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사 바위 틈에 피어난 버선꽃

수덕사 바위 틈에 피어난 버선꽃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이 덕숭산에 자리한 수덕사는 경허, 만공스님이 한때 주석을 했고, 견성암은 일엽스님이라는 여승이 아름다운 문필을 휘둘렀던 곳으로 유명하다.

일엽스님은 인연으로 하여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대중가요가 나와 유행하자 수덕사는 여승들의 가람으로 인식되기까지 했다. 본디 이 절은 백제 법왕 1년(599)에 지명대사가 창건한 절로, 대웅전은 백제 무왕 1년(600)에 건축한 치밀하고도 정묘한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대웅전은 현재 국보 제4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대웅전 벽화는 고구려 영양왕11년(백제 무왕1년)에 담징이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절의 창건설화는 너무나도 슬픈 얘기를 담아 오늘에 전한다. 예산 읍내에 수덕이라는 도령이 있었다. 훌륭한 가문에다 문무를 고루 갖추었기에 그의 이름은 널리 퍼져 나갔다.

인근 지역에서는 물론 다른 지방에서조차 수덕 도령을 신랑감, 사윗감으로 점찍고 있었다. 하지만 수덕은 학문을 계속해야 한다며 혼인을 미루었다. 하루는 수덕 도령이 시종들을 데리고 덕숭산으로 사냥을 갔다. 멀리서 보기에는 그저 밋밋하고 별로 볼품없어 보이는 산이 실제 산속으로 들어와 보니 그게 아니었다.

급한 여울과 완만한 계곡이 조화를 이루었고, 험한 산 바위 절벽과 아름드리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곳곳마다 수억만 년을 지나오면서 역사의 아픔들을 간직한양 설해목들은 벌렁벌렁 드러누워 있었다. 금방이라도 원가 튀어나올 것 같은 음습함도 있었고 마냥 드러누워 뒹굴고 싶은 풀밭들도 질펀하게 깔려 있었다.

수덕 도령이 시종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참 명산 중의 명산이로구나.’ 바로 그때였다. 수덕 도령의 말소리에 놀랐는지 나무 밑에서 뭔가 후다닥 뛰어 나가는 게 있었다. 노루였다. 노루는 한참 엉덩이를 자랑하면서 뛰어가더니 활 한 바탕 되는 거리에 멈추어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이미 수덕 도령은 화살을 등 뒤에서 뽑아 활시위에 걸어 당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분명히 노루 앞에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수덕 도령은 눈을 씻고 보았지만 틀림없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시종들은 어찌하여 화살을 쏘지 않느냐고 채근을 했다. 수덕 도령이 말했다. “저기 저 노루 앞에 여인이 보이지 않느냐? 내 눈에는 분명 사람으로 보이는데??.” 그렇게 말하는 사이 노루는 간 곳이 없고 여인만이 남아 있었다.

수덕 도령은 활을 거두었다. 곁에 있던 할아범이 아쉽다는 투로 말했다. “도련님, 어찌하여 활을 거두십니까? 시위만 놓으면 노루를 잡을 수 있었는데.” 수렁 도령이 말했다. “이 산골짜기에 저토록 아름다운 처녀가 있었을까? 참 희한한 일도 다 있구나.

어찌하여 이 산중에 들어왔지?” 그제서야 할아범과 모든 시종들은 수덕 도령이 가리키는 방향에 처녀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미인도 미인이려니와 인가도 없는 첩첩 산중에 어찌하여 여인이 홀로 있느냐는 거였다. 그중에 누군가 말했다. “혹시 여우가 둔갑한 것 아닐까요? 여우가 천년을 묵으면 사람으로 둔갑할 수 있다고 하던데. 그것도 대개 여자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다른 시종이 말을 받았다. “맞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여우 같고 남자는 늑대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도련님 화살을 한 번 쏘시지요. 둔갑한 여우는 죽으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고 하니까요.” 수덕 도령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시종들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정말 시종들 말대로 여우가 둔갑한 것 아닐까?> 그러나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만약에 너희들 말대로 화살을 쏘아 놓고 그것이 실제로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시종들은 그 말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추측이 실제로 나타날 경우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에 하나 추측이 빗나가 진짜 사람을 죽인다면 그것은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수덕 도령이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은 그만 돌아가자.” 시종들은 모처럼의 흥분과 호기심으로 더 사냥을 하고 싶었지만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수덕 도령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뛰는 가슴을 억제할 길없었다. 지금까지 많은 여인들이 구혼을 했고 만나자고 했지만 학문을 계속한다는 마음으로 모두 거절해 왔다. 그리고 아직까지 한 번도 마음을 빼앗은 여인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그 산중에서 만난 여인은 말 한마디 건네 보지 않았지만, 야릇하게도 수덕 도령의 마음을 꽉 채우고 있었다.

