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양명과 금산대사

왕양명과 금산대사

중국 명나라 때의 석학 왕양명(王湯明)은 절강성(淅江省)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창도한 달인(達人) 이었다.

왕양명은 유교뿐만 아니라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으니, 그는 달마(達磨)선사의 돈오선풍(頓悟禪風)이 이미 전세(前世)부터 그의 마음을 밝혔던 선승(禪僧)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에 대하여 인연설화(因緣說話)가 전해지고 있다.

일찍이 절강성 금산사(金山寺)에 금산대사(金山大師)라는 한 스님이 계셨는데, 그는 한 마음으로 선정(禪定) 공부를 하더니, 생사와 해탈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도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가 어느 날 점심 공양을 하고 목욕갱의(沐浴更衣)한 뒤에 가사장삼을 정제해 입고 어떤 조용한 법당으로 들어가면서 안으로 문을 꼭 잠그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이 법당문을 절대로 열지 말라.」

고 부탁하였다.

그러고 들어가서는 다시나오지 아니하였다.

그 뒤에 스님 네들이 궁금증이 나서 법당문을 박차고 들어가 보고 싶었으나 그가 성승(聖僧)으로 부탁한 바가 있어 감히 열어볼 생각을 내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 법당문을 열지 못한 채 50년이나 지났는데 하루는 왕양명이 제자 백 여명을 데리고 금산사(金山寺)로 봄놀이 소풍을 왔다가 절 도량을 둘러보니 모든 것이 어딘지 모르게 낯익게 보여 전에 살던 집 같이만 느껴졌다.

그런데 여러 법당의 참배를 마치고 한 법당에 이르니 문이 잠겨 있었다.

그 절 스님에게 문을 열어 달라고 하였더니 그 문은 절대로 열지 못한다고 한다.

왕양명이 이르되

「왜 열수가 없는가?」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옛날 도승이 들어가시면서(이 문을 절대로 열지 말라)는 분부가 계셔서 그렇습니다.」

왕양명은 이 말을 듣고 호기심이 나서 밖에 달린 문고리를 잡고 힘차게 당기었더니 부사의 하게도 문이 곧 열리었다.

들어가서 본즉 한 스님이 가사와 장삼을 입은 채로 가만히 입정(入定)하고 앉아 계신데, 시체가 썩지 않고 「미이라」가 되어 굳어 있었다.

그런데 왕양명은 벽상에 써 붙인 글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법당문이 열렸다는 말을 듣고 대중스님네가 대종을 치면서 몰려들어 돌아간 선사육신(禪師商身)에게 예배를 하고 왕양명의 제자도 모여들어서 절을 하였다.

그런데 왕양명을 보고 대중스님들이 물었다.

「선생이 무슨 뜻으로 이 법당문을 열었습니까?」

「이 벽상에 써 붙인 글을 보시오. 잠근 문이니 내가 열수밖에 도리가 있겠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대중이 그 글을 보니

오십년 전의 왕수인이여 !

문을 여는 사람이 문을 닫은 사람일세.

정령이 바뀌어 다시 돌아오니

비로소 선문에 무너지지 않는 불사신이 있음을 믿겠네.

五十年前王守仁 開門人是閉門人

오십년전왕수인 개문인시폐문인

精靈剝落還歸復 始信祥門不壞身

정영박락환귀복 시신상문불괴신

이러한 글귀였다.

그래서 대중은 그가 과거 금산대사(金山大師)의 후신임을 알고 다시금 예배하고 그제서야 알고 보니 유가(儒家)에서 유명한 왕양명 선생임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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