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년 평안남도 양덕군에서 태어난 효봉 스님은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나와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판사가 되었고 평양 복심법원에 근무하다가 ‘사형선고’ 내린 것에 회의를 품고 홀연 가출, 부귀영화를 미련 없이 내던지고 엿장수로 변신하여 3년여를 떠돌다가 나이 38세에 금강산 신계사 보문암에서 석두화상을 은사로 삭발 출가하였다.
평생토록 무(無)자 화두를 들고 참구했던 효봉스님에게는 ‘엿장수 중’, ‘판사 중’, ‘절구통 수좌’, ‘너나잘해라 스님’등 별명도 많았는데, 별명마다에는 다 그만한 사연이 얽혀 있다.
첫 번째 얻은 별명 ‘엿장수 중’은 효봉스님이 평양에서 잠적, 가족에게도 행방을 알리지 않은 체 서울로 내려와 양복을 벗어서 판돈으로 엿판을 마련하고 엿장수가 되어 정처 없는 방랑길을 걷다가 나중에 엿판을 짊어진 체 금강산에 들어가 삭발 출가해 얻은 별명.
스님은 출가 당시 당신의 학력과 과거 행적을 완전히 숨기고 오직 ‘못 배운 엿장수’였다고 자신을 소개했으므로 모두들 스님을 ‘엿장수 중’으로 불렀다.
그 후 같은 법원에 근무했던 일본인 판사가 관광차 절에 왔다가 우연히 스님과 조우, 그동안 숨겨왔던 판사전력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스님은 ‘판사 중’으로 불리게 되었고 사찰의 법률문제만 생기면 효봉스님을 찾게 되었다.
이에 스님은 이 일이 번거로워 금강산을 떠나 남행길에 오르게 되었고 그 덕택에 남북분단 후 이 나라 불교계의 지도자가 되었다.
‘절구통 수좌’라는 별명은, 수행을 했다 하면 절구통처럼 꼼짝하지 않고 철저히 했으므로 엉덩이가 짓물러 깔고 앉은 방석이 엉덩이에 달라붙을 정도였다. 그래서 지독한 수좌라는 뜻에서 절구통 수좌로 불렀다.
이 땅에 6·25 동란이 일어난 후 해인사에까지 인민군의 발길이 뻗쳐 왔다.
모두들 피난을 갔지만 효봉스님과 효봉스님을 모시던 구산, 법흥, 원명, 보성 등 효봉스님의 문도들만 해인사에 남았다.
제자들이 피난을 가자고 말씀드려도 스님은 한사코 당신이 해인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니 제자들에게만 피난을 가라고 하였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를 차단당한 인민군들이 산속으로 숨어들어 비정규적인 유격전을 벌이느라 사찰이나 암자까지도 무사하지 못했다.
“스님, 어서 피난을 가십시다요.”
“늙은 중이야 별일 있겠느냐. 너희들이나 어서 피하거라.”
“스님께서 떠나지 않으시면 저희들도 피난가지 않겠습니다.”
“이것 보아라. 우리 해인사에서 키우던 소, 저 소를 버리고 어찌 사람만 피난을 갈 수 있겠느냐? 나는 절에 남아서 저 소 여물을 쑤어 먹이고 있을 것이니 너희들이나 어서 떠나거라.”
“아니 스님 소가 문젭니까요?”
“저 소는 지난 여름 내내 농사 짓느라고 죽도록 부려먹었다.
그런데 이제 저 소를 버리고 사람만 피난을 가잔 말이냐?”
“그러면 저 소를 끌고 가도록 하시지요 스님.”
“사람도 숨어서 피난을 가야 하는데 소를 끌고 어찌 피난을 갈 수 있겠느냐. 나는 소나 돌보면서 가야산을 지킬 것이니 너희나 어서 떠나거라.”
이렇게 한사코 피난을 거부했다.
그리고 결국 그날 밤 해인사는 패잔병들의 습격을 받고 문제의 그 소를 빼앗겼다.
