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염불선원에 주석 하셨던 수산 큰스님은
법도 있는 불교 집안의 후손인 부친 안주원씨의 3남 중 차남으로 1906년 2월 20일에 경남 함안에서 출생하였다.
15세 때부터 불교에 뜻을 두고 출가할 꿈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때는 이루지 못하고 한문 서예학습에 전념하면서 한의학을 배워 32년부터 한의원을 개업하였다.
51년에 드디어 경남 통영 미래사에서 효봉스님을 은사로 출가득도 하였으며 54년도에 해인사에서 자운스님을 수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였다.
이후 전국의 제방 선원에서 20하안거를 지내시며 수도에 전념 하였고 1973년에는 해인사에서 “정토염불은 불법중에 제일 중요한 법문” 인데 근래에 쇄퇴해짐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부흥시킬 뜻을 세우시고 자운 스님과 함께 염불만일회를 결성하여 대중과 함께 염불당을 설립 하였다.
76년부터는 대구 남지장사와 경주 법장사, 기림사등 주지를 역임하시고 85년에 대구 염불선원을 건립하여 선원장으로 주석하시면서 염불만일회와 노인대학을 설립하여 운영하셨는데 항상 법문하실 때는 당부하시기를
부모에게는 효를 행하고, 스승과 어른에게는 공경으로 대하며, 살생과 도둑질을 하지 말라, 하시고 그리고 나무아미타불을 불러 왕생업을 닦게 하셨는데 그중에 많은 이들이 금생에 바로 염불공덕을 입어서 수많은 영험담을 남겼으며 스님께 법을 듣고 출가한 신도 또한 여러명 있었다.
또 전국을 다니시면서 순회설법을 하셨는데 그때 스스로 “불청우”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청하지 않아도 벗이 되어 염불법을 알게 하여 사바를 벗어나게 하겠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법문을 다니실 때는 정토법문집등 저서을 무상으로 보시 하셨는데 그 수가 30만권에 이르며, 또 재소자들 포교를 위하여 4만권의 책자를 전국 교도소에 배포 하였다.
또 스님은 수많은 경전속에서 정토와 염불에 관한 경문을 찿아 내셨는데 항상 전체 불교경전의 3분의 1은 정토부 경전이라고 힘있게 말씀하셨다.
그렇게 평생을 生持戒律 즉 살아서는 계율을 지키고 死生淨土 즉 죽어서는 정토에 태어나자.를 주창하시면서 광제중생을 펴시다가 세연이 다하여 입적하신 때는 1996년 10월 1일 오전 6시 염불선원의 광명당이였는데 입적하실 때까지 거의 7일간을 신도와 스님들은 번갈아 가면서 계속 끊어지지 않고 조념을 하여 왕생을 도왔는데 때를 당하여서는 방안에 기이한 향기가 나고 스님께서는 두 팔을 올려 합장하는 상을 지으시면서 눈에는 잠시 광채가 있었다고 지켜 본 이가 전하였다.
큰스님은 그렇게 불 보살님의 영접을 받아 향기를 뿌리며 그리운 극락 세계에 왕생하신 것입니다.
저서 : “정토지남” ‘시심작불, ‘정법수호론, ‘수행요집, ‘염불법문집, ‘연화세계,
번역서 : 아미타경, 염불요문, 만선동귀집, 음반 : 권왕가, 극락으로 가는길, 정토 성불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