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수행자(修行者)

두 사람의 수행자(修行者)

석존께서 사위국의 기원정사에 계시면서 많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설법하실 때의 일이다.

한 옛적에 안왕여래(安王如來)라는 부처가 세상에 나와 계실 무렵에, 사자덕왕(獅子德王)이라는 국왕이 인도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석가모니께서는 그 시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시었다.

이 사자덕왕에게는 무이우와 리이우라는 쌍둥이 왕자가 있었다.

어느 때, 이 두 왕자가 왕궁안의 높은 누각에 올라가 놀고 있는데 안왕여래가 대중에게 둘러싸여 왕궁의 문을 열고 천천히 들어오셨다.

이것을 보고 있던 무이는 리이우를 돌아보고 말하였다.

『지금 안왕여래가 이 왕궁에 들어오신 것을 너는 보았느냐?』

리이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하였다.

『보았습니다.』

무이우는 다시,

『우리들도 안왕여래와 같은 훌륭한 부처가 되어 보자꾸나.』

하고 게를 불러 리이우에게 들려 주었다.

『리이우야, 보아라,

안왕여래의

대중에게 둘러싸여

조용히 오시는 모습을

나는 마음 속에 결정하였노라

무상(無上)의 길을 구하여

생사의 괴로움을 건지려고,

세상의 모든 사람은

탐욕·질투·분노·오만 때문에

숱한 죄를 짓고

이 죄업 때문에 악도에 윤회(輪廻)한다.

우리는 부처님의 길을 찾아서

이 사람들을 제도하리라.

리이우야, 너도 또한

부처님의 길을 찾을지어다.

우담화(優曇華)와도 같이

부처님 만나기 힘들리라.』

리이우는 게로써 대답하여 말하였다.

『아무리 말하여도 되는 일 없고,

말 많으면 행동 따르지 않고

나는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마음 속으로 보리의 길 가리다.

부처의 길 말로 하는 이 많아도

말대로 행하는 사람 별로 없다.

행하지 않는 말은 거짓말이니

참된 과보 얻을리 없어라.

만일 그저 입으로 말하는 것으로

부처의 깨달음 얻을 양이면

모든 말, 말하는 자는

모 두 부처님 될 것이로다.』

이것을 듣고 우무이는 게를 불러 이에 반대하였다.

『그대의 발심(發心)같은 것을

일컬어 탐냄이라 하네,

구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발심을 입밖에 내지 못한다.

재물도 법도 다 베풀어 주고도

조금도 아깝다 하지 않네.

보리를 원하는 그것이야말로

대장부의 발심이라네.

그대의 발심 같은 것은

일컬어 게으름뱅이라 하지

못할 것이 두려워 말 못하니

이것은 대장부의 부끄럼이라네.

부처의 길 멀고 또 멀고

성취하기 어려움은 미리 미리

마음에 의심하고 헤아리기에

말로써 입 밖에 내지 못하는 것.』

리이우는,

『나는 안왕여래에게 가서 어느 것이 참된 발심인가를 부처님에게 밝혀 달래리라.』

하고 내뱉듯이 말하고 급히 누각의 계단을 내려와 부처에게 공양하려고 진주 구두와 一억짜리 보의(寶衣)를 가지고 부처 계시는 곳으로 향하였다.

리이우가 아직 계단을 채 내려오지 못하였는데, 무이우는 누각 난간에서 땅을 향하여 몸을 던졌다. 땅에 떨어졌어도 다치지 않고 그 길로 부처에게 가서 법의를 벗고, 머리에 달았던 구슬을 끌러 안왕여래에게 바치었다.

부처는 소년을 불쌍히 여겨 그것을 받으셨다. 조금 두이에 리이우도 부처에게로 왔다. 그는 자기보다 뒤에 오리라고 생각했던 무이우가 부처님 곁에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여 물어 보았다.