참으로 모를 일이었다. “혹시 천생연분은 아닐까?” 천생연분을 왜 하필이면 그 첩첩 산중에서 만나겠는가. 그는 자신의 신분이 조금은 야속했다. 평민이라면 누구하고나 관계없이 남녀가 서로 만나 사랑하는 것이 허물이 되지 않았다. 평민들 세계에서는 자유연애가 허용되었다. 그러나 자신은 양반집 자제였다.

양반 가문에서는 부모가 정해 준 인연 외에는 설사 부부가 되었다 하더라도 남들 앞에서 내놓고 사랑하는 감정을 보일 수 없었다. 수덕 도령은 후회했다. 양반의 자제라 하더라도 만나서 얘기나 해 볼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산을 등지고 내려온 지도 오래 되었고 집에 이르니 낮이 차지했던 공간을 밤에게 내주고 있었다.

낮과 밤은 서로 교대해 가며 자연스럽게 공간을 채우고 있었지만, 수덕 도령의 마음속에 한 번 깊이 박힌 그 산중 미인은 교대할 줄 몰랐다. 책을 펼쳐도 눈에 보이는 것은 여인의 모습일 뿐, 글자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답답한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는 사랑의 열병을 앓기 시작했다. 그리움의 열뇌를 가득 안고 뒹굴었다. 수덕 도령은 할아범을 시켜 그 여인의 행방과 거처를 알아보도록 했다. 양반집 자제의 체통보다는 사랑의 열병이 더욱 무서웠던 것이다. 할아범은 여러 날 만에 그 여인이 누구이며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아냈다. 수덕 도령은 할아범이 도착하자마자 급한 대로 여인에 대해 물었다.

“할아범이 수고한 인사는 차차 하기로 하고, 그래 그 여인이 누구며 어디 산다고 하던가?” “네, 도련님. 그 여인은 바로 건너 마을에 사는데 부모를 일찍 여의고 홀로 지내고 있다 합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녀는 예의범절이 뛰어나고 문장에 능할 뿐 아니라, 미모와 덕을 겸비하여 이웃 마을까지 혼담이 줄을 잇고 있다 하옵니다.” “그래서?” “하지만 여인은 아직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그래, 이름이 뭐라 하던가?” “덕숭 낭자라고 합니다.

금년 나이 열여덟이라 하고요.” 할아범의 얘기를 듣고 난 수덕 도령은 우선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무엇보다도 혼담이 줄을 잇지만 거절을 한다는 것이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이었다. ‘아무리 좋은 구슬이라도 꿰어야 보배 아닌가. 그녀가 아무리 아름답고 모든 것을 갖춘 제일의 신부감이라 하더라고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 된다. 수덕 도령은 책 읽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훈장의 눈을 피하고 부모님과 집안 어른들의 눈을 피해 가면서 덕숭 낭자의 집 주의를 서성거리곤 했다. 며칠째 문 한 번 두드려 보지 못하고 서성대던 수덕 도령은 용기를 냈다. 남자 대장부로서 애간장만 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은 떨렸고 안정이 되질 않았다. “실례지만 안에 계시오니까?” 안에서 가냘픈 여인의 소리가 문틈을 비집고 살그머니 새어 나왔다.

분명 덕숭 낭자의 목소리였다. “뉘신지요? 이 야심한 밤에!” 수덕 도령은 할 말을 잊어버렸다. 주저 주저하고 있는데 다시 한 번 안으로부터 소리가 있었다. 문은 열리지 않은 채였다. “이 야심한 밤에 뉘신지요?” ‘야심한 밤’이라는 말이 이상하게도 수덕도령에게는 비수처럼 날카롭게 날아와 꽂혔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저…..저, 소생은 이웃 마을에 사는 수덕이라 합니다.

