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년 평안남도 양덕군에서 영호 박한영(映湖 朴漢永) 스님은 1870년 전북 완주에서 태어나 19세에 전주 위봉사에서 출가, 26세 때에는 설유 처명스님의 법을 이어 영호(映湖)라는 법호를 얻고 석전(石顚)이라는 시호(詩號)를 얻었다.
1910년 한일합방 후 우리불교를 일본불교에 합종하려는 친일승려들에 맞서 조선불교를 끝까지 지켰고, 서울 안암동 개운사에 대원불교강원(大圓佛敎講院)을 세워 청담, 운허, 조정현 등 걸출한 승려들을 배출했으며 서정주, 신석정, 조지훈, 김달진, 김어수 등 기라성 같은 한국의 대표시인들을 길러냈다.
조선불교최고지도자인 교정(敎正)으로 추대되었고, 불교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하며 우리 불교계의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 전심전력하다가 1948년 전북 내장사에서 세수 79세, 법랍 61세로 열반에 들었다.
한영스님은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제합병 된 후 망국의 한을 안고 서울 안암동 개운사에 불교강원을 세웠다.
이름하여 대원불교강원(大圓佛敎講院). 조선불교를 조선불교 답게 지키고 살리는 길도 인재양성에 달려있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일도 인재양성에 달려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한영스님은 조선불교계에서 선교(禪敎) 양종에 달통한 분으로 이미 정평이 나 있었고 특히 교학에는 불교경전은 물론 유교, 도교, 역사, 천문, 지리까지 훤히 꿰뚫고 있어서 당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선비, 오세창, 정인보, 최남선, 변영로, 홍명희, 권동진, 여귀형 등이 수시로 한영스님을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이렇게 유명한 분이 강원을 열었다고 하니 팔도강산 곳곳에서 젊은 학인들이 개운사로 모여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어서 개운사의 대원강원에는 30여명에서 40명에 이르는 학인들이 북적거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 많은 젊은 학인들을 먹이고 재우는 일이 보통일이 아니었다.
잠자리가 좁으니 칠성각까지 학인들 숙소로 이용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뭐니뭐니해도 먹이는 일이었다.
당시 대원강원에 공부하러 오려면 일인당 매월 쌀 소두 세말씩을 가져오게 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학비를 따로 받는게 아니라 자기가 한달 먹을 식량을 자기가 짊어지고 와서 공부하면 되었다.
그러나 일인당 한달에 가져와야 하는 쌀 소두 세말이 제대로 들어오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니 강원에서는 늘 식량이 모자라기 일쑤였으나 그렇다고 어느 사찰에서 도와주는 일도 없었다.
모두가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시절이었으니 가정에서나 사찰에서나 넉넉한 밥을 먹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꿈같은 일이었다.
식량만 모자란 게 아니었다.
40여 명의 젊은 학인들이 무섭게 먹어 대는 판이라 강원에는 그야말로 소금, 간장, 된장, 고춧가루, 시래기, 깨소금, 식초, 빨랫비누 등 무어 한가지인들 남아나는 게 별로 없었다.
대원강원 공양간 살림을 맡고 있던 공양주 법공은 견디다 견디다 못해 어느날 한영스님께 담판을 하게 되었다.
“스님, 강원 문을 그만 닫고 학인들을 모두 돌려 보내주십시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매월 내기로 되어 있는 식량조차 가져오지 않으니, 쌀도 없지요,
장작도 없지요, 소금도 없지요, 간장도 없지요, 된장도 없지요,
깨소금도 없지요, 식초도 없지요, 하다 못해 묵은 김치도 다 떨어지고 없으니 무슨 수로 학인들 밥을 해먹일 수 있겠습니까?”
“허 그 녀석 참 뭐가 그리 없는 게 많다고 잘도 주워 세는구나 그래. 내가 보기에는 한가지 만 있으면 되겠구먼””아이구 아닙니다요 스님. 정말이지 하나에서 열까지 모조리 다 없다니까요 스님.”
