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망 속에 자기 복제

옛날 한 바라문이 살고 있었는데 창조신을 기리는 축제를 맞아 기르던 염소를 죽여 제단에 올리고저 했습니다.

그래서 염소를 막 죽이려고 하는데 갑자기 염소가 정신없이 웃어대다가 다시 엉엉 우는 것이었어요.

깜짝 놀란 브라만은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염소가 말했습니다.

“한 때 나도 당신처럼 바라문으로 염소를 죽여 제단에 올린 적이 있었소.

그 과보로 499번 염소로 태어나 499번의 죽임을 당해야 했소.

오늘이 그 오백 번 째 죽음이오.

기나긴 염소의 삶을 오늘로 끝내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기쁘오.

그래서 웃었소.

앞으로 오백 생을 염소로 태어나 오백 번 죽어야할 당신을 생각하니 이 얼마나 슬프오. 그래서 울었소.”

그 말을 들은 바라문이 겁이 나서 염소를 죽이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이 나를 죽이지 않더라도 나의 악업이 나를 죽이게 될 것이오.’

하인을 시켜 아무도 염소를 죽이지 못하게 했지만 해질 무렵 하늘에 날벼락이 치더니 바위가 튀어 염소는 죽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나’를 이루어 내는 조건들이란 우리가 짓는 생각이나 행위의 질에 따라 바람따라 흐르는 흰구름처럼 매 순간 변해가는 것들입니다.

우리들의 행위나 생각이 저 연기나 관계로서의 삶의 장을 철저히 살려낼 수 있을 때 우리는 삶의 본질적인 자유인 자유로부터의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되겠지요.

부처님께서는 세상에 태어나실 때 사방으로 일곱걸음을 걸으셨지요.

이 이야기는 철저하게 나에 갇혀 사는 삶의 모습인 지옥?아귀?축생?인간? 수라?하늘의 여섯 가지 자기중심적 삶의 틀을 깨트리셨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일곱이라는 숫자에는 바로 이런 뜻이 깃들어 있지요.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란 스스로 존재하는 ‘나’가 있다는 미망 속에 자기 복제를 계속하기 때문에 성립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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