야심한 밤에 실례인 줄 압니다만, 저…..꼭 만나 뵙고 싶어서 이렇게 왔습니다. 문이 비스듬히 열리면서 덕숭 낭자가 외씨 같은 버선발을 살짝 드러냈다. 수덕 도령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짓누르고 서 있었다. 마침 초가을 달이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나와 두 사람의 행동을 엿보고 있었다. 덕숭 낭자가 말했다. “소녀는 혼자 사는 사람입니다.

하여 도령을 맞이할 수 없음을 용서하소서.” 수덕 도령은 생각보다 마음이 급했다. “낭자, 낭자와 혼인하고 싶습니다. 저의 구혼을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초면에 구혼이라! 너무 빠르다고 생가지 않으십니까? 더욱이 지체 높으신 도련님께서 이 미천한 소녀를 선택하심에 일말의 여유도 주지 않으시고요.” 수덕 도령은 아차 싶었으나 이왕 엎지른 물이 되어 버렸다. 성급한 말 때문에 일을 그르치지나 않을까 걱정이었다. 그는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않혀 여유를 갖고 생각해 달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튀어나온 말을 달랐다.

“만약 낭자께서 저의 구혼을 거절하신다면 나는 죽음으로써 내 뜻을 표할 것이오다.” “소녀, 도련님의 뜻을 모르는 바 아니오나 아직 나이가 어리옵니다. 또한 도련님과 신분도 어울리지 않고요. 그러니 좀더 여유를 주시면 생각해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낭자, 덕숭 낭자. 나는 그대를 한 번 본 뒤로는 손에서 책을 놓아 버렸습니다. 벌써 두 달이나 됩니다.” 덕숭 낭자가 짐짓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나를 보셨다고요?” “전에 사냥하러 산에 갔다가 거기서 처음으로 낭자를 보았습니다.” 수덕 도령은 그날의 상황을 비롯하여 지금까지 모든 전개과정을 낱낱이 얘기했다. 덕숭 낭자도 다소곳이 들었다. 덕숭 낭자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만 들어 주신다면 소녀는 도련님과 혼인을 약속하겠습니다.” 수덕 도령은 귀가 번쩍 뜨였다.

“그 조건이 무엇인지요? 어서 말씀해 보십시오. 내 그대를 나의 아내로 맞는 일이라면 어떠한 일이라도 하오리다.” “저의 부모님은 뜻하지 않은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의 영혼을 위로해 드리고 싶습니다. 저를 위해 집 근처에 절을 하나 지어 주셨으면 합니다.” “좋습니다. 집 근처라면 어디쯤이 좋겠습니까?” “처음에 저를 보셨다는 그곳에 지으심이 적당할 줄 아옵니다만??.” 이렇게 해서 절을 짓는 일이 시작되었다.

집안의 어른들도 반대했고 부모님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동네에서는 수군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덕 도령은 개의치 않았다. 예산 읍내는 물론 인근지역에도 수덕 도령의 집안은 갑부로 알려져 있었고 지체도 높았다. 수덕 도령은 많은 사람들을 사서 기둥을 다듬고 서까래와 대들보를 준비하였다. 기와를 굽고 주춧돌을 갖추었다.

그리고 한 달 만에 절이 완공되었다. 참으로 빨리 지은 것이었다. 절이 완공되자 수덕 도령은 덕숭 낭자에게 한달음에 달려갔다. “덕숭 낭자, 절이 완공되었습니다. 단청까지 막 끝내고 오는 길입니다. 한 번 같이 가서 보시지요.” 덕숭 낭자는 반가워하는 기색도 없이 덤덤히 말했다. “너무 쉽게 지으셨군요. 하지만 저걸 보십시오.” 수덕 도령은 덕숭 낭자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방금 단청을 끝내고 온 절이었다. 절에 불이나 삽시간에 잿더미로 화하고 말았다. 수덕 도령은 부처님을 원망하면서 울음을 삼켰다. 덕숭 낭자가 위로하면서 말했다. “도련님, 절을 지으시려면 한 여인을 탐하는 마음을 초월하여 오로지 일념으로 몰입해야 합니다. 부처님만을 생각하시고 다시 지으십시오.” 수덕 도령은 새로운 각오를 했다. 그는 다시 절을 짓기 시작했다. 오로지 부처님만을 생각하며 일을 했다.

그러나 순간순간 일어나는 덕숭 낭자에 대한 그리운 정을 어쩔 수 없었다. 한 달이 지나 절은 마침내 완성단계에 접어들었다. 이제 단청을 할 차례였다. 그때 뜻하지 않은 불이 스스로 일어나 지금까지 지어 온 대웅전을 또 홀랑 태워 버리고 말았다.

