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백스님이 죽어 순찰사 되다
이조말엽(서기 1719) 동래 범어사에서는 낭백(郎自 法號(법호)는 樂安(낙안))이라는 스님이 있었다.
스님은 계행이 청정하였으며 행인은 물론 금정산 주위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물심으로 많은 보시를 하였다.
당시 이조 말엽의 배불정책으로 동래부사는 남달리 괴팍스러웠으며, 관권을 이용하여 270여종이나 되는 엄청난 잡역(雜役)을부과하여 자기 분이 내키는 대로 스님들을 마구 혹사시켰다.
절에도 할 일이 많은데 매일 같은 출역으로 들볶이니 도무지 붙어 있을 수가 없어 절유지조차 곤란하게 되었다.
낭백스님은 새벽예불도 제대로 못할 형편에 있으면서 어찌 해서라도 스님들의 고역을 면하도록 노력하였다.
남몰래 부처님 앞에 나아가,
「하루라도 속히 이 생을 마치고 내생에는 큰 벼슬에 올라 도 닦는 스님들로 하여금 관권구속과 혹사 없이 도를 닦을 수 있도록 제가 보살피게 해주 시옵소서‥‥‥」
하고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는 홀연히 절을 떠나 동구 밖의 산비탈을 개간하여 오이와 감자를 심어 배고픈 자를 위하여 보시하였다.
또 한편 밤이면 짚신을 삼아서 발을 벗고 가는 행인들에게 보시하였으며, 날 저문 후의 나그네를 위하여 오두막을 지어 함께 머무르게 하고 손수 밥을 지어 배고픔을 면하게 하였다.
그리고 여전히 새벽이면 일어나 서쪽에 있는 범어사를 향하여 부처님께 정성스레 기도를 하였다.
이웃 마을에서도 낭백스님이 지나가면 모두 합장하였으며, 또한 일을 하게 되면 도와주곤 하였다.
그럭저럭 몇 해가 지난 초겨울 어느 날 낭백스님은 모든 것을 정리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범어사로 올라갔다.
바로 그날 밤을 법당에서 새우더니 아침에 어느 행자를 만나서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몸은 주린 범에게 보시를 하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내가 간 후 25년이 지나서 절의 잡역을 없애고 불사를 위해서 애쓰는 관리가 있으면 그 사람이 나인 줄 알아라.」
하고는, 그 길로 산으로 올라가서 몸을 범에게 던져 보시하였다.
범이 먹다 남은 시체는 며칠 후 나뭇꾼들에게 의해서 발견되어 절에서 화장하였는데 사리(舍利)와 영골(靈骨)이 나와 지금도 범어사의 탑에 모셔져 있다.
그 후 과연 24살난 나이 어린 경상도 순찰사 조엄이 새로 부임하여 각군을 시찰하게 되었다.
동래군에 들렀다가 때 마침 봄날이라 산천경치가 좋기에 범어사를 찾기로 하였다.
동구 밖에 이르러 개간된 오이밭과 감자밭을 지나면서 어쩐지 향수를 느끼며, 절에 이르러서는 마치 고향에 찾아온 듯한 감격으로 우선 금강계단(金剛戒壇)에 올라가 무수히 절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금 어떤 스님을 통하여 절의 사정을 묻더니, 여러 잡역으로 스님들이 고생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단번에 면제하여주고 많은 불사를 하기로 약속하였다.
그 스님은 하도 기이하여 조순찰사에게 나이를 물으니 24살이라 하였다.
그 스님은 낭백스님이 돌아가신 지 24년이 되는 오늘이 때마침 제삿날이라고 하니,
조엄 순찰사는 그제서야 자기의 전생이 낭백스님이었음을 깨닫고, 그 후부터는 평생을 통하여 많은 불사를 하였다.
<奇聞異記>