패잔병들이 잡아먹기 위해 총으로 위협, 소를 빼앗아 산속으로 끌고 가버렸다.
소를 돌보기 위해 피난도 가지 않던 효봉스님은 망연자실…
다음날 별 수 없이 제자들의 성화에 이끌려 피난길에 나서게 되었는데 효봉스님은 몇 번이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소가 우리 대신 죽었구나. 그 소가 우리 대신 죽었어.”
효봉 스님은 제자들과 함께 피난길에 올라 부산을 거쳐 배를 타고 전라도로 가기로 했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통영 여수를 거쳐 해남 대흥사로 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도중에 뱃멀미를 하게 된 스님이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통영에서 일단 배를 내려 쉬어 가기로 했다.
그런데 통영 용화산에 도솔암이라는 암자가 마침 비어 있었다.
이 도솔암에서 며칠 쉬었다갈 요량이었는데 주저앉은 김에 아주 눌러 살게 되었다.
참으로 묘한 인연이었다.
효봉스님이 구산, 원명, 보성, 법흥, 인각 등 제자들과 함께 이 도솔암에서 머물며 정진하고 있으니 뒤이어 소문을 듣고 완산, 경산, 범용, 경운, 탄허, 성수 스님 등 한국불교계의 거물들이 줄줄이 내려와 머물게 되었으니 통영 도솔암은 한국 불교계의 거봉을 배출한 요람이 된 셈. 이 도솔암에 효봉스님이 제자들과 함께 머물고 계실 때의 일이었다.
어느 제자가 효봉스님께 다른 스님의 잘못을 고자질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자는 술마시지요, 담배 피우지요,
게다가 여색까지 하지요.
그러니 스님, 그 자에게 절대로 중요한 선임을 맡겨서는
아니 됩니다 스님.”
“허면 수행자가 술 마시면 안 된다는 말이지?”
“그렇습지요.”
“담배를 피워도 안 된다는 말이지?”
“그렇습지요.”
“여색을 가까이 해서도 안 된다는 말이지?”
“그렇습지요.”
“그걸 잘 알고 있으면……”
“…예 스님.”
“너나 잘해라 인석아!”
효봉스님이 버럭 소리를 지르셨다.
나쁜 짓인줄 알고 있으면 너나 잘하면 될 것이지, 어쩌자고 남의 허물만 고자질 하느냐고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남의 잘못을 고자질하는 제자에게는 어김없이 스님께서 버럭 소리를 지르셨다.
“너나 잘해라! 너나 잘해!”
그래서 나중에 효봉스님의 별명이 한 가지 더 늘었다.
‘너나 잘해라 스님’
효봉 스님께 한 신도가 여쭈었다.
“스님, 사람이 살아 생전에 좋은 일 많이 하면 극락에 가고, 나쁜 일 많이 하면 지옥에 간다고들 하는데 정말인가요?”
“아무렴 그렇구 말구.”
“그럼 정말로 극락과 지옥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요, 스님?”
“아무렴 있구 말구.”
“사람이 죽은 뒤에 저 세상에 가면 거기에 지옥도 있고 극락도 있다, 그런 말씀이십니까 스님?”
“아니야. 지옥과 극락은 저 세상에 있는게 아니구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있어.”
신도는 깜짝 놀랐다.
극락과 지옥이 저 세상에 있는게 아니라 바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있다니, 그런 말은 처음 들었던 것이었다.
“아니 스님, 이 세상 어디에 지옥과 극락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어디긴 이 사람아. 도처에 지옥이 있고 도처에 극락이 있지.”
그러시면서 효봉스님은 당신이 엿장수를 하면서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효봉스님이 출가하기 전 엿장수를 하면서 어느 해 겨울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그 마을 부잣집에 초상이 났다고 하여 그 집에 머물며 품삯을 받고 허드렛 일을 해주기로 하였다.