“야 인석아, 옛날 선비 얘기 듣지두 못했냐? 없는 게 많다고 수십 가지를 주워 셌지만 그거 모두 다 돈 한 가지만 있으면 다 해결되는 게야 이 멍청한 녀석아!”
한영스님은 벽장을 열고 아주 소중히 간직해오던 옛날 책 한권을 조심스럽게 꺼내어 싸들고 효자동에 있던 최남선의 사설 도서관 일남각으로 갔다.
“여보시게 육당, 그대가 이 책을 꼭 갖고 싶다고 하셨겠다?
오늘은 그 소원을 성취하게 되었으니 돈 3십 원만 나에게 주시고 이 전적을 갖도록 하시게.”
한영스님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귀중한 옛 전적을 육당 최남선에게 강매(?)해서 그 돈으로 대원강원 학인들의 허기를 달래 주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한영스님의 제자사랑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육당 최남선은 뒷날 스님 모르게 그 옛 전적을 다시 개운사로 가지고 와서 그 자리에 그대로 넣어두게 했다.
물론 이 일을 나중에 알고 한영스님이 노발대발 하셨지만, 육당 최남선은 한영스님을 부모님 모시듯 극진히 모셨다.
어디 그뿐이었으랴.
육당 최남선은 한영스님을 모시고 금강산, 묘향산, 한라산 등 팔도강산 유람을 여러 번 다녀오기도 했는데 한번은 한영스님과 함께 금강산 장안사에 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한 일도 있었다.
당시 한영스님은 조선불교임제종 교정이셨으니 지금으로 말하면 종정스님이신 셈이었다.
영호스님과 최남선은 등산객 차림으로 금강산 장안사에 당도했는데 영호스님이 법당참배를 마친 뒤 종무소에 들러 객실 한 칸을 부탁했다.
그러나 이 노스님이 이 나라 불교계 최고의 어른이신 교정스님인줄 모르는 장안사 종무소 승려는 일언지하에 객실이 없다고 문전박대를 했다.
그러나 영호스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대로 물러나와 어디 바위굴 틈에서라도 하룻밤 지내자는 게 아닌가.
공무(公務)로 온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금강산 유람객으로 왔으니 교정이라는 신분을 굳이 밝힐 필요가 없다는 게 한영스님의 고집이었다.
그러나 육당 최남선이 참지 못하고 종무소에 가서 대성 일갈, “바로 저 노스님이 조선불교 교정이신데, 세상에 그래 객실 한 칸 없다고 문전박대를 할 수 있느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장안사가 발칵 뒤집힌 건 물론이었고 그 바람에 교정스님이 동찬노숙을 가까스로 면하게 되었다.
아마도 육당 최남선이 밝히지 않았다면, 영호스님은 그대로 바위굴을 찾아 동찬노숙을 기꺼이 즐겼으리라.
1930년대, 박한영 스님은 조선불교계의 가장 높은 어른이신 교정(敎正)을 맡고 있었다.
지금 같으면 종정(宗正)스님이신 셈이었다.
또한 한영스님은 대원불교강원 강주스님이셨고 지금의 동국대학교 전신(前身)인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을 맡고 있었다.
한영스님은 당신이 대원불교강원에서 가르친 젊은이들 가운데 학업을 계속시킬만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는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진학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가난한 제자들의 학비를 어떻게 마련하느냐.
이 당시만 해도 학생이 부업을 할 만한 업소도 없었거니와 막노동할 자리도 별로 없었다.
한영스님은 생각 끝에 제자 몇 사람을 데리고 효자골 최남선의 도서관 일남각을 찾아갔다.
육당 최남선이 깍듯이 모셔들였다.
“어인 일로 여기까지 행차하셨습니까요, 스님?”
“육당에게 복 짓는 기회를 좀 만들어 주려고 그래서 일부러 왔지.”
“어이구 스님, 저를 위해서 일부러 오셨다구요?”