『무이우야, 너는 어느 길로 왔느냐, 나보다 늦게 떠나서 어떻게 먼저 왔나.』

이에 무이우는,

『리이우야, 나는 누각 위에서 몸을 던져 부처님께로 왔다. 몸을 던졌으나 조금도 다치지는 않았다.』

하고 대답하였다.

리이우는 이어서 비싼 옷과 진주 구두를 부처님께 바치고 게를 불러 말하였다.

『나는 본디 그릇된 도를 행하였소.

그러나 지금 세존을 우러르오.

이제부터 바는 도를 닦아

여러 부처님께 칭찬 받으리.』

무이우는 이 때, 게를 불러 리이우의 소극적인 구도(求道)를 비난하고 자기의 열성적인 태도를 주장하였다.

『목숨을 아낀

너의 구도는

제 이익을 위한 것이요,

남을 이롭게 하지 못하리라.

목숨을 아끼지 않고

수난(受難)을 원하는 나야말로

남을 이롭게 하여

괴로움을 구제하리.

부처를 뵘은 곧 길을 보는 것

다시 다른 것 구할 것 없이

법부(法夫)는 정도를 닦는다면서

실은 그릇된 도에 떨어지는 것.

중생을 그릇된 길속에서

바르다 하고 그르다 하며,

거기에 집착하고 얽매여서

영원히 바른 길에서 멀어지리.

원컨대 늘 부처님 만나 뵈옵고

항상 부처님의 길을 닦아

길이길이 중생을 제도하리.

원컨대 늘 선법(善法)에 살고

항상 불법(佛法)의 곡간을 가지고,

이 곡간의 보배로써

두고두고 중생을 이롭게 하리.

원컨대 늘 정진하는 마음으로써

불법 듣고 오른 길 깨달아

항상 선정(禪定) 속에 살면서

이 덕으로써 우러러 보이리.』

이리하여 두 왕자는 안왕여래 앞에서 출가하여 불도를 구하였다. 서로 나야말로 먼저 불도를 깨우치리라 하고 다짐하면서

어느 때, 무이우는 리이우에게 이렇게 물었다.

『리이우야, 너는 어떤 수행을 하여 나보다 먼저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으려 하느냐?』

이에 리이우는 대답하였다.

『무이우야, 나는 굉장한 마음을 일으킨 것이다. 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중생을 위하여 오랫동안 지옥의 고생을 달갑게 받고, 그 공덕에 의하여 무상의 보리를 성취하려는 맹세를 세운 것이다. 이러한 굳은 공덕을 쌓아서 너보다 먼저 불도를 깨달으려고 한다.

또 부드럽고, 괴로움을 참는 마음을 병으로 머리를 때려도 원한을 풀지 않고, 물론 눈에 성안 빛을 나타내지도 않고 입에 가책의 소리를 내지도 않고, 마음속에 맺힌 것이 있어도 꾹 참고 견디리라. 나는 지금 괴로움을 참는 수행을 하여 불법을 구하며, 불도의 깨달음을 바라고 나에게 해를 주려는 이런 사람들을 구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스스로 노여움이나 원망하는 마음을 일으킨다면, 현재 나에게 해를 입히고 있는 이런 사람과 무엇이 다르랴. 나는 선법을 닦는 사람이요. 그는 악법을 행하는 자다. 나는 선법을 닦는 사람으로서의 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악법을 행하는 자의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노여움과 원망하는 마음을 끊어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또 그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노여움과 원망하는 마음을 끊어 버리기 위하여 설법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몸이다.

이런 수행을 하여 무상의 보리를 성취하려는 맹세를 내세운 것이다. 이렇게 굳은 공덕을 쌓아, 너보다 먼저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으려는 것이다.』

무이우가 물었다.

『리이우야, 그런 마음을 일으켰으니, 그것으로 공덕이 쌓아진다고 생각하느냐.』

『무이우야, 이런 마음은 일으키지 않고서 이렇게 공덕은 쌓을 수 있겠느냐, 어떻게 보살의 수행이 가능하겠는가.』

무이우는 이 소리를 듣고 말하였다.