그 초상집은 아들만 다섯을 둔 부잣집이었는데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모여든 아들 다섯은 아버님 장례를 모시기도 전에 재산다툼을 벌여 형제간에 피가 낭자한 싸움판을 벌였다.
형제들은 서로 뒤엉켜 싸우고 여자들은 제각각 제 남편을 편들며 울고 불고 아우성이니, 초상집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생각을 해보시게. 바로 이런 초상집이 지옥이지, 지옥이 따로 있겠나?”
그제서야 신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효봉스님의 말씀을 듣고보면 지옥도 극락도 먼데 있는 것이 아니요,
지금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구석구석에 수없이 널려있다.
그리고 그 지옥과 극락은 바로 우리가 우리 손으로 스스로 만들고 있다.
아직도 불교집안에서는 ‘선승(禪僧)’이라면 좋아하고 ‘학승(學僧)’이라면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어느 유명했던 큰스님을 ‘동양최고의 학승이었던 00 큰스님’이라고 표현하면 그 큰스님의 교도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 왜 ‘학승’이라고 지칭했느냐며 항의하고 ‘선승’으로 표현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그만큼 교학(敎學)을 가볍게 여기고 참선만을 귀히 여겨온 우리나라 불가(佛家)의 관습 때문이다.
효봉스님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1950년대에도 참선우위, 교학경시의 풍조가 불교계를 휩쓸고 있었다.
어느날 한 제자가 효봉스님께 여쭈었다.
“스님, 흔히 삼학(三學)을 담아 불도를 이루라고 말씀하십니다마는 삼학 중 어느 것이 으뜸입니까?”
삼학(三學)이란 계율(戒律), 선정(禪定), 지혜(知慧) 세 가지를 말함인데 이 세가지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중하냐는 물음이었다.
평생토록 무(無)자 화두를 놓은 적이 없는 효봉스님은 자타가 공인하는 선승이었으므로 계·정·혜 삼학 가운데서 두말할 필요도 없이 ‘선정’이 으뜸이라고 말씀하실줄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효봉스님은 결코 어느 한편에 치우지지 아니한 채 다음과 같은 명담을 남겨 주셨다.
“계·정·혜 삼학을 집 짓는데 비유하자면, 계율은 집터요,
선정은 재목이며, 지혜는 집 짓는 기술과 같은 것.
제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도 재목이 없으면 집을 지을 수 없으며 또 제 아무리 재목이 풍부하고 기술이 뛰어나도 집터가 없으면 집을 지을 수 없으니, 그러므로 삼학은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 계·정·혜를 함께 닦아야 불도를 이룰 것이야.”
효봉스님은 선승이었으면서도 결코 교학을 업신여기거나 폄하하는 일이 없었다.
다만 참선과 교학이 어떻게 다른가 분명히 선을 그어준 일이 있었다.
효봉스님이 금강산에서 참선수행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이 당시에도 불가에서는 참선하는 수좌들은 교학을 공부하는 승려들을 ‘학승’이라 부르며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었고, 교학을 공부하는 스님들은 참선하는 수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 교학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가부좌만 틀고 앉아 부처가 되겠다니 참선만 해가지고 어떻게 깨달을 것이냐’ 하는 그런 시선이었다.
바로 이런 분위기가 팽배했던 때, 하루는 유명한 교학승이 효봉스님께 말을 걸었다.
다시 말하자면 ‘참선 만이 제일이다’하는 선승에게 교학승이 시비를 한 번 걸어본 셈이었다.
“스님, 소승이 알기로 부처님의 가름침인 교학을 익히는 것이나 참선수행을 해서 불도를 깨닫는 것은 큰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는 것과 같다고 여겨지옵니다.”
“그, 그래서요?”
“저희가 교학을 공부하는 것은 그물을 쓰는 법을 익히는 것과 같다고 생각되옵니다마는 선가에서는 어찌하여 교학을 도외시한 채 그물쓰는 법을 배우지 아니하고 고기를 잡을 수 있다고 고집하시는지요?”