“그래. 자네, 이 아이들 일을 좀 시키고 학비를 좀 대주시게나.”
“일을 시키고 학비를 대 주어라, 그런 말씀이십니까요 스님?”
“그래. 이 아이들 책을 베껴 쓰는 일을 시키면 아주 똑부러지게 잘 할 걸세.”
“아 예 잘 알겠습니다요 스님.”
이 무렵, 육당 최남선의 사설 도서관 일남각에는 귀중한 옛 책을 빌리러 오는 선비들이 무척 많았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책을 복사할 수 있는 기계가 없었기 때문에 필요한 책은 일일이 사람 손으로 베껴 쓰는 도리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도서관 일남각에서는 책을 베껴주는 서생이 몇 명 일하고 있었다.
요즘 같으면 아르바이트생인 셈이었다.
책 한 페이지를 철필로 베껴 주면 1전이요, 책 한 페이지를 붓으로 베껴주면 3전을 주었다.
한영스님은 바로 이 아르바이트 일을 제자들에게 구해 주고 그 돈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한영스님은 이렇게 제자들의 일자리를 구해 주면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지만, 그러나 일자리 구해주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스님은 또 생각다 못해 쓸만한 젊은이 한명씩을 데리고 직접 후원자를 찾아 나섰다.
한영스님은 이재복 학인을 데리고 종로구 사간동에 있는 법륜사로 대륜 스님을 찾아 갔다.
“아이구, 교정스님께서 어인 일로 여기까지 큰걸음을 하셨습니까?”
“아 이 서울 장안에서 큰 일 한 가지를 부탁하려면 대륜스님 밖에 더 있겠소이까?”
“원 무슨 분에 넘치는 말씀을요. 그래 큰일이시라면?”
“좋은 일에 돈을 좀 쓰십시오.”
“좋은 일이라 하시면…?”
“저 아이, 장차 쓸만한 물건인데 스님께서 학비를 좀 대주셨으면 해서 데려 왔습니다.”
“예? 하,학비 말씀이십니까?”
“우리 불교계에 큰 인물이 될만한 젊은이입니다.”
“알겠습니다. 교정 스님께서 데려 오셨을 적에야 쓸만한 사람이겠지요.”
“도와주시겠습니까?”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교정 스님의 높으신 뜻이신데요…”
이렇게 해서 한영스님은 제자 한 명, 또 한 명을 후원자에게 묶어 주어 학업의 길을 열어주었다.
이에 박한영 스님 문하에서 스님의 도움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던 사람 중에는 대전의 보문학교 교장을 역임했던 이재복을 비롯해서 시인 서정주, 신석정, 조지훈, 이광수, 오장환, 김달진, 청담, 운허, 서경보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수두룩했다.
박한영 스님의 문하에서 공부했던 수많은 젊은이들 가운데서 유독 스님이 관심을 많이 가졌던 인물이 바로 서정주. 가출 청년이었던 서정주는 당시 톨스토이에 흠뻑 빠져 있던 ‘톨스토이 주의자’였다.
그래서 한영스님은 서정주의 별명을 ‘똘스또이 청년’이라 불렀다.
그런데 이 서정주는 당시 대원불교강원에서 불교공부를 하면서도 톨스토이이에 심취한 문학청년이라 스님 모르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서정주는 대원암 뒤꼍에서 숨어서 담배를 피우다 한영 스님께 들키고 말았다.
“여보게, 육당 최남선은 공부하기 위해 피우던 담배를 애써 끊었다네.”
그러나 그 후로도 서정주는 여전히 담배를 끊지 못하고 숨어서 피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한영 스님이 서정주를 불렀다.
“서정주, 자네는 불경 공부보다는 차라리 이런 책을 읽어보게나.”
그러면서 미리 준비한 두보의 시집과 이백의 시집을 서정주에게 주었다.
“아 아닙니다 스님. 불경공부를 좀 더 해보겠습니다.”
서정주는 스님께 죄송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한영스님은 가만히 고개를 좌우로 흔드시며 말씀했다.