수덕 도령은 정성이 부족해서라 생각했다. 부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가끔씩 일어나는 덕숭 낭자에 대한 그리움의 정 때문에 화재가 난 것으로 알았다. 수덕 도령은 화재가 난 그날 다시 건축불사에 들어갔다. 그는 몇 번이고 완전해질 때까지 정성을 들여 다시 짓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아홉 번 화재가 나면 열 번이라도 다시 짓겠다는 그의 굳센 결의는 어느 누구도 말릴 수가 없었다. 또 한달이 지나자 이루 말할 수 없이 신비롭고 장엄한 대웅전이 형체를 드러냈다. 수덕 도령은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그 감격은 덕숭 낭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을 그토록 아름답고 장엄하며 예술적으로도 뛰어나게 지은 데 대한 자부심이었다. 수덕은 흡족한 마음으로 합장했다.

“오! 부처님이시여. 이제 당신의 집은 완성되었나이다. 이제 이 대웅전에서 당신의 위대한 가르침이 영원히, 영원히 이어지게 되었나이다. 아! 장엄하옵니다.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이 대웅전은 오로지 당신의 가호로 이룩된 것이옵니다.

이토록 아름답고 예술적인 대웅전은 전에도 없었고 현재도 없으며, 앞으로도 이 지상에 다시 없을 것이옵니다. 부처님, 저의 소원도 이제야 이루어지게 되었나이다. 부처님…” 곁에서 보고 있던 덕숭 낭자도 합장한 채 기도를 올렸다. “부처님, 이제 수덕 도련님의 원력으로 소녀의 소원이 이루어졌사옵니다.

앞으로 소녀는 온갖 정성을 다 기울여 수덕 도련님을 모시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저희들을 증명하여 주시옵소서…” 수덕 도령과 덕숭 낭자는 가족과 일가친척들의 축복 속에서 혼인의 예를 갖추었다. 새로 지은 대웅전에서 올리는 예식 또한 간소하면서도 장엄스러웠다. 예식을 마치고 내려와 신방을 꾸몄다.

촛불이 아스라히 실내를 비치고 있었다. 분위기는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다. 수덕 도령이 덕숭 낭자의 옷을 풀려 하자 덕숭 낭자가 약간 뒤로 물러나 않으며 조용히, 그리고 냉정하게 말했다. “부부간이지만 잠자리는 따로 해 주셨으면 합니다.” 수덕은 느닷없는 덕숭 낭자의 행동과 말에 주춤했다. 그가 말했다.

“부부가 된 이상 같은 방, 같은 잠자리를 쓰는 것은 옛부터 내려오는 인륜의 기본입니다. 또 그렇게 하기 위해 혼인도 하는 것이고요.” 수덕 도령은 덕숭 낭자의 대답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는 듯 말을 마치자마자 덕숭 낭자의 손을 덥썩 잡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뇌성벽력이 천지를 뒤흔들 듯했다. 순간적으로 놀라며 뒤로 물러선 수덕 도령은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덕숭 낭자, 즉 신부가 사라진 것이다. 대신 그의 손에는 신부의 버선 한 켤레가 쥐어져 있었다. 그가 버선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신방 안에 웬 난데없는 커다란 바위가 나타났고 그 바위 틈새에서 마치 신부의 버선과 꼭 닮은 하얀 꽃이 돋아났다.

주위를 둘러보니 신방도 없어졌고 보이는 것은 바위와 버선처럼 생긴 하얀 꽃, 그리고 울창한 숲이었다. 수덕 도령은 깨달았다. 애욕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덧없는 것인가를. 사랑의 힘이 얼마나 숭고하고 경외스러운 것인가를. 그는 덕숭 낭자를 사모하는 마음 하나로 절을 세 번이나 지었다.

바로 그 사랑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증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애욕으로 변할 경우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또한 실제로 증명한 셈이었다. 그 후 수덕은 절 이름을 ‘수덕사’라 부르고 수덕사가 있는 산이름을 덕숭 낭자의 이름을 따서 덕숭산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 덕숭 낭자는 다름아닌 관세음보살의 화현이라고 전해졌다. 지금도 수덕사 부근 바위 틈에서는 이른바 ‘버선꽃’이 해마다 피고 있는데 이를 ‘관음의 버선꽃’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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