『리이우야, 그런 마음을 일으켰다고 해서 공덕이 쌓여지는 것은 아니다. 첫째, 그 마음이란 무엇이냐. 마음이란 비고 곡두 같은 것이다. 그것들은 무시로 생기고 무시로 또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이라는 것은 형태가 없는 것이다.

또한 형태가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대체 있다 없다 하는 것 자체가 견해의 차이 뿐이다. 이 견해라는 것 사로잡는 것을 사견(邪見)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견은 사도(邪道)이다. 보리라고 일컫지 않는다. 유무의 설을 취하는 사람은 보리의 길에서 멀어지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불도를 깨달을 수가 있겠는가 있다든가 없다든가 하는 것은 말의 유희에 불과하다.

말의 유희는 보살이 가까이 하여 닦아서는 안 될 불법이다. 그러면, 어떤 법을 보살은 닦아야 할 것인가 어떠한 법도 보살은 닦는 것이 아니다. 이 법이야말로 닦아야 한다고 한다면 그 법은 비법이 된다. 보살은 일체 법에 대하여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일체 법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는 것이 무상의 보리인 것이다. 또 보살이 보리에 대하여 이렇게 이해를 했다 해도 또한 비법이 된다. 왜냐하면 이해의 흔적도 없는 것이 무상의 보리이다. 또 보살이 보리에 관하여 이같이 알고 이와같이 보고 있어도 ‘도한 비법이 된다.

왜냐하면 해탈(解脫)의 자취도 없는 것이 무상의 보리인 것이다. 또 보살이 보리에 관하여 이와 같이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는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즉시에 비법이 된다. 왜냐하면 무성무설(無性無說)이 무상의 보리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듣고난 리이우는 물었다.

『무이우야, 만일 보리가 있으면 있다고 하는 것이 좋지 않으냐. 만일 없다면 없다고 하는 것이 좋지 않으냐. 왜 그렇게 보리에 관하여 모든 언설(言說)을 부정하느냐.』

『리이우야, 보리란 말의 유희를 초월한 것이다. 있다 없다는 논할 것이 아니라 있다 없다의 말의 유희를 초월한데 있는 것이다.』

『무이우야, 나는 있다 없다의 말의 유희 속에 보리가 없고, 있다 없다의 말의 유희를 떠날 때에 보리가 있다는 이치를 모르겠다.』

『리이우야, 그러면 이제부터 부처님한테 가서 어느 쪽이 옳은지 판단을 받기로 하자.』

이리하여 두 사람은 안왕여래에게 가서 부처님 발에 이마를 대로 절하고 나서 한 쪽에 앉아 리이우는 입을 열어 두 사람의 주장하는 바를 말하고 부처님의 판단을 청하였다.

그랬더니 부처님은 무이우를 향하여,

『좋도다 좋도다.』

하고, 그 말에 대한 비결까지 허락하여 가르쳐 주고, 다음에 리이우를 향하여 간곡하게 모든 말의 유희에게 떨어져 모든 마음이 분별을 떠난 곳에 무상의 보리가 존재하는 것을 설명하여 보여 주었다. 이에 리이우는 이것을 깊이 믿을 수가 있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八만 살 동안 쉬지 않고, 자지 않고 열심히 관념경행(觀念徑行)하고, 다음 八만 살 동안 탐욕과 노여운 마음은 일으키지 않고, 죽어서 아래쪽의 제천세계(第千世界) 묘견불(妙肩佛) 있는 곳에 태어나 동시에 출가하여 숙명을 알고, 정진 수행하기 전세에서와 다름없이 하였다.

이렇게 전전하여 六억 八천만의 부처 있는 곳에 차례차례로 태어나고 그리한 뒤에 무이우는 먼저 상중엄(上衆嚴)이라는 부처가 되고, 리이우는 뒤를 이어 일상중(日上衆)이라는 부처로 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佛說華手經 第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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