“서정주 자넨 아무래도 중 되긴 틀린 사람 같고, 아마도 저기 저 하늘가를 훨 훨 날아다니는 황새 같은 그런 시인이나 될 사람이야.”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한마디 덧붙이셨다.
“그렇다고 황새처럼 그름처럼 두둥실 떠돌기만 해서는 시인이 되는 게 아닐세.
『능엄경』도 읽고, 『화엄경』도 읽고, 『선문염송』도 배우고, 『장자』도 보고, 제자백가도 접하고 이백도 만나고, 두보도 통달해야 시인다운 시인이 되는 게야. 자네 알겠는가?”
“예 스님, 명심하겠습니다.”
이 때 서정주는 크게 뉘우쳤고 크게 다짐했고, 그래서 결국 훗날 저 하늘가를 훨훨 날아다니는 황새 같은 그런 시인이 되었다.
한영 스님이 예견했던 대로, 그리고 한영 스님이 깨우쳐 준 그대로, 서정주는 기어이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시인 서정주’가 된 것은 대원암과 대원불교강원, 그리고 바로 거기에 저 크나큰 스승 박한영 큰스님이 계셨던 덕분이라고 늘 감사히 여기고 있었다.
영호 큰스님은 1900년대 초, 암울했던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중심에 서 계셨다.
특히 오세창, 정인보를 비롯 최남선, 이광수, 홍명희 등 재사·문사·지사들이 영호큰스님을 수시로 찾아뵙고 가르침을 주고받으며 우국충정을 달래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육당 최남선은 유독 영호 큰스님을 부모님보다도 더 극진히 모시며 보살폈다.
영호 큰스님은 세속 나이로 고희가 되시자 육당 최남선은 스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영호 큰스님의 시집(詩集) 『석전시초(石顚詩抄)』를 스님 모르게 출판하고, 그 책에 다음과 같이 말문을 썼다.
“내 석전 영호당 스님을 모시고 지내기 삼십여년. 백두산, 금강산, 묘향산, 지리산, 한라산 안간 곳이 없었으니 내 글이나 학문에 스님의 은혜가 스미지 아니한 곳이 없다.
아, 스님은 계향이 엄정하신 고승이시니 속인이 즐거움으로 삼는 일이란 스님은 모두 부족하다 하시고, 오직 담박한 생활과 무덤덤한 즐거움으로 오늘까지 지내 오셨다.
스님께서 ‘이제 늙었다’ 한마디 하심에 모두 스님의 춘추가 고희라는 것을 깨달았으니, 내 스님께 바칠 것은 없으나 마음만은 그냥 있을 수 없어 스님께서 강의의 여가로 기쁨에 넘쳐 음미하신 시(詩)를 살펴보니, 착상이 풍부하고 조예 또한 매우 깊다.
이 시는 스님의 참모습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므로 이 시고들을 정리하여 책을 펴내고자 함이니 그저 스님께서 이 시집을 펴보시고 지나오신 발자취를 상기하시어 빙그레 웃으시며 버리지나 않으신다면 만족할 뿐이다.
스님께서 오래도록 늙지 마시고, 나 역시 나약한 몸이나마 오래 보존한다면 스님을 받드는 길이 훗날도 있을 것이니, 이 느낌은 스님만이 아시리라.
기묘년 섣달 동주 최남선 아룀.”
『석전시초』에 쓴 정인보의 스님행장과 육당 최남선의 반문만 보아도 영호 큰스님의 학문적 깊이와 덕화가 얼마나 넓고 깊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해서 영호 큰 스님은 당시 모든 지식인 예술인들에게 흠모의 대상이었다.
영호 큰스님은 당시 뜻있는 모든 지식인, 예술인, 선각자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는 거룩한 스승이었지만, ‘가난’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대원불교강원에서는 해마다 늦가을이 되면 3십명, 4십명의 강원생들이 겨우내내 먹어야할 김장 담그는 게 큰일중에 큰일이었다.
