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선사의 깨달음
근대 한국 선불교의 선각자, 경허성우(鏡虛惺牛, 1849~1912)선사가 24살 나던 해인 1872년(高宗 9년) 대중들의 바램으로 동학사에서 개강하자 사방의 학인들이 마치 물이 동쪽으로 흐르듯이 몰려왔다.
선사는 31살 되던 해 1879년(高宗 16년) 여름, 어린 시절의 스승인 계허화상을 찾아뵙기 위해 대중에게 고하고 길을 떠났다가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 민가의 추녀 밑에서 비를 피하려 하자 주인이 내쫓았다.
그 동네 수십 집을 찾아 갔지만 모두 내쫓아서 이유를 묻자”방금 전염병이 치열하여 걸리기만 하면 서 있던 사람도 죽으니 어찌 감히 손님을 받겠는가?” 라고 대답했다.
경허는 마음이 떨리며 마치 죽음의 벼랑에 다다른 것 같으며 문자로서는 생사를 면치 못함을 깨닫고 전율했다.
실제로 1879년 6월 일본으로부터 부산에 전염된 콜레라가 전국에 퍼져서 수많은 사망자를 내고 그 해 7월에는 콜레라로 인하여 부산항의 무역업무를 중지할 정도였다.
경허선사는 산으로 돌아온 뒤 학인들을 흩어 보내고 문을 걸어 잠그고 단정히 앉아 영운선사의 “나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
라는 화두를 참구하면서 다리를 찌르고 머리를 부딪쳐서 수마를 쫓으며 한 생각이 만년되게 하여 은산철벽같이 하였다.
이렇게 참구하기를 석달만에 만기가 무르익었다.
그때 한 사미승이 경허스님의 옆에서 시중을 드는데 속성은 이씨였다.
그의 부친이 좌선을 여러해 동안 하여 스스로 깨달은 곳이 있어서 사람들은 사미의 부친을 이처사라고 불렀다.
사미의 스승이 그 집에 가서 처사와 이야기하는 중 처사가 말했다.
“공부를 하지 않는 중은 필경에는 소가 된다.”
스님이 말했다.
“중이 되어 마음을 밝히지 못하고 다만 신도의 시주만 받으면 반드시 소가 되어서 그 시주의 은혜를 갚게 되지요.”
이처사가 힐난하며 말했다.
“어떻게 사문이라는 스님의 대답이 이렇게 도리에 맞지 않습니까?”
스님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나는 선지를 잘 알지 못하여서 그러하오니 어떻게 대답해야 옳습니까?”
처사는 말했다.
“어찌, 소가 되기는 되어도 구멍 뚫을 곳이 없다 하지 않느뇨?”
그 스님은 묵묵히 돌아가서 사미에게 말했다.
“너희 부친께서 이러한 이야기를 하던데 나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사미는 말했다.
“지금 경허화상이 선공부를 심히 간절히 하여 잠자는 것도, 밥먹는 것
도 잊을 지경으로 하고 있으니 마땅히 이와 같은 이치를 알것입니다.
스님께서는 가서 물어 보십시오.”
그 스님은 경허선사가 참선 중인 문 앞으로 가서 이처사의 말을 전했다.
경허선사는 “소가 구멍 없다” 라는 대목에 이르러 화상의 안목이 정히움직여 옛부처(古佛) 나기 전의 소식이 활연히 앞에 나타나고 대지가 둘러 빠지는 것 같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
경허선사의 법제자 한암중원(漢巖重遠, 1876~1951)선사는 경허선사의 고독과 비범한 일대기를 정리한 『선사경허화상행장』을 편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