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일국사와 정취보살
정취보살은, 우리나라 불교의 구산선문 중에서 무염(無染)스님의 성주산문과 함께 가장 활발하게 선의 가르침을 편 굴산산문의 개산조 범일국사와의 신비스러운 만남을 통해 우리나라 불교와 인연을 맺고 있다.
범일국사는 836년 입당(入唐)하여 남종선의 드높은 경지를 체득한 선승이며 동시에 현재에도 매년 5월 단오때가 되면 “강릉대관령국사성황제”에서 주신으로 모셔지는 민중의 친근한 어른이다.
범일국사의 존재는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도 우리의 가슴속에 살아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이야기를 통해서 정취보살과 범일국사의 신비스
러운 만남을 살펴보기로 한다.
범일국사가 태화 연간(827~835), 당나라의 명주 개국사에 이르렀을 때 왼쪽 귀가 없어진 한 스님이 여러 스님의 끝자리에 앉아 있다가 범일국사에게 말했다.
“저는 스님과 같은 신라사람입니다.
제 고향은 명주 익령현(翼嶺懸;지금의 양양군) 경계의 덕기방입니다.
조사께서 훗날 본국에 돌아가시거든 꼭 제 집을 지어주셔야 합니다.”
이윽고 범일국사는 여러 총림으로 두루 다니며 선에 정진히다가 마조도일선사의 제자인 염관제안선사에게 법을 얻고 847년 귀국하여 당시 명주의 호족으로 이름 높던 도독 김공의 초청에 의해 굴산사를 세우고 선의 가르침을 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858년 2월 보름밤이었다.
지난 날 중국의 명주 개국사에서 만났던 스님이 창문 밑에 와서 말했다.
“옛날 명주 개국사에서 조사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약속이 늦어지는 것입니까.”
놀란 국사는 꿈에서 깨어나 사람들과 함께 익령경계로 찾아가서 그 스님이 있는 곳을 찾았다.
선문의 대선사로서 다망한 일상에 빠져있던 국사는 지난 날 중국의 한 절에서 만난 초라한 행색의 스님과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수소문 끝에 낙산(洛山)아래마을에 사는 여인을 찾아서 사는 곳을 물으니 덕기라고 대답했다.
그 여인에게는 여덟살난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항상 마을 남쪽 돌다리에 가서 놀았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게 물었다.
“너는 매일 누구랑 그렇게 재미있게 노니.”
아들은 천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응. 엄마, 나와 같이 노는 아이들 가운데에는 금빛이 반짝이는 아이도 있어요.”
어머니는 아들의 이야기를 국사에게 고했다.
국사는 놀라고 기뻐하며 금빛나는 아이와 함께 놀았다는 돌다리 밑에 가서 찾아보니 물속에 왼쪽 귀가 없는 석상이 있는 것이 아닌가.
국사는 그 석상의 얼굴이 옛날 개국사에서 만났던 스님과 같음을 알고 송구스러운마음에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 석상은 바로 정취보살상이었다.
이에 간자(簡子;점치는 댓조각)를 만들어 절을 지을 곳을 점쳤더니 낙산 위가 제일 좋은 곳이라고 하여 그 곳에 법당 세칸을 세우고 정취보살상을 모셨다.
정취보살은 이렇게 범일국사와 재회를 하고 우리나라 불교의 무대에 등장하고 있다.
범일국사가 중국에서 만난 고국의 스님은 왼쪽 귀가 없는데다 제일 끝자리에 앉는 초라한 행색의 스님이었으나 사실은 정취보살의 화신이었다는 이 이야기에는 몇 가지 해독가능한밑그림이 숨어있다.
보살은 항상 화려하고 위세높은 인간의 모습으로 화현하기보다는 평범한인간, 또는 사람들이 멸시할 만큼의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나 차별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일깨운다는 것이다.
십년이 지나서 범일국사의 꿈에 나타나 자신과의 약속을 잊고 있는 범일국사의 망각을 일깨운 정취보살의 화신은 역시 교단의 지도자가 젖어들기 쉬운 자만을 일깨운 것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정취보살에게 있어 범일국사의 망각은 자만이었던 것이다.
결국 우리나라 불교의 공간에 모습을 나타낸 정취보살은 신라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상징하는 하나의 영험담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