했다. 한마디로 예술을 표출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세원진 도갑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부연식 지붕 건물이 됐다.
며느리 김씨의 지혜로 생긴 서까래라 해서 ‘부연’이라고 했다. 지금은 이 도갑사 대웅전이 ’79년도 중창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도갑사 해탈문은 국보 제50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