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죽한 욕설 속에 번뜩이는 禪旨
춘성 스님은 세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스님이 아니었고 큰 감투를 별로 쓴 일이 없었기에 매스컴에 자주 소개되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1960년대, 1970년대 한국불교계에서 ‘욕쟁이 스님’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춘성 스님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걸죽한 욕설을 무차별로 쏟아내는 스님이었다.
지나치게 화장을 하고 사치스런 옷을 걸친 채 으시대기 좋아하는 여자가 절에 오면 춘성 스님은 아무리 지체가 높은 고관대작의 부인이라고 하더라도 즉석에서 “씨부랄 년!” 이라는 욕부터 쏟아냈고, 값비싼 털옷을 입고 온 여자의 털옷을 벗게 한 뒤 그 자리에서 태워버린 일까지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걸림없이 쏟아내는 춘성 스님의 무지막지한 욕설을 들어도 누구 한사람 감히 항의하거나 대들지 못한 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참 이상하게도 춘성 스님의 욕설에서는 천박한 냄새가 나는게 아니라 상큼하고 속시원한 지혜가 번뜩였으니, 이것은 아마도 걸죽하고 질퍽한 춘성 스님의 육두문자와 욕설 속에 선지(禪旨)가 담겨있었던 탓이 아닌가 싶다.
“내 본적은 아버지 현두(賢頭)”
한국전쟁 직후의 일이었다. 춘성 스님은 서울 도봉산 망월사(望月寺)를 혼자 지키고 있었는데 절이 퇴락할대로 퇴락하여 보수공사를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동란을 겪고 난 직후라 너나없이 살림이 곤궁했던 터에 당시만 해도 첩첩산중 망월사에 불공 올리러 오는 신도들도 별로 없었으니 절 살림이 넉넉했을 리 없었다.
춘성 스님은 생각다 못해 손수 나무를 베어다가 절을 중수하려고 벌목을 했다. 그런데 재수 없게도 나무 몇 그루 베어와 놓은게 의정부 영림서 직원에게 적발되었다. 이때만 해도 허가 없이 나무를 베는 행위는 살림법 위반으로 가차 없이 잡아다가 ‘콩밥’을 먹이던 시절이었다. 이 무렵 농촌에서 백성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은 첫째가 순사요, 둘째는 밀주단속을 하는 세무서원 그리고 셋째는 사람을 마음대로 잡아갈 수 있는 산림계 직원이었다. 당시 산림계 직원이 마음만 먹으면 웬만한 농촌 백성은 모두가 다 단속대상이었다. 그만큼 땔나무를 산에서 얻어와야 했던 시설이었으므로 대부분의 농민이 산림법을 위반하고 있었는데, 더더구나 땔나무감이 아니라 집 고칠 목재용 나무를 허가 없이 벌목했으면 이건 그야말로 걸려도 크게 걸리는 산림법 위반이었다.
춘성 스님은 의정부 영림서(營林署)의 서슬 시퍼런 호출을 받고 영림서에 출두했다. 영림서 서장이 조서를 작성하기 위해 춘성 스님에게 물었다.
“본적이 어디 입니까?”
“내 본적이야 우리 아버지 현두(賢頭)이지.”
이 말은 들은 영림서 서장이 하도 기가막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다시 물었다.
“그것 말고 스님의 고향이 어디냔 말입니다.”
“내 고향이야 우리 어머니 ××요.”
영림서장은 하도 기가막혀 더 이상 물을 말이 없었다.
“아. 아. 알았으니 어서 그만 나가시오! 이 늙은 중아!”
이렇게 해서 영락없이 쇠고랑을 찰 줄 알았던 춘성 스님은 산림법을 위반하고도 그날로 석방되었다.
“무엇이 죽었다 살아났다고?”
춘성 스님이 서울 불광동 녹번리에 있는 어느 절에 갔다가 시내로 들어오는 버스를 탔다. 그런대 그때나 지금이나 서양종교를 선교한답시고 버스에 올라 떠들어대는 광신자가 있었다.
이날 춘성 스님이 타고 있던 버스에 서양종교의 광신자가 판자에 ‘예수를 믿으시오!’라고 써 붙이고 올라오더니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죽었다 다시 살아난 예수를 믿으시오! 예수를 믿으면 천당에 갑니다!” 그런데 이 광신자가 일부러 승복을 입고 있는 춘성 스님 앞으로 와서 더욱 큰소리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죽었다 다시 살아난 예수를 믿으시오!”
그러자 춘성 스님이 느닷없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엇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에이끼 놈! 죽었다 살아나는 것은 남자의 ××밖에 없어 이놈아!”
버스 안에 타고 있던 승객들이 일시에 박장대소를 했다. 그 광신도는 순식간에 당한 일이라 어쩔 줄을 모르며 버스에서 내렸다.
항아리에 냉수 채우고 정진
춘성 스님은 이렇듯 못마땅한 일을 보거나 겪으면 주저없이 즉석에서 육두문자로 대성일갈 호통을 내렸다. 그러나 춘성 스님은 늘 이렇게 막가는 분은 결코 아니었다.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스님은 정진 중에 사정없이 몰려오는 졸음을 물리치기위해 비장한 결심을 했다.
스님은 법당 뒤 빈터에 구덩이를 파고 그 자리에 큰 항아리를 묻은 다음, 그 항아리에 냉수를 가득 채웠다. 엄동설한 자칫하면 항아리에 가득 찬 냉수가 얼어 항아리가 터질 지경이었는데 춘성 스님은 참선수행을 하다가 졸음이 밀려오면 옷을 훌렁훌렁 벗어 던지고 그 찬물 담긴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서 머리만 내밀고 앉아 정진을 했다. 발가벗고 항아리 속에 들어 앉아 참선하면서 춘성 스님은 쾌재를 불렀다.
“허허! 이제야 졸음한테 항복을 받았다!”
수행자로서 춘성 스님은 참으로 무서운 분이었고 서릿발 같은 분이었다. 도봉산 망월사에서 참선 수행을 할적에 젊은 수좌들이 담요를 덮고 자다가 춘성 스님에게 들키면 그 자리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수행자가 편하고 따뜻한 잠을 자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야 이 씨부랄 놈아. 그 담요 당장 이리 내놓아라!” 춘성 스님은 기어이 젊은 수좌로부터 담요를 빼앗아 그 자리에서 불태워 버렸다. 그토록 수행에 철저했던 분이 바로 춘성이었는데 서울 근교 어느 비구니 사찰 중창불사를 위한 법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파격적인 법문을 남기기도 했다.
“시집 장가가는 데는 ××와 ××가 제일이듯. 중창불사 하는 데는 돈이 제일이니 오늘 이 법회에 온 년들아 돈 많이 시주하고 가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