그날은 모든 학인들이 너도나도 팔을 걷어 부치고 김장울력에 나서야 했다.
그리고 김장을 담근 그날 밤, 영호 큰스님은 어김없이 한밤중에 살며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셨다.
제자들이 김장울력에 지쳐 잠이 든 뒤, 스님은 큰 바가지에 소금을 듬뿍 담아들고 제자들이 담아놓은 김장독 뚜껑을 가만히 열어 소금을 한 움큼씩 듬뿍듬뿍 더 얹어 넣었다.
한겨울 내내 많은 식구들이 먹자면 보나마나 김치가 모자랄게 뻔하니, 미리 김치를 더 짜게 만들어 겨우내내 모자라지 않게 하려고 스님이 소금을 더 넣은 것이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되어 스님께 말씀드렸다.
“스님, 그렇지 않아도 짜게 담궜는데, 거기다 또 소금을 더 넣으시면 너무 짜서 어떻게 먹겠습니까 스님?”
“그런 소리 말어. 우리 젊었을 적 금강산에서 수행할 때에는 염조(鹽祖)만 겨우내 먹고 견뎠어!”
“염조라니, 그게 뭔데요 스님?”
“글자 그대로 ‘소금 할아버지’, 김치가 얼마나 짠지 그땐 김치라고 부르지 않고 염조라고 불렀다. 이건 염조는 커녕 염부(鹽父)도 안되는게야.”
영호 큰스님은 당시의 가난을 그렇게 견디시며 후학들을 키워냈다.
영호 큰스님은 평소 반찬은 아무것이나 참으로 맛있게 감사히 잘 잡수시는 분이었다.
제자들이 ‘오늘은 국이 싱겁습니다’하면 스님은 “그래, 국은 좀 삼삼한 듯해야 하느니라”하시며 맛있게 드셨고, 어떤 날은 제자들이 ‘오늘은 국이 좀 짠데요’하면 스님께서는 “그래, 국은 좀 짭짤한 듯해야 반찬이 되느니라”하시며 맛있게 드셨다.
짜면 짠대로, 싱거우면 싱거운대로 스님은 늘 흡족하게 여기시는 그런 분이었다.
영호 큰스님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라는 시가 당선되어 시인이 된 서정주를 해인사 보통학교 교사로 취직시키고, 이재복을 마곡사 강사로 내려 보내고, 서경보를 월정사 강사로 내려 보내고, 법공을 봉선사로 보내는 등 제자들의 갈 길을 하나하나 열어주었다.
그리고 1948년, 스님의 세속나이 79세가 되시자 전라북도 내장산 내장사로 내려가셨다.
당시 주지를 맡고 있던 매곡스님이 영호 큰스님을 알아보고 반갑게 맞았다.
“아이구 이거 큰스님께서 어찌 기별도 없이 이렇게 오셨습니까?”
“아 이 사람아, 늙은 중 오고 가는거 소리 소문 없어야 자네들이 편하지.”
“원 무슨 말씀이십니까요, 자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스님.”
“잠깐만. 내 절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주지스님 대답부터 들어봐야겠네.”
“무슨… 말씀이십니까요 스님?”
“나 여기서 세상 뜨려고 왔는데, 그래도 주지스님 귀찮지 않으시겠는가?”
“예에? 여기서…세상 뜨시겠다구요?”
“그래. 나 여기서 세상 떠도 괜찮으시겠는가?”
“그…그야 스님 뜻대로 하셔야지요. 아무튼 저희는 잘 모실테니 어서 안으로 드시기나 하십시오.”
“고맙네. 그럼 내 마음 편히 이절에서 지내다 세상 뜨려네.”
영호 큰 스님은 떠나야할 때를 아시고, 떠나야할 곳을 전라북도 정읍 내장사로 정했다.
그리고 스님의 뜻대로 그해 음력 2월 스무 아흐렛날 바로 그 내장사에서 학처럼 훨훨 열반의 세계로 날아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