“스님께서 비유를 아주 잘 드셨소이다.”
효봉스님은 우선 교학승의 말을 듣고나서 칭찬부터 하셨다.
그리고 천천히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교학만 고집하는 분들은 그물로 고기를 잡으려 들겠지요.
헌데, 선가에서는 바닷물을 통째로 한 입에 삼켜버리니 무슨 그물이 따로 필요하겠소이까?”
“예, 예? 바…바닷물을 통째로 한 입에 삼켜버린다구요?”
이 일화는 우리나라 불교계 최고의 학승이자 선객이었던 이운허 큰스님이 제자들에게 숨김없이 들려준 것인데,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선객은 무조건 존경부터 하게 되었다고 할만큼 효봉스님의 선지가 드높았던 셈이었다.
효봉 스님은 6·25 피난길에 인연을 맺은 경남 통영의 도솔암에 머물고 계셨다.
이 무렵 우리나라 불교계에서는 동산 스님, 청담 스님을 주축으로 불교정화운동이 오월의 불길처럼 번지고 있었다.
효봉 스님도 흔쾌히 불교정화운동에 동참했고 그 일로 서울에 자주 올라와 안국동 선학원에 머물게 되었다.
이때 선학원에는 불교정화운동을 지지하는 전국의 청정 비구, 비구니 스님들이 자주 드나들게 되었는데, 선학원이야말로 청정 비구 스님들의 유일한 의지처요, 불교정화운동의 산실이며 구심점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별의별 비구 스님들이 서울에만 올라오면 선학원에 머물게 되었고 방 한칸에 여러 스님들이 함께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당시 선객 가운데 박금봉 스님이라는 분이 계셨다.
금봉 스님은 도(道)가 높고 선지가 깊어 모두들 알아 모셨지만, 담배를 어찌나 많이 피워대는지 어느 누구도 금봉 스님 곁에는 가지 않으려 했다.
피우고 나면 또 피우고, 금방 피우고 나서도 또 담배를 피워대는 골초 스님이었으니, 금봉 스님이 선학원에 나타나기만 해도 온 도량에 담배 냄새가 진동하는지라 모두들 코를 싸쥐고 고개를 돌리기에 바빴다.
그러니 어느 누구인들 금봉 스님과 한 방을 쓰기를 원했겠는가?
어느 날, 금봉 스님이 선학원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모든 수좌들이 너나없이 금봉 스님과는 한방에서 잠을 자지 않으려고 효봉 스님이 계시는 방으로 모여 들었다.
이때 효봉 스님께서 젊은 수좌들을 크게 꾸짖었다.
“너희들은 어찌 금봉의 도(道)는 못보고 금봉의 담배만 보느냐?”
효봉 스님은 그렇게 꾸짖고 나서 스스로 목침을 들고 금봉 스님이 있던 방으로 거처를 옮겨 금봉 스님과 함께 지냈다.
줄창 피워대는 그 지독한 담배연기 속에서 쿨룩쿨룩 기침을 해가면서도 효봉 스님은 금봉 스님과 한방을 쓰셨던 것.
불교정화운동에 참여하시느라고 효봉 스님이 서울 안국동 선학원에 머물고 계시던 1955년 초. 몹시 추운 어느 날, 스님은 전라도에서 상경했다는 스물 네 살 청년의 인사를 받고 출가를 허락했다.
당초 이 청년은 서울을 거쳐 오대산으로 들어가 삭발출가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폭설이 내려 강원도 오대산 가는 교통이 두절된 바람에 한 스님의 소개로 효봉 스님께 인사를 올리게 되었던 것.이날 선학원에서 머리를 깎은 젊은이가 바로 법정(法頂) 스님.1955년 음력 7월 보름. 여름 안거가 끝나는 날, 효봉 스님은 통영 미륵산 미래사에서 법정에게 사미계를 내리고, 뒤이어 법정 혼자만 데리고 지리산 쌍계사 탑전으로 들어가 다시 참선삼매에 몰입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신참 제자 법정은 반찬거리를 구하기 위해 마을로 내려갔는데, 저녁 공양 지을 시간을 그만 놓치고 말았다.
