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살아난 예술혼 지극한 기도의 영험은 마치 한편의 소설처럼 드라마틱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영험은 종종 그 기도자의 세계관까지 변모시키는 큰 위력을 지닌다. 이탈리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불교조각가 같은 경우다.
한기늠씨는 평범한 생활을 하던 90년초의 어느날 모든 것을 바꾸기로 결심한다. 30대 중반의 여성으로 잘 나가던 꽃꽂이 강사직도 버리고 이탈리아로 미술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한때나마 노력했던 조각공부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독실한 불자였던 한씨는 이탈리아에서 자신의 전공분야를 불교조각으로 선택했다. 평소에 성실하고 노력파였던 한씨의 조각공부는 어느새 상당한 수준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유학을 떠나 2년여가 되는 어느날부턴가 부처님상 조각에 대한 구상이 딱 멈춰버리는 답답함에 빠져버렸다. 답답해진 한씨는 겨울방학을 이용 한국으로 귀국한다. 그때부터 한씨는 큰벽에 가로막힌 자신의 예술혼을 깨트리기 위해 평소 인연있는 스님들을 찾아나선다.
진주 두방사의 종불사 회향식, 조계사 법회 등에 두루 참여한다. 그러나 여전히 조각에 대한 구상도 떠오르지 않고 답답함은 계속됐다. 그러던 어느날 한씨는 인연있는 스님을 따라가 제주도 약천사 굴법당을 만나게 된다.
굴법당에 들어선 순간 한씨는 나도 굴법당을 만들어 수행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오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한씨는 그곳에서 2박 3일간 하루 삼천배의 정진을 했다. 굴법당 정진 마지막 날인 3일째 바람결을 타고 “부처님을 봉안하고 가소”라는 어느 불자의 말에 알 수 없는 환희심을 느꼈다.
그녀는 스님에게 부탁해 작고 아담한 백의관음입상(33cm)을 봉안했다. 그리고 부산의 어느 사찰에서 점안식을 봉행한 후 이탈리아로 모셔간다. 자신의 방에 백의관음상을 봉안한 한씨는 매일 아침 4시 목욕재계와 함께 108배, 새벽예불을 시작한다.
1백일째 되는 어느날 꿈속이었다. 그녀는 진주 문산 어느 시골장터에서 자신이 8척의 수월관음보살의 모습이 된 것을 발견한다. 꽃으로 장엄한 꽃수레를 타고 수월관음보살의 모습을 한 자신의 뒤를 빈부 귀천을 떠나 수없이 많은 남녀들이 끝없는 행렬을 이루며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염송하며 따르지 않는가. 그런 다음날부터 한씨 마음속에는 수없이 많은 부처님의 상호가, 수없이 많은 보살들의 상호가 떠오르고 돌을 잡은 손 또한 거침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을 짓누르던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치워지고 그 자리에 부처님과 보살들이 가득 자리잡은 것이다. 관세음보살의 가피는 한씨에게 계속이어진다. 2년이라는 짧은기간에 완성된 작품들을 들고 94년 한국서 첫 전시회를 갖는다.
대구, 서울, 부산으로 이어진 그녀의 한국 전시는 불교계내 인사들과 수없이 많은 불자들의 발길로 이어졌다. 조각계 이변을 낳은 첫 전시가 대성황으로 끝났다. 그뒤로 그녀의 행운은 계속 이어진다.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각종 국제전에 초대되는 행운을 안은 것이다.이탈리아에서 불교조각 공부를 계속 이어가는 한씨는 지금도 백의관음입상에 매일 108배 정진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