길어야 십분 정도 늦은 시각이었다.
허겁지겁 탑전으로 돌아온 법정은 서둘러 저녁 공양 지을 채비를 했다.
“이 애 법정아.”
이때 효봉 스님이 제자를 불렀다.
“예 스님.”
“오늘은 저녁 공양을 짓지 말아라.”
“예에? 공양을 짓지 말라니요?”
“오늘은 단식이다!”
“예에? 아니 스님…?”
“오늘은 굶을 것인즉 그리 알아라.”
“수행자가 시간관념이 그렇게 없어서야 되겠느냐?”
효봉 스님은 역정을 내시거나 언성을 높이지도 않으신 채 그렇게 한 말씀 하시고는 돌아 앉으셨다.
스님도 제자도 그 날 저녁 공양은 고스란히 굶었다.
그리고 그 날 그 일은 제자 법정 스님에게 무서운 가르침으로 깊게 각인되었다.
말년에 효봉 스님은 청력이 떨어졌다.
누구나 노년기에 접어들면 점점 귀먹는 증상이 나타나게 마련이니 아랫사람들이 무슨 말씀을 드리려면 스님의 귀에다 가까이 대고 버럭버럭 고함치듯 해야만 했다.
어느 날 한 제자가 효봉 스님께 크게 여쭈었다.
“스님, 귀가 잘 안 들리시니 답답하시지요?”
그런데 효봉 스님은 그 말만은 금방 알아들으시고 이렇게 대답하셨다.
“답답하기는. 시시한 소리 안 들으니 오히려 좋다.”
효봉 스님께서 경남 통영의 미래사에 머물고 계실 때의 일이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일당의 <군사무장강도단>이 반란을 일으켜 국가를 통째로 삼킨 뒤의 일이었다.
한여름 어느 날 미래사에 정보계 형사가 나타났다.
효봉 스님의 제자였던 일관 수좌가 동국대학교에 다니다가 환속, 혁신계 운동에 참여했는데 5·16 이후 빨갱이로 몰려 체포령이 내렸고 문제의 일관 박완일(朴完一)은 도망자의 신세이니 만일 박완일이 이 절에 나타나면 즉각 고발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 문제의 도망자 박완일이 처량한 모습으로 미래사에 찾아와 옛 스승 효봉 스님께 인사를 올리고 무릎을 꿇었다.
“그래. 내, 나한테 올 줄 알았다. 혁신계 운동을 하다가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었다구?”
“예 스님. 죄송하옵니다.”
“당분간은 어디 갈 생각말고 내 방에 숨어 지내도록 해라.”
“아니옵니다 스님. 곧바로 피신을 해야 합니다.”
“허허 쓸데없는 소리! 내가 숨겨줄 것이니 여기 있도록 해!”
제자 박완일은 스님의 사랑에 울음을 터트렸다.
효봉 스님은 그날 시자에게 칼국수 두 그릇을 특별히 만들어 오도록 분부했다.
“완일이 너, 칼국수 무척 좋아했었지? 자 어서 들자꾸나.”
“스님께서는 아직도 칼국수를 좋아하십니까?”
“너 이녀석, 도망자로 다니느라고 날짜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구나.”
“무슨… 말씀이신지요?”
“인석아, 오늘이 팔월 초하루. 바로 완일이 너 귀빠진날 아니더냐?”
“네에? 오늘이 제 생일이라구요?”
칼국수를 먹던 도망자 박완일은 또 한번 울음을 터트렸다.
위대한 스승 효봉 스님께서는 환속한 제자, 도망자의 생일까지도 잊지 